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 풀도 키가 커졌고
“안색이 좋아졌습니다?”
세주는 다시 평온함을 찾았다.
현상재생은 자주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한차례하고 나면 시간이 필요했다.
싸우고 당하면 이길 방법을 고민한다.
그다음에는 기필코 이겨내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어느새 훈련소 생활이 8주 차에 들었을 때였다.
“2소대, 3소대 단체 진지 훈련하겠습니다.”
박민우가 말했다.
“상대 진지를 먼저 점령한 쪽이 이깁니다.”
전우조 셋이 묶이면 분대였다.
분대 다섯이 묶이면 소대, 총인원 60명이 됐다.
그리고 그 소대 넷이 모이면 240명으로 한 중대로 편성됐다.
그 사이 빈자리를 채워 재편성된 결과였다.
그러니까 방금 박민우는 60명대 60명의 싸움을 저렇게 단순하게 설명한 거다.
“저 자식은 왜 저렇게 성의가 없는지 모르겠네.”
치용이 투덜댔다.
그사이 더 우락부락해진 그의 체구는 가까이 서면 세주가 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무식하게 근육만 크면 뭐해? 효율이 높아야지. 형 몸은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최적화 유지하니까.
‘아, 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유진이 물었다.
그는 5분대의 분대장, 3개 전우조가 모일 때, 그가 지휘권을 가졌다.
세주는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8주 차, 그 사이 양대로란 놈은 사사건건 시비였다.
참 거슬리는 놈이었다.
“숲이 울창하네. 풀도 키가 커졌고.”
짧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세주가 주변을 보며 중얼거렸다.
“맨손 진지 점령이야. 진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대의 분대장이 리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공격조와 수비조를 나누자.”
손발이 착착 맞는구나.
그동안 훈련을 똥꼬로 받지는 않았나 보다.
“5분대장.”
다른 분대장이 유진을 불렀다.
“유진아.”
세주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네?”
“우리 넷은 별동대로 빠진다. 나머지 전우조는 저쪽에 합류하라고 해.”
“…네? 같이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유진이 말했다.
“아냐, 풀도 키가 커졌고, 여긴 산이라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잘 보이지도 않잖아.”
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거다.
“아하. 이번 기회에 하겠다?”
인준이 먼저 눈치챘다.
머리카락을 잃고 힘을 얻은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음.”
옆에서 치용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줌 싸는구나.
저 미친 부작용 중 하나인 요실금은 방법이 없었다.
그는 최첨단 간이 화장실인 성인 기저귀를 찼다.
볼 때마다 안쓰러워 죽겠다.
“뭔 소립니까?”
“치용아. 너 저 새끼 조져버리고 싶지?”
세주가 슬쩍 한쪽을 가리킨다.
현무암 분대장이 마침 그들을 보고 비웃고 있었다.
엄지를 목에 대고 쭉 긋는다.
“말이라고 합니까?”
“가자. 조지러.”
“네?”
“그냥 얌전히 따라오면 저 자식이랑 1:1로 붙게 해줄 게.”
설명으로 이 자식을 이해시키느니 개를 서당에 보내서 풍월을 외게 하겠다.
“대로, 칠 생각입니까?”
유진이 물었다.
“유진아, 복수의 시간이다.”
세주가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그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악마 소위와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양대로는 꽤 사는 집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대기업 하청을 받는 기업을 운영했고, 탄탄대로였다.
그 덕에 군대는 당연히 면제될 줄 알았다.
추첨제라니, 말이 추첨제지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건 맞았다.
하지만 돈이 많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있어야 했다.
“일단 가 있어. 네 아버지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지?”
지독히도 자신과 닮은 얼굴, 아버지의 말이었다.
울먹이며 훈련소로 들어갔다.
침울한 건 잠시였다.
훈련소는 살벌했지만, 어떻게 보자면 학교랑 별다른 건 없었다.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들을 잔뜩 모아 둔 곳.
우연히 정유진을 본 순간부터 그는 마음이 편해졌다.
‘저 병신과 내가 동급이라고? 웃기고 있네.’
자신은 몇 달만 있으면 아버지가 군에서 빼내 줄 거다.
적당히 지내다 나가면 된다.
그는 남들 하는 만큼만 했다.
운 좋게 D의 부작용도 없었다.
