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 그래서 승낙? 거절?
긴장이 풀린다.
번개콩 조교, 김형석은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남은 셋이 떠올랐다.
“앞쪽이 위험해!”
위병소를 지키는 셋이 떠올랐다.
김택동, 박민우, 조태슬.
레이퍼가 이곳에 나가서 시가지라도 간다면.
지옥이 열리는 거다.
이미 이곳 상황도 패닉의 연속이지만, 저것들을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였다.
고작 셋이서 레이퍼 세 마리를 막고 있는 이유다.
철컥.
세주는 대답 대신 자신의 저격용 총을 들었다.
그리고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댄다.
-명중률 95%.
놈들의 뒤쪽, 레이퍼 한 마리의 혹이 보인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탕.
인준이 그걸 보고 외쳤다.
“전군 전진!”
50명의 훈련병이 개떼처럼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총구를 앞으로 들이댄다.
“발사!”
타다다다당!
그 사이.
철컥.
팅, 날아가는 탄피와 매캐한 화약 냄새를 맡으며.
-명중률 86%.
두 번째 저격이다.
탕! 퍽!
뒤쪽, 둔기에 가까운 다리 하나를 부순다.
-악마 소위 죽겠어.
두 자루 칼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전신에 자잘한 상처는 둘째치고,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보통 출혈량으로 보이지 않는다.
앞쪽에 훈련병들이 시야를 가렸다.
휘릭.
총에 매인 어깨끈을 등에 메고 세주가 뛰었다.
추억이 어린 1종 창고다.
단숨에 벽을 박차고 위로 뛰었다.
지붕 끝이 손에 닿았다.
잡고 당겨 단숨에 옥상에 오른다.
드르륵.
굴곡진 파란 지붕을 군화로 긁으며 엎드린다.
‘가장 위험한 곳부터.’
-악마 소위 앞, 6번 7번 다리.
8번 다리는 방금 부순 참이다.
위에서 밑이다.
동체 밑에 깔린 놈의 약점은 보이지 않는다.
탕! 철컥! 탕! 철컥! 탕!
일일이 약점을 부수고 죽이는 것보다 앞의 셋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둔다.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탄피를 허공에 튕겨낸다.
총알이 적중되기 무섭게 방아쇠를 당긴다.
‘다음.’
-우측 놈, 3번 다리.
휙.
총구가 방향을 튼다.
스코프에 눈을 뗐다가 위치 확인 후 다시 조준이다.
탕! 철컥! 탕! 철컥!
-남은 장탄 수 1발.
그 사이 약점을 부순 한 놈이 훈련병들의 사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열 발 탄창에 아홉 발을 썼다.
그 결과였다.
끼에에엑!
레이퍼 두 마리를 합쳐 남은 다리가 5개뿐이었다.
첫 번째 놈의 오른쪽 다리를 전부 총알로 박살 냈다.
레이퍼의 다리는 사람 팔보다 가늘다.
그걸 저격으로 일일이 맞춰 낸 거다.
다음 놈도 매한가지였다.
기동력을 잃은 두 놈이다.
그럼에도 몸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조태슬이 뒤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허벅지를 보니 반쯤 잘렸는지 피가 철철 흘렀다.
박민우가 상의를 벗어서 찍 하고 찢더니 그대로 다리를 감싼다.
기동력을 잃은 두 마리도 남은 훈련병의 밥이었다.
투다다다다.
총성이 울리고.
끼에에에엑!
레이퍼의 비명이 들린다.
그 앞.
김택동이 서서 창고 위 훈련병을 바라봤다.
세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악마 소위와 마주쳤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둘 사이를 스쳤다.
-형.
‘응.’
-저 새끼 왜 노려봐?
‘내 말이.’
세주는 그대로 지붕에서 내려왔다.
상황종료였다.
*
사상자 226명.
습격한 레이퍼의 숫자 7마리.
살아남은 이들도 단체 소독실 행이었다.
사아아.
흰 연기 속에서 녹색 불빛을 따라 걷는다.
논산훈련소는 남녀를 기준으로 중대를 나눴고.
다행인지 습격은 남자 소대에 집중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
-파악 불가야.
교관, 조교도 딱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의문을 풀 길이 없었다.
다양한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홀로그램 문자로 남은 에너지가 떠올랐다.
348.
죽인 레이퍼를 프로비던스가 일일이 찾아 에너지를 흡수한 덕분이다.
탄약고 앞에서 하나.
그리고 다른 훈련병을 규합하며 셋.
마지막 위병소 앞에서 셋.
일곱 마리 전부한테 세주가 총알을 박은 셈이다.
다음 날부터 훈련 강도가 약해졌다.
“본래 마지막 주는 휴식이 주를 이룬다. 개인 정비 후 자대 배치를 기다릴 것.”
