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 단단한 솜털
주목받기 싫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셋을 설득했다.
아니.
“그냥 해. 좋은 거네.”
치용이 했다. 그 설득.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단순한 사실 앞에 인준도 굳이 출처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절대 못 믿는다는 표정으로.
“넌 천재구나.”
라고 말했을 뿐.
세주는 셋의 등에 손을 댔다.
숫자로 표기되며 프로비던스가 쓰는 에너지는 소실되면 끝이지만.
커버링에 쓰는 에너지는 달랐다.
군에 표현을 따르자면 노블 패스라는 새로운 혈관에 떠도는 힘이다.
그건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종류였다.
“자, 느껴.”
커버링으로 수련하며 축적한 에너지를 셋의 몸에 주입한다.
“아아. 간지럽습니다.”
민감하기는 유진이 가장 민감했고.
“더, 더.”
치용은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아, 갑자기 도와주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진다.
인준은 조금 더딘 편이었다.
“따갑네.”
무디고 더디지만, 직접 몸으로 에너지가 들어간다.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셋 다 방식은 다르다. 자신만의 느낌대로 그들은 에너지를 받아들였다.
“하아하아. 그걸 다루는 방식은 내일 하자.”
근 십분 넘게 그들의 몸에 에너지를 주입했다.
30분을 전력 질주해도 숨이 찰 뿐 지치지 않는데, 그런데 고작 십 분 만에 체력이 고갈됐다.
노블 패스를 활성화해서 에너지를 쓰는 건 그만큼 고된 일이었다.
그 이후, 몇 날 며칠을 잠을 줄이고 개인 트레이닝 시간을 줄여가며 충실히 배웠고.
인준까지 커버링에 성공했다.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사용 금지였다.
“몸 사리자고.”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인준은 여전히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여기는 군대고, 난 굳이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이 없어. 너희 셋에게 말하는 것도 꽤 고민했다.”
우대해줬으면 얌전히 받아먹고 그만 물어보란 말이다.
“음.”
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상길이 같은 새끼네. 줘도 말이 많아.”
“너 같이 단순한 놈과 내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치욕이다.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
둘은 평소랑 같이 투닥거렸다.
유진은 한참 커버링 훈련을 하다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곧 등을 땅에 기대고 누워버렸다.
“힘드냐?”
“보통이 아니네요. 숨도 차고.”
“익숙해지면 조금 나을 거다.”
굳이 사람들이 많은 자리가 아니면 유진은 편한 대로 말했다.
인준과 치용도 한두 마디 하다가 지금은 포기했다.
“자대로 가면 돈은 많이 주겠죠?”
얼굴도 곱상하고 귀티가 흐르는 유진이다.
“돈?”
“네. 돈이 필요하거든요.”
“여기서 돈 쓸 일이 있어?”
물론 세주는 PX에 직장인 연봉을 바치는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의식주가 해결되기에 돈 쓸 필요가 거의 없다.
“여기 말고 밖이요.”
가족이구나. 말하지 않아도 느낌이 왔다.
“할머니가 폐지를 모으세요. 동생도 넷이나 있고요.”
“부모님은?”
“없어요.”
없다는 말에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한테 네 카드를 준 거냐?”
“돈 한 두 푼에 연연해서 제가 형한테 받은 은혜를 외면했다면 할머니한테 맞아 죽을걸요.”
“할머니 성깔 있구나.”
“네. 괄괄하시죠. 욕도 찰지게 잘하시고.”
말하며 밝게 웃는다.
여자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 눈들이 하트로 변하겠다.
“밖에서는 뭐했는데?”
“호스트바요.”
“…뭐?”
“생각하시는 그거 맞아요.”
의외다. 아니,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돈이 필요했어요. 동생들 학교도 보내고 가방이라도 사주려면.”
그래. 돈 벌어서 네 목구멍에 다 넘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군대는 끌려온 거야?”
“지원했죠.”
“…군대보다 호스트바가 낫지 않냐?”
버는 돈만 생각하면 유진은 분명 에이스였을 거다.
웃으며 유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해주시던 누님이 계셨는데, 그분 남편한테 걸려서요.”
“그런데?”
“죽는 것보다는 군대가 나을 것 같아서 도망 다니다 지원해서 입대했죠.”
역시나, 이 자식 보기보다는 강단이 좋다.
“그 누님이랑은 그니까, 아니다. 말을 말자.”
“하하. 좀 진하긴 했어요. 그게 음. 지원을 많이 해주셔서 좋았는데.”
생긴 것만 보고 순수하다고 생각한 놈들 줄을 세우면 연병장 한 바퀴는 돌릴 것 같은데.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다.’
“군대도 연봉이 엄청 좋다고 들었는데 훈련병은 아니라서 실망스럽긴 해요. 모아둔 돈도 몇 달 뒤면 다 떨어질 것 같은데.”
“…잘 될 거다.”
