소설리스트

S급 병사 반세주-28화 (28/206)

#  28

28. 살고 싶다면 돈을 써라

“그럼 연봉계약서 사인하겠습니다.”

말쑥한 인상의 군복이 안 어울리는 남자다.

평생 펜만 쥐고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았을 것 같은 인상이고.

“자대 배치 전, 이 모든 상황에 동의하시는 겁니다? 기밀 누설 시 무기징역에 준하는 형벌을 받으며, 부모를 비롯해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습니다.”

“네네.”

안경을 고쳐 쓴 그가 종이를 내밀었다.

반세주, 이름 석 자를 쓰고 그 옆에 사인한다.

연봉계약서 문구가 살벌하기 짝이 없다.

기밀 누설 시 무기 징역.

국가에 피해를 주는 행위를 했을 시, 징역 20년.

큰 건 두 가지였다.

뭐, 세부적으로 이런 말 저런 말 주저리주저리 써놨지만.

그 뒤, 주요 내용은 하나였다.

계약 기간 7년에 연봉 3000만 원.

“계약서 전부 이럽니까?”

참지 못하고 묻자.

“전부라고 말하면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지만, 네 대동소이 합니다.”

연봉 3000만 원이 큰돈이냐고?

아니, 목숨 걸고 싸우는 대가치고는 너무 짜다.

최소 연봉 1억 이상이라는 소문은 어디서 온 거냐?

“15페이지 보시면 아시겠지만, 돈이 목적이라면 그게 도움이 될 겁니다.”

15페이지.

추가수당이다.

훈장 받았을 시, 포상금 지급.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을 시, 5,000만 원 상당의 포상금 지급.

목숨에 위협을 받는 전장 참여 시, 회당 200만 원 위험수당 지급.

“이 연봉계약서에 유일하게 쓸 만한 조항이긴 한데, 연봉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은 없습니까?”

“진급하시면 됩니다.”

그가 귀찮다는 오러를 전신으로 보이며 말했다.

판에 박힌 말이었다.

나가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자.

“그럼.”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하며 그가 말했다.

“대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

이 군복 코스프레 변호사 양반이 받을 손님은 아직도 몇백 명이 남아 있었다.

세주가 일어나 나갔다.

훈련소 마지막 날.

자대 배치 전, 연봉 계약서에 사인하는 수순이 끝났다.

“뭐, 자대에서 돈 쓸 일 있을까요? 집으로 송금은 가능하다고 했으니 다행이네요.”

유진이 수수하게 웃으며 말한다.

집에 돈을 보내야 하는 이도 있고.

“뭐, 나쁘진 않습니다. 월급쟁이도.”

목숨 걸고 싸우는 걸 회사원쯤으로 취급하는 곰 같은 인간도 있다.

“형편없어. 자유를 왜 강요하나 했더니, 이딴 계약서 작성을 위해서였나? 인권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종이 쪼가리다.”

불만만 가득한 병사도 있다.

그리고.

“이제 자대 입대구나.”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나서는.

인류를 구해야 할 영웅도 있다.

-분발해. 겨우 커버링 하고 에임 모드 정도로 만족하는 건 아니지?

거기에 꼬장꼬장하기가 시누이 같은 로봇도.

*

빠빠빠빠빠빠빠!

훈련소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저 기상나팔을 만든 새끼를 찾지 못한 거다.

“저 나팔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돼.”

이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외계 괴물 습격 사건 덕에, 전투에 참여했던 훈련병에게 혜택이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 인원, 자동 이병 진급이 그것이다.

덕분에 따로 작전에 나가지 않고 곧바로 자대 전입 준비를 했다.

일어나서 준비하고 더플백에 대강 짐을 싸 넣었다.

‘자대에 가면 전부 사제로 바꾼다.’

아무래도 군용 속옷은 잘 안 맞는다.

군대에 있으면 본래 바깥 물품이 귀한 법이다.

짐을 챙겨 넣고 나가니, 육공 트럭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차에 탑승한다.”

박민우와 조태슬이 뛰어다니며 차량에 훈련병을 태우고.

세주도 전우조와 한 차에 올라탔다.

나무로 된 의자에 마주 보는 형태다.

“다들 준비됐지?”

왜 하필.

악마 소위가 선탑하며 뒤를 향해 묻는다.

“그럼 출발.”

전에 흥분했던 모습은 싹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이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기까지.

-형을 보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설마.’

-아니야. 조심하는 게 좋겠어.

세주는 새삼 주먹을 쥐고 허공에 섀도우 복싱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치용이 물었다.

“별거 아냐.”

그냥 트레이닝 중이야.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지만.