‘훈련소 졸업 기념 휴가, 외출, 외박 따위는 없는 거냐?’
-잘도 내보내 주겠다.
하긴, 그렇다.
자기도 모르게 흉흉한 기세를 뿜는 이들이다.
습격으로 인한 침울한 분위기에 밖으로 내보냈다가는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른다.
개인 트레이닝이 주를 이루는 3일이 주어졌다.
3일 뒤면 자대 배치를 위해 훈련소를 떠나는 날이었다.
“반세주.”
박민우가 그를 찾았다.
“3456번 훈련병, 반세주.”
“따라 나온다.”
밖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내무실에 누워, 에너지를 어디다 쓸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불길한데.
‘뭐가?’
-원래 단체생활에서 불려 가면 좋은 거 하나 없는 법이야. 몰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수틀리면 다 제끼고 튀어서 독고다이 하는 거다. 긴장하고.
‘닥쳐.’
레이퍼를 상대해보니 알 수 있다.
현재 상태로는 혼자서 놈들을 죽일 순 없다.
그리고 현재 군에 속한 몸.
주변에 전투력을 지닌 병력이 널렸다.
이순신에게 열두 척에 배가 있었다면.
세주에게는 끌려와서 훈련으로 단련된 대한민국 군인이 있었다.
“들어간다.”
상황실도 아니고, 훈련소 외곽에 있는 창고다.
눈삽이나 빗자루를 모아놓는, 잘 쓰지도 않는 그런 창고.
“여기로 들어갑니까?”
“안에 훈련병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들어가.”
취향 한 번 고약한 사람이네.
기왕 만나기로 했으면, 에어컨 빵빵한 상황실에서 보면 좀 좋나.
긴장할 법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세주는 완벽하게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덜컥.
오래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후끈한 여름 공기가 안을 채우고 있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좁지도 않았다.
조악한 나무 천장 틈새로 햇빛이 들어와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중간중간 음영이 진 곳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어둡다기보다는 밝은 곳이었다.
“반갑다.”
그 앞.
뒷짐을 진 남자 하나가 보였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단, 군복이 아니었다.
붙는 청바지에 남색의 반팔 티.
굵은 팔뚝이 보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각진 턱을 가진 남자다.
기가 막히게 선글라스가 어울려서 ‘나 남자다’ 이런 수컷 냄새를 풀풀 풍겼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풉.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단춧구멍인데? 저거 앞은 보이는 거야?
‘하지 마.’
간신히 틀어막은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눈이 심각하게 작았다.
말만 들었지, 정말 단춧구멍으로 보이는 눈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다.
다년간의 직장생활로 단련된 포커페이스가 힘을 썼다.
굳은 얼굴로 세주가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난 말할 수 없는 부대 소속, 장광안이다.”
그걸 소개라고 하는 거냐?
“레이퍼 일곱 마리 척살, 훈련병을 지휘해 스폰 부대 괴멸. 맞나?”
“맞습니다.”
사실이다. 굳이 부인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증인만 50명이 넘는다.
“훈련병이 혼자서 레이퍼 일곱 마리를 잡아?”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잡은 게 아니다.
“부대원이 힘을 합쳐 물리쳤습니다만?”
“성격도 만만찮게 건방진 것 같고.”
이 새끼가, 시비 거나?
겉보기에 세주보다 들어 보이는 얼굴도 아니다.
-몇 살이냐고 물어봐. 싸가지가 없네. 연장자에 대한 예우가 없어.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내로남불이야. 내가 하는 건 괜찮은데 남이 하니까 열 받네.
“아닙니다. 저 무척 고분고분합니다.”
“거짓말이지?”
“진짭니다. 노예근성이 타고난 그런 캐릭텁니다. 제가.”
“웃기네. 너 내 눈 보고 웃으려고 했지?”
정곡을 찔렸다.
아니라고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휙.
순간 단춧구멍이 달려와 주먹을 내질렀다.
빨랐다.
솔직히 조금만 방심했다면 맞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세주는 뒤로 오른발을 빼며 몸을 반 바퀴 틀었다.
틱!
주먹이 코끝을 스쳤다.
피하자마자 그가 주먹을 횡으로 휘두른다.
고개를 숙여 피하자.
쌩하고 머리 위로 파공음이 들렸다.
-패자.
‘오냐!’
먼저 공격한 건 저쪽이다.
그러니까 이건 정당방위였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어 상대의 발을 밟았다.
꽉!
“음!”
그러면서도 장광안이란 남자는 쉴 새 없이 공격했다.
그 작은 눈으로 잘도 보고 치는구나!
주먹을 내지르고, 빈틈으로 왼쪽 팔꿈치를 종으로 올려친다.
근접거리 박투가 뛰어났다.
프로비던스의 과외가 아니었다면 당했을 것이다.
쩍!