몇 명의 여자를 만나, 아니 묻지 말자.
괜히 비참해질 것 같다.
“저도 그걸 간절히 바라죠. 잘 되기를.”
그 사이 치용이 씩씩대며 다가왔다.
“형님!”
“응?”
“제가 무식합니까?!”
뒤에서 인준이 픽하고 웃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 거냐.
솔직하게 말해서 치용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걸 놔둘 것인가.
아니면 거짓을 말해 그의 자존감을 지켜줄 것인가.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애초에 스포츠카와 스쿠터가 경주한다고 해서 그 스쿠터에게 넌 욕을 할 수 있겠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네 머리는 스쿠터고 두뇌만 치자면 인준은 스포츠카쯤은 될 거라고.
“넌 무식하지 않아. 무엇보다 네 장점은 이쪽이 아니다.”
말하며 머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쪽이 네 장점이지.”
“그렇죠. 제 갑빠가 또 한 갑빠 하죠.”
아니, 가슴 근육 말고 네 몸이 무기라고.
설명은 포기했다.
그날 밤.
내무실에 누워 세주가 말했다.
‘브로, 자장가.’
조용한 음악을 기대하는 그에게 프로비던스가 말했다.
-외계인의 피 연구가 끝났어.
‘응?’
-연구 완료. 에너지로 치환할 수 있음. 독소를 제외하고 에너지만 흡수 가능. 승인해줘.
오호, 독소를 빼고 순수 에너지만 먹는다는 거다.
‘좋아.’
-빛이 새어나가겠어.
그 말에 모포를 뒤집어쓰자 프로비던스가 빛을 뿜는다.
은은한 빛이 허공에 물건을 그린다.
외계인의 피가 둥둥 떠다녔다.
-자, 마셔.
‘…응?’
-흡수하면 에너지 4000 충전 가능. 정제돼서 고농축 에너지가 됐어.
‘이걸 마시라고?’
허공에 둥둥 뜬 녹색의 액체가 보인다.
걸쭉한 액체가 먹기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되도록 저걸 입에 넣고 싶지 않다.
-에너지라니까. 에너지? 에너지 몰라?
아니, 아는데.
협박에 가까운 권유다.
-녹즙이라고 생각해.
‘잘도.’
“후.”
자기도 모르게 숨을 내뱉고 꿀꺽 삼켰다.
이건 녹즙이다. 수없이 되뇐다.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목구멍에 넘겼다.
“후아.”
먹고 나서 숨을 뱉으니 비릿한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마시자마자 홀로그램 문자가 보인다.
[에너지 4000↑]
그리고 동시에 꾸드득.
피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수고했…. 신체 변화 감지. 원인… 외계인의 피 흡수로 인한 변화. 해롭다고 판단되는 순간, 독소 추출 시스템으로 제거 시도.
‘…괜찮아.’
순간 놀랐지만 세주는 프로비던스를 말렸다.
피부의 솜털이 스르륵 하고 한 번 섰다가 가라앉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신에 난 솜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뚜두두둑.
그리고 아주 옅은 빛의 솜털이 풍성하게 자란다.
금세 털북숭이라도 될 것 같지만, 자라며 얇게 변한 솜털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레귤러 상황이네. 괜찮아? 신체 내부는 모두 양호, 피부만 변화가 일어났어.
‘괜찮다니까.’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하자 호도독 하고 솜털이 선다.
-아, 형 피부가.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전신에 선 솜털이 마치 갑옷처럼 팔을 감쌌다.
겉으로 보면 그냥 피부가 전보다 우윳빛으로 변한 것뿐이다.
하지만 실상은 레이퍼처럼 솜털이 세 겹으로 피부 겉을 감싼다.
툭하고 손으로 때려보니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외계 생명체의 특징 전이. 잭팟이다.
레이퍼의 공격을 막아낼 방패가 생긴 순간이었다.
*
4,400.
프로비던스의 개인 교습에 600을 사용하고 당분간 매일 사용하는 에너지를 제하고 쓸 수 있는 여유분이다.
이대로 에너지를 모아서 에임 모드 스킬을 여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아끼면 똥 되는 법이지.’
세주는 매일 누울 때마다 테크룸을 둘러보며 에너지를 쓸 곳을 찾아 헤맸다.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 같아.
‘있으면 쓰는 거야. 아끼면 뭐하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난 오늘만 살겠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미래를 그리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외계인 피 연구가 끝나고 나서 확실히 깨달았다.
‘외계인을 잡으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외계인이란 놈들은 전장에 나가면 수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침공 후 소규모 전투는 계속해서 있다는 건 알았다.
군에 머리채 잡혀 끌려오기 전에도 그 정도는 알았다.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뉴스에서 그런 내용을 보도했다.
그리고 언론을 장악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대이기에, 아마도 세주가 알았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전투와 사상자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만큼 외계인을 상대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