우연히라도 붙게 되면 작살을 내놓을 각오다.

차량으로 1시간.

그리고 기차로 2시간.

내려서 다시 차량 탑승.

“멀리도 가네.”

잠을 자다가 깬 치용이 투덜거렸다.

유진은 가만히 차에 몸을 맡기더니 곧 잠들어버렸다.

이럴 때 보면 유진이 얼마나 배포가 큰지 알 수 있다.

인준은 계속 인상을 쓴 채였다.

누가 보면 똥 마려운 줄 알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차량이 멈추고.

“도착이다.”

중간에 어디쯤을 지나가는지 몰랐다.

이번에 모은 에너지를 어디다 쓸까 해서 테크룸에 있던 세주가 눈을 떴다.

‘어디쯤이야?’

그는 보지 않았어도 프로비던스라는 놈이 알아서 주변을 파악한다.

-경기도 양주네.

“자, 내려!”

모두 차에서 내리자 악마 소위가 앞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산길이다.

위로 올라가니 위병소가 보였다.

넓은 분지가 있었고, 그 안쪽에 건물이 여러 채 있었다.

규모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근데 왜 저 자식은 같이 가냐?’

훈련병 전입까지 따라 올 정도로 사려 깊은 남자였던가?

-아무래도 불길하지?

악마 소위가 위병소로 향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왔다.”

마치 아는 사람한테 인사하는 것 같다.

설마 아니겠지.

“김택동 외 훈련병 8명 전입이라고 적어.”

악마 소위가 위병 근무를 서는 병사에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몸을 돌린다.

“환영한다. 25사단, 특수 직할, 수색강습대에 온 걸.”

일명 수강대다.

수색과 강습, 양쪽을 다 아우르는 병사들로 이뤄진.

흔치 않은 목숨 걸고 싸우는 부대였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레이퍼 놈들을 만날 기회가 많은 건 좋은 거고, 저기 저 기분 나쁜 눈깔과 재수 없는 웃음의 소유자와 부대가 같은 건 나쁜 거.

‘정리하지 마.’

더 기분이 묘하다.

“빠졌네, 소위님 말씀 안 들리지?”

위병 중 하나가 눈을 부라렸다.

벌써 군기를 잡는 거냐.

“이병 박상호!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한 명씩 인사를 한다.

세주도 그들에 섞여 대충 입만 벙긋거렸다.

“오호, 반세주?”

“이병 반세주!”

“입만 벙긋거린 거 아냐?”

-봐, 형만 보잖아. 관심 있네. 관심 있어.

“그런 사실 없습니다.”

“내가 잘못 봤나?”

“야, 미쳤냐? 소위님이 잘못 본 거야?”

고참 임에 분명한 위병이 외쳤다.

“시정하겠습니다.”

군대는 역시 계급이 깡패였다.

전우조는 같은 내무실에 배정했다.

적어도 손발이 맞는 이들끼리는 계속 어울리게 해주겠다는 거다.

까칠하게 군 위병을 보고 치용이 속삭인다.

“형님, 저 자식 교육 좀 하겠습니다.

“아니, 놔둬.”

제발. 사고 치지 마라.

“멍청아, 고참이다. 군대를 다녀왔으면 선임과 후임 개념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토끼의 간처럼 정말 뇌라는 부속을 빼놓고 다니는 거냐?”

“뭐? 토끼 간? 내 뇌가 토끼 간이라고?”

아니,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인준과 치용은 평소와 같았다.

눈을 부라린 위병은 김완 이란 이름이었다.

계급은 일병이었고.

꽤 생긴 얼굴이었으나.

“이 새끼 생긴 거 봐라.”

정유진에 비하자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니.

“마음에 안 들어.”

그가 유진을 싫어한 건 당연지사다.

여자만 자신보다 아름다운 이를 시기하는 줄 알았던가?

남자도 자기보다 잘 생긴 놈 보면 시비 건다.

“편하게 있어.”

대체로 다른 병사들은 위계질서를 크게 강요하는 편이 아니었다.

침대가 나란히 여덟 개, 그러니까 막사 하나에 여덟 명이 기거했다.

전우조 2개 조가 한 분대로 편성됐다.

훈련소와는 다른 편제였다.

“김택동 소위님이 관심 많더라?”

“잘 모르겠습니다.”

김완은 위병소의 인연과 더불어 같은 내무실을 썼다.

그는 유진을 적대했고, 치용을 보면 눈 깔으란 말을 뱉었으며.

인준에게는 말없이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세주에게는.

“왜냐? 이유를 말해봐라.”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다.

-죽여 달라고 비는데, 그냥 죽여 버려.

