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23. 그 미션 받고 열 마리 더
‘추천해봐. 4,000으로 살 수 있는 거 없어? 시간 날 때 카탈로그라도 만들어 놔라. 이거 원 불편해서.’
-가지가지 하네. 내가 무슨 화장품 방문판매하는 아줌만 줄 알아?
‘무슨 불세출의 오버 뭐시기가 카탈로그 하나 못 만들어?’
빠직.
-정신력 단련 필요.
프로비던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데도 풍경이 변한다.
눈이 아니라 신경을 통해 직접 주입되는 시각 정보다.
끼아아아악.
섬뜩한 귀신이 나와서 비명을 지르고.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세 번 보면 질리는 게 사람이다.’
놀라긴 했지만, 전만큼 패닉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너무 자주 보여줬다. 브로. 새로운 레퍼토리를 가져와.’
-요청 접수.
후악.
풍경이 다시 변한다.
소복을 입은 오래된 친구는 사라지고.
꺄하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섞여 들린다.
‘그만!’
세주가 급하게 외쳤다.
때는 중학교 2학년.
“그럼 다음 차례는 반세주와 아이들!”
장기 자랑에 나섰다.
고된 연습으로 안 그래도 음치인 목이 더 쉬었고.
춤은 애초에 그의 인연이 없다.
네 명의 남자는 반대표로 나서서, 2학년 3반 얼굴에 똥칠, 아니 똥을 갖다 부었다.
“왜 나갔니.”
눈을 흘기며 담임이 말한다. 아니, 담임선생님 얼굴까지 붉어져 있다.
세주의 얼굴이 터진 홍시처럼 붉어졌다.
흑역사다.
과거를 지울 수 있다면 때려 죽어도 꼭 지우고 싶은.
-몇 개 더 있는데 해볼래?
‘치사한 자식.’
-흥.
침통하다.
이 쓰레기 같은 로봇은 뭔데 남의 기억을 들여다본단 말인가?
‘…계새끼.’
-뭐?
‘훌륭한 기계 님이시라고.’
다른 건 몰라도 정신력 단련만큼은 제대로 되는 것 같았다.
예전, 처음 프로비던스를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만큼 담이 세졌다.
‘추천할 거 없어?’
카탈로그는 없지만, 쇼핑 도우미는 있다.
-너무 적긴 한데, 편법으로 할 수 있는 건 있지. 형이 지금 쓰면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뭔데?’
-전략 전술을 총괄하는 트레이닝 센터를 오픈하면 쓸 수 있는 기능 중 하나야. 시뮬레이션 모드.
‘오호, 트레이닝 센터 오픈이 12만이었나?’
-맞아.
‘그럼 4,000으로 그 시뮬레이션 모드를 몇 번이나 쓸 수 있는데?’
-1회당 1,000.
점점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는 기분이다.
현상재생이 15.
프로비던스의 개인 과외가 100.
그리고 시뮬레이션 모드가 회당 1,000이다.
‘비싼데?’
-고작 4,000이야. 어쩔 수 없지.
‘아, 몰라. 일단 해보자. 무슨 기능인데.’
-부대원을 구현해서 미리 시뮬레이션해보는 거야. 다양한 상황에서 판단력을 기를 수 있지.
세주 혼자 총을 빵빵 쏴서 괴물 수백 마리를 죽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부대원의 도움을 필수다.
그러기 위해서 셋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훈련소 전우조가 같은 자대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고 했으니.
손발을 맞춰두면 유용하리란 걸 예상했다.
‘부대원은 김치용, 이인준, 정유진으로 하자.’
-무뇌, 대머리, 호빠 선수 셋 내일 스캔해서 기본정보 입력 예정, 필요 에너지 1,500 필요.
‘해.’
다음 날, 에너지 1,500을 써서 스캔을 완료하고.
일과가 끝난 후, 그 정보를 토대로 시뮬레이션 모드를 사용했다.
테크룸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시뮬레이션 시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홀로그램 문자가 뜬다.
-논산 훈련소
-강남역
-왕십리역
“셋 다 내가 익숙한 장소구나.”
하나는 지금 있는 곳, 한 군데는 직장이 있던 곳, 한 군데는 살던 곳이다.