외계인 따위 알 게 뭐냐?
자신은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진지훈련은 시발.”
날씨가 풀린다지만 산 위는 아직도 한 겨울이다.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라니.
지랄 맞은 일이다.
진지 수비를 맞은 그다.
건성건성 주변을 경계하다가 익숙한 얼굴을 봤다.
‘정유진?’
남는 시간에 저놈이나 괴롭히면 되겠다.
이 넓은 산에 조교의 눈을 피할 곳은 많았다.
“어?”
유진도 자신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한다.
멍청한 놈. 머저리 새끼.
저놈한테 뺏긴 여자가 한 둘이 아니다.
돈 많고 남자다운 자신이 아니라 저런 계집애 같은 남자를 고르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덕분에 고등학교 내내 놈에게 지옥을 보여줬다.
“넌 죽었다.”
그대로 유진을 향해 달렸다.
“어디가?”
진지 수비 병력으로 남은 이 중 하나가 말했다.
대로가 뒤를 돌아봤다.
“그 새끼다. 남창.”
“뭐라고?”
“그 새끼가 진지 정찰 온 것 같다고, 잡자.”
적군을 잡고 포획하면 가산점이다.
훈련소 가산점은 후일 연봉에 영향을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진지 수비 병력 20명 중 7명이 움직였다.
대로가 앞장섰다.
‘이 새끼가.’
생각보다 빠르다.
산을 타 넘는 모습이 다람쥐같이 날쌨다.
놓치겠다 싶으면, 지친 모습으로 발을 끌며 나무를 붙잡고 간신히 산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놓칠 것 같으면 보이고, 잡을 것 같으면 달아난다.
“개새끼, 잡히면 죽었다.”
이를 갈며 쫓았다. 뒤따라오는 여섯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맨 마지막에 달리던 훈련병 중 하나가 앞으로 넘어졌다.
나무뿌리에 발이라도 걸렸나 보다.
하지만 그 훈련병은 넘어진 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다시 유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보다 높은 지대에서 눈을 내리깔고 그들을 보다 팩 돌아서 뛴다.
“…개새끼가.”
놀린 것도 뭣도 아니었지만, 보는 순간 과거가 떠올라 자동으로 스팀이 올라온다.
양대로의 발이 빨라졌다.
덩달아 뒤에서 쫓는 이들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넘어진 2소대 훈련병이 잊히는 건 금방이었다.
누구도 한 명이 빠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둘.
넷이 남았을 때였다.
“잠깐!”
얼굴이 위아래로 긴, 맨 처음 양대로를 따라온 훈련병이 외쳤다.
“시발, 당했다.”
한순간 뒤를 보고 그가 말했다.
훈련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니다.
이질감을 눈치챈 그가 사방을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그만 쫓아!”
그가 외치고 손짓했다.
셋이 다가와 등을 맞대 사방을 경계한다.
앞으로 나가던 양대로가 한발 늦게 뒤로 돌아왔다.
그때 그가 쫓던 방향에서 유진이 나왔다.
한적한 산속이다.
얼마나 달렸는지, 이미 진지와는 거리가 꽤 멀어졌다.
“후, 오랜만이지.”
같은 훈련소라 해도 소대가 달라서 마주칠 일이 적었다.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고.
나온 유진을 보고 양대로의 걸음이 멈추고 그를 노려본다.
“이 개새끼가.”
“입이 걸다. 새끼야.”
대답은 유진이 아니라 반대쪽이었다.
투박한 얼굴에 팔뚝이 여자 허리만큼 두꺼운 남자였다.
훈련복이 터질 것 같은 체구다.
“빨리하고 가자. 시간.”
그리고 손목시계를 두드리는 대머리가 같은 방향에서 나오고.
“많이도 데려오네.”
탁.
그리고 나무 위에서 사람 하나가 떨어진다.
검은 머리칼에 유진보다는 못 하지만 꽤 봐줄 만한 얼굴의 훈련병이다.
“너 그때 그 PX!”
양대로가 외쳤다.
“기억력 합격, 판단력 불합격.”
“뭐?”
“유진 얼굴만 보고 쫄래쫄래 쫓아 와? 에라 새끼야.”
세주가 그를 보고 혀를 찼다.
대로를 따라온 놈들이 눈을 빛냈다.