가끔은 그걸 보다 프로비던스도 세주를 부추겼지만.

“그런 사실 없습니다.”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얼차려를 주지도 않으니,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죽여 버린다. 죽인다. 꼭 죽인다.”

물론 그건 세주 얘기였다.

의외로 치용이 쿨 내 풀풀 나게 넘겼지만.

인준은 김완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물론 안 보이는 곳에서만.

“왜 참습니까?”

어느 날은 유진이 물었다.

커버링에 훈련소에서 보여준 무력.

세주 뿐 아니라, 치용 정도만 돼도 저 정도는 그냥 때려눕힐 것 같았다.

“불필요하니까.”

“김완이 자꾸 저러니까 다른 소대 일병들도 툭툭 건드립니다.”

유진의 말에 세주가 웃었다.

“그 치가 널 괴롭힐 수 있는 이유가 뭐냐?”

“…그게 뭡니까?”

세주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오버로크 된 이등병 마크다.

“계급 때문이잖아.”

자대에 전입/해/ 온지도 이 주.

이제는 슬슬 부대 내에서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사이 세주는 프로비던스도 이용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정보를 습득했다.

수색과 강습, 기습과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해 출동하는 부대다.

2주, 신병 적응 기간 동안에 이 부대 내에서는 총 여섯 번의 출전이 있었다.

그중 두 번은 레이퍼 무리를 만났고.

한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사이 알 게 된 것 하나, 적을 만나서 공적을 올리면, 진급한다.

둘, 현재 수강대의 전적은 형편없다.

애초에 소수 인원으로 적을 붙드는 역할이 이들에게 주어진 최우선 임무였다.

‘고로 난 레이퍼 무리를 마음껏 사냥할 수 있다는 소리고.’

-다치지만 않으면 계속 출전해서 공적을 쌓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럼 계급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일병?

2주의 신병 적응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서 이미 스쳐 가는 계급이 될 뿐이다.

“계급을 올리면 끝이다?”

“정답.”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휴, 그나저나 큰일 났습니다. 설마, 자대에서 이렇게 돈 쓸 일이 많을 줄은.”

“출전해서 수당 받으면 돼.”

자대는 돈 쓸 일이 많았다.

먹는 거라고는 삼시 세끼에 부식까지 충실히 잘 나왔다.

군대 내에 따로 식당을 운영하고, 민간인 여사님들이 와서 밥을 준다.

첫 번째 입대 때와는 질이 다른 식사다.

문제는 그 외였다.

“대머리가 모은 돈으로 무기 살까 고민한다던데 거기 가보자.”

“설마 인준이 형이 보는 데서 대머리라고 하는 건 아니죠?”

유진이 놀라서 묻는다.

“본래 사람 욕은 없는 데서 해야 재밌는 거야. 대놓고 하면 죽자고 덤벼들 건데 그러면 안 되지.”

유진이 이상한 눈으로 세주를 쳐다봤다.

“뭐?”

“아, 아닙니다.”

둘이 곧 PX 쪽으로 향했다.

그 바로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이 보인다.

커다랗게 쓰인 세 글자가 정문 위에 붙어 있다.

“어서 와라.”

보급소 담당 장교가 그들을 맞이했다.

무려 중위다.

세주는 창고 앞에 놓인 화려한 진열대를 봤다.

권총, 기관 권총, 기관단총, 소총, 저격 소총, RPG-7, 산탄총 등등.

하물며 대물 저격에 쓰이는 라이플도 있었다.

치사하고 정말 치사하다.

군대는 치사했다.

보급소에서는 이 물건을 팔았다.

누구에게?

일반 장병들과 장교들한테다.

“자 오늘 들어온 물건 보여줄까? 이상하게 인기가 많더라고 레이퍼 놈들 갑주 하나 뚫기도 어려운 건데.”

그가 권총 칸을 가리켰다.

세주의 눈이 자기도 모르게 돌아갔다.

“데저트 이글, 남자의 로망인가 봐?”

꿀꺽.

왜일까? 세주도 은근히 장병 카드에 손이 갔다.

‘첫 월급이 들어왔던가.’

권총 한 정 정도는 사고 싶었다.

‘누가 생각했는지 몰라도.’

보급소를 보면 군대에서 하는 얘기는 뻔하다.

살고 싶다면 돈을 써라.

그것도 펑펑.

좋은 무기와 방어구는 목숨 줄이니.

연봉이 높은 대신 돈을 쓰게 하는 구조.

정말 개 같은 구조였다.

누가 생각했는지 몰라도 제갈공명급의 지혜가 잔머리로 발달한 새끼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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