참 삭막하게 살았다.
하긴 술도 집 근처, 회식은 회사 근처.
그나마 강남역이 번화가라 다행이지.
회사가 변두리였으면 1년에 한 번이나 화려한 거리를 거닐까 말까다.
-전부 시가지 전투만 모으긴 했는데, 필요하다면 산 등지나 넓은 황무지 같은 무대도 가상으로 설정할 수 있어.
‘훈련소로 하자.’
현재 가장 익숙한 곳을 골랐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현재 있는 곳이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는 법이다.
화악.
눈앞에 갑자기 화면이 쑥하고 다가온다.
그러더니 곧 사지에 감각이 희미해졌다
“음.”
기묘한 감각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진정해. 게임 많이 해봤다면서, 마우스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중하면 편할 거야.
프로비던스의 말을 따르며 시선을 돌린다고 생각하자 논산 훈련소 조감도가 보였다.
하늘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너무 먼데.”
-가까이 보고 싶다고 생각해.
쑤우욱!
이번에는 너무 가까웠다.
시멘트벽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꼴이다.
회색 벽면이 눈앞을 채웠다
하지만 금세 제대로 시야를 잡았다.
적당히 주변을 둘러볼 정도다.
그 앞에 넷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세주와 그 일행이다.
-시뮬레이션 모드는 전략과 전술을 위한 것. 손자병법을 500번 읽는다고 병법의 천재가 되는 건 불가능해.
“그건 나도 동감.”
이미 사용법은 대강 익혔다.
클릭한다고 생각하자 치용이 꿈틀한다.
‘이렇게 움직이는구나.’
마우스 대신 집중이다.
집중하고 의도된 행동을 입력한다.
그럼 그대로 그들이 따른다.
-지휘관은 아군을 많이 죽여 본 사람이며, 훌륭한 지휘관은 그 이후 적군을 더 많이 죽인 사람을 말하는 법.
세주가 머릿속으로 치용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도.
둘이 벽에 바짝 붙어서 엄폐 자세를 취한다.
-훌륭한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많이 죽고, 죽여 보면 돼. 희생 없는 승리란 없어. 우리의 삶은 게임이 아니니까.
가끔 프로비던스는 칼날 같은 말을 했다.
그래. 이건 게임이 아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사고해도 지금은 전쟁 중이며.
아군이 열세인 상황일 것이다.
“알아.”
잘 알고 있다.
-그럼 장난은 그만하지?
시뮬레이션 모드는 자유도가 높았다.
유진이 인준의 머리를 쓰다듬고, 치용은 건물 벽을 핥고 있었다.
“아니, 진짜 생각한 대로 다 되네.”
-집중하라고.
그와 동시에 건물 위에서 녹색 체액이 뚝 떨어진다.
시야를 확장하니, 레이퍼 열댓 마리가 옥상에 있다.
-미션, 아군의 피해 2인 이하로 레이퍼 스무 마리를 죽이시오.
“그 미션 받고 열 마리 더.”
-마음대로 해라. 그냥.
“오케이!”
*
“공기를 느껴! 호흡을 가다듬는다! 방아쇠는 손가락으로 당기는 게 아니다!”
조태슬, 싸가지 일병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외친다.
모래밭에 엎드린 이들이 저 멀리 보이는 과녁을 노려본다.
‘덥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달군다.
“D급 훈련병! 혼자서 테스트 통과 한 거로 생각하나? 자신이 천재 같나? 멍청한 소리다! 지금 너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운이 나빠서 재수가 없어서 군대에 끌려왔다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포기할 건가? 정말 그럴 건가?”
제대로 된 훈련의 시작.
악마 소위가 말한 대로였다.
조교의 말투가 바뀌고, 쉼 없이 몰아쳐 왔다.
“후우.”
호흡을 뱉으며 열기를 조금이라도 식힌다.
벌써 42시간째.
단체 훈련 일정이 없는 날, 스나이퍼 훈련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견뎌라.
비가 와도 뜨거운 햇살이 내리쫴도.
방광이 터질 것 같아도 참는다.
“어이!”
엎드린 자세에서 누군가 고개를 까닥하고 숙인다.