숫자가 딱 맞았다. 4:4.
나무에 등을 기댄 놈 중 하나가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더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다.
대로가 그 신호를 알아듣고 말했다.
“처리하고 복귀하자.”
2소대에서 에이스라고 불리는 이가 두 명이나 있었다.
2소대 훈련병 모두는 자신 있었다.
*
당하던 놈들이 순간 기세를 바꾼다.
그걸 보고서도 세주는 유진만 보며 입을 열었다.
“유진.”
“네.”
“저 현무암은 네가 맡아.”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용이 그걸 보고 눈을 부라렸다.
“지면 죽는 거야. 앙?”
그게 응원이냐?
세주는 코웃음을 쳤다.
“너희 뭔데 여유가 넘치냐?”
그때 한 놈이 말을 걸고.
다른 놈이 훅하고 달려와 세주를 향해 몸을 숙이고 달려든다.
깔끔한 태클이다.
거기에 주의를 끌고 공격은 다른 쪽에서 훌륭한 전술이다.
문제는 하필 세주를 노렸다는 거다.
현상 재생에서 레이퍼가 달려드는 것에 비교하지니,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오른발을 뒤로 빼며 손날로 목덜미를 끊어친다.
떡!
절구 찧는 소리와 함께 훈련병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무너진다.
“꿱!”
쿵.
“…너무 세게 쳤나?”
세주가 머리를 긁었다.
“어흥!”
순간, 치용이 그들 사이를 덮쳤다.
처음 반항하는 놈의 팔을 잡고 꺾고, 상대 옆구리를 후려친다.
빡! 우직!
“억!”
갈비뼈 나갔겠다.
맞은 놈의 눈이 흰자위를 보이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나머지 하나가 내달렸다.
인준이 그 앞을 막았다.
“도망은 안 돼.”
치용이 급하게 기절한 놈을 던지고 달렸다.
“다 내 거야!”
이런 욕심쟁이.
인준은 그 말을 듣고 뒤로 물러났고, 뒤에서 달려드는 치용의 모습에 2소대 훈련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으….”
비명을 지르려던 놈의 목을 잡고 쥔 치용이 그대로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그러다 죽이겠다.”
“적당히 했습니다.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쓰러진 이의 목에 손가락 모양의 멍 자국이 보인다.
적당히라니. 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남은 건 하나.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풀었다.
“다, 다구리냐?”
그동안 다수가 소수를 괴롭히는 데 익숙했을 텐데.
겁먹은 놈을 보자니.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
“어, 다구리 할 거야. 혹시나 네가 유진을 이기거나 다치게 하면 추호의 인정사정없이.”
말은 세주가 했는데 놈의 눈은 치용을 본다.
누가 봐도 고양이 앞의 쥐요, 훈장님의 꿀을 훔쳐 먹은 서당의 학생이다.
“잘근잘근 씹어 먹어 주마.”
말하고 웃는 치용을 보니 정말 먹을까 봐 무섭다.
“형님들.”
겁먹은 현무암이 아니었다.
유진이 대로와 그들 사이를 막았다.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지면 그냥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진중한 표정.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난 상관없어.”
겉만 시크한 남자 인준이다.
치용은 절대로 싫은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그러다 결국 세주를 보고 선택권을 넘겼다.
“형님 뜻대로 하십쇼.”
야, 그렇게 싫은 표정으로 그러냐?
세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단다. 현무암아. 네가 ‘이기면’ 보내 주마.”
“약속 어기지 마라.”
저놈은 살면서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속이고 놀려 먹었을까?
그걸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서 삼일 밤낮을 패고 싶지만.
“유진의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세주는 자신의 한 말에 책임을 지는 남자다.
“좋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손을 들고 힘차게 휘두른다.
촤악하고 흙이 유진의 얼굴로 날아갔다.
저 치사한 새끼. 언제 손에 흙을 쥐고 있었데.
현무암의 의도와 달리.
“변한 게 없구나.”
유진은 유유히 흙이 날아올 때 양팔로 막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애초에 유진이 질 것 같으면 저런 내기 받아주지도 않았다.
“조져.”
세주는 그가 질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리 비리가 이길 확률 86%
프로비던스가 막 유진의 승률을 점쳐 줬다.
‘아니, 100% 다.’
세주가 그 말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