올라오는 팔꿈치를 팔꿈치로 맞부딪치고, 이마를 앞으로 쭉 내민다.
박치기를 피한 장광안의 얼굴을 향해 오른 주먹을 짧게 끊어쳤다.
쩍!
가벼운 일격으로 보이겠지만, 순간 에너지를 운용했다.
퍽!
코피가 터졌다.
햇빛에 핏방울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코피를 줄줄 흘리며 장광안이 고개를 뒤로 물리고 손을 든다.
“더 합니까?”
완벽한 우위다.
“아니, 그만.”
장광안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다 우뚝하고 제자리에 멈췄다.
“…발.”
“아, 깜빡했습니다.”
왼발로 상대의 발을 밟고 있었다.
물론 고의다.
세주가 뒤로 물러났다.
“후, 좋아. 본론만 말하지.”
진즉에 그러지. 왜 사서 얻어맞나.
-흥. 봐라. 내 제자의 실력을. 감히 어디서 덤벼.
‘누가 네 제자야. 이 또라이야.’
-형이.
‘말을 말자.’
“자대 배치고 뭐고, 우리 부대로 와라.”
작은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 부대가 뭡니까?”
“알려줄 수 없다.”
“제가 거길 가서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지금보다 나은 생활, 연봉, 복지.”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없습니다.”
세주는 자대도, 그리고 이 자가 말하는 부대도 모른다.
“더 말해줄 수는 없다. 믿고 와라. 적어도 자대에서 썩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린 베레모 같은 특수부대입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부대 이름도, 하는 일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실제로 이득이 되는 종류일 것이다.
“저 혼자만 가야 합니까?”
“전우조나 다른 훈련병을 염두에 두는 거라면 포기해. 이건 실력을 기초로 찾아온 행운이다.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이들은 제외야.”
그 기준이 궁금하다.
하지만 묻는다고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다.
“어떻게 할 건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는 건가?
“제 등급은 아십니까?”
“D급? 그딴 등급이 전투력을 판단한다고? 그게 진짜라면 내 눈앞에 있는 훈련병은 이미 시체가 되었어야 옳을 텐데?”
이미 스스로 증명한 사실이다.
등급과 별개로 일곱 마리 레이퍼를 죽인 세주다.
“그렇습니까?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장광안이 물었다.
“그래서, 승낙? 거절?”
*
김택동이 평소와 다른, 미소를 잃은 얼굴로 창고로 달려왔다.
그 앞에 서 있는 박민우가 손을 모자 끝으로 올린다.
“필승.”
“이 개새끼가.”
달려오던 김택동이 그대로 그를 걷어찼다.
“컥!”
쿵!
박민우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굴렀다.
“네 직속 상관이 누구야?”
“쿨럭, 김택동 소위님입니다.”
“근데 누구 명령을 받고 훈련병을 빼돌려?”
그 사이 몸을 바로 세운 박민우가 부동자세로 답했다.
“코드명 알파에서 왔습니다.”
“누가 몰라서 묻나!”
쩌렁쩌렁하게 김택동이 외쳤다.
박민우는 무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시정하겠습니다.”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코드명 알파는 모든 부대의 우위에 있다.
김택동도 안다.
아주 잘.
한때 그곳을 목표로 했으니까.
지금 한 일은 화풀이일 뿐이었다.
텅.
그 사이 창고 문이 열렸다.
“여전히 지랄 맞은 성격이구나.”
선글라스를 낀 이가 나온다.
그 뒤로 세주도.
세주는 전에 없이 흥분한 악마 소위를 보고 내심 놀랐다.
‘뭔 일이래?’
-그러게. 안 그럴 것 같은 놈이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누구 마음대로 내 훈련병을 데려가.”
“왜 이렇게 열 내는 거냐?”
장광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세주는 나름 특별하다.
하지만 그건 일반 사병 기준이다.
코드명 알파와는 다르다.
“네가 알 바 아니다.”
한때는 동기, 현재는 상급자지만 김택동은 안하무인이었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걸 본 장광안은 두 손을 들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는 깔끔하게 김택동을 무시하고 세주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반세주.”
“3456번 훈련병 반세주.”
“무슨 제안을 받았지?”
“음. 일단 더 좋은 조건이란 말은 했지만….”
“그런데?”
“거절했습니다만?”
“…뭐?”
“거. 절. 거절했습니다.”
김택동이 놀란 눈으로 세주를 바라본다.
그의 눈 안쪽, 이상한 열기가 타오른다.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그런 감정의 흔적이었다.
“알았다.”
그리고 휙 돌아서 돌아간다.
‘브로, 나 무섭다.’
-형, 이제 욕실에서 비누 함부로 줍지 마.
‘야, 하지 마. 진짜 무섭다고.’
과거 군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강간 에피소드가 새록새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