42시간이다.
몰려오는 수마를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인 거다.
빡!
그걸 지켜보던 조태슬이 훈련병에게 성큼 다가가.
서슴없이 엎드린 훈련병의 소총을 걷어찬다.
“악!”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비틀린다.
“적이 버티고 있다! 그런데 잠이 온다는 거냐? 아군 따위는 몰살당해도 상관없다는 거냐? 네 총알 한 발에 네 부모와 연인과 네가 아는 모든 사람의 목숨이 달렸다!”
검지가 뒤틀린 훈련병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훈련병, 포기하고 내려가면 나노킷으로 치료해주겠다. 포기할 건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단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적을 죽입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좋다!”
검지가 부러진 훈련병이 중지로 방아쇠를 잡는다.
-초인 프로젝트로 몸이 개조되었다 해도 너무 강행군이야.
프로비던스가 중간중간 세주의 상태를 말해 준다.
‘괜찮아.’
흐릿해지던 정신을 부여잡는다.
지금 손에 쥔 총에 가족과 친구들의 생명이 걸렸다.
“심장박동을 느껴라. 박동과 박동 사이다. 총은 손으로 쏘지 않는다. 어디로 쏜다고?”
“가슴으로!”
“심장, 하트로 쏘는 거다. 사수 준비!”
대답은 없다.
그동안 했던 훈련으로 준비라는 두 글자가 주는 무게를 알게 된 그들이다.
밑에 복잡한 레일을 깔아 둔 표적판이 드르륵 하고 움직인다.
그 사이, 자신의 사로가 적힌 표적을 찾아 맞춰야 했다.
42시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시간이다.
세주는 눈을 감았다.
드르륵.
머릿속으로 자신의 표적판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다시 눈을 뜨고.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시작.”
조태슬의 목소리가 들린다.
탕! 탕!
표적 번호를 잊은 놈, 성급함에 맞추지 못하는 놈, 각양각색이다.
퍽!
부서지는 표적이 몇 개 되지 않는다.
-6번.
말해주지 않아도 기억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날카로웠다.
프로비던스의 도움이 없었다 해도.
반세주는 최고의 저격수가 될 재능을 갖춘 이였다.
에임 모드도 켜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당긴다.
탕.
총성이 아련히 들렸다.
피곤했다.
마흔 시간 이상 누워있던 몸은 굳어서 삐걱거린다.
몸을 일으키니, 그사이 바람에 쌓인 모래가 부스스 떨어졌다.
명중이다.
“후.”
숨을 내뱉으며 몸 상태를 가다듬고 곧바로 일어났다.
이 훈련은 사격 후가 더 중요했다.
“뛰어!”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조교가 외친다.
“악!”
대답은 ‘악’으로 한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린다.
30km를 시속 30km 이상을 유지하며 달린다.
한 시간 내에 포인트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시 탈락이다.
“후아, 후아.”
왼발에 호흡을 뱉고 오른발에 마신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트레이닝으로 숨이 차오르는 걸 컨트롤 했다.
-목표 지점 480m.
전용 네비게이션, 프로비던스의 안내와 함께 포인트에 도착 후.
촤아악.
바닥에 엎드린다.
짧은 수풀이 나 있는 고지대에 자리를 잡은 채 목표물을 찾는다.
-왼쪽. 45도.
세주보다 프로비던스가 먼저 찾았다.
녹색의 표적이 보였다.
철컥. 탕!
숨 쉴 틈도 없이 쏜다.
저격 기동 훈련.
기다리고 쏘고, 뛰어서 위치를 바꿔 쏜다.
이틀 만에 훈련이 끝남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명중. 총기 반납하고 내려갑니다.”
샤워, 그리고 컵라면이 간절했다.
땀에 전 군복 위로 흰 소금기가 보였다.
22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덕분에 에너지 축적도 손해 봤다.
그렇다고 훈련을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더 열심히 먹는 수밖에.’
샤워하고 취사장으로 향했다.
잠과 밥 중에 고르라면 잠을 고르고 싶지만.
손실된 에너지를 보충해둬야 한다.
잔여 에너지가 몇백 정도 남았지만, 펑펑 쓸 정도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