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분명 치정이다
“넌 몇 살이야?”
“스물여섯요.”
“요자 빼.”
나이는 치용이 묻고 마지막 말은 인준이 했다.
“아, 네. 통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와.”
인준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유진은 제자리를 지켰다.
어쨌거나 그도 D를 먹은 훈련병이었다.
“제가 어리니까 다 형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치용 형님.”
“…싹수가 된 놈이네.”
“인준 형님도 화 푸세요. 사람 십인십색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죠.”
…잘 말리네.
마지막에 배시시 웃으니, 차마 저 얼굴에 침 뱉을 사람은 흔치 않을 것 같다.
시비시비 열매와 용기용기 열매의 주인이 패기를 거뒀다.
이런 서글서글한 자식을 괴롭히는 그놈은 대체 뭐냐?
“분대장.”
“네?”
“그 2소대 3분대장 놈은 뭔데?”
유진이 다시 씁쓸한 얼굴로 돌아왔다.
조울증 있니?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동창? 이런 데서 만나면 더 반가운 거 아니냐?
“사이가 안 좋아?”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는데, 쉽게 말하면 제가 셔틀이었습니다.”
요가 아닌 다로 끝내는 말투가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근데?”
세주가 마저 물었다.
“졸업하고 못 봤는데, 여기서 만난 겁니다.”
“그래서 다시 괴롭힌다고?”
“절 많이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다.
걸어가다 지나가는 여자가 한 번쯤은 쳐다볼 것 같은 외모의 정유진과.
지나가는 여자가 지나가다 뺨을 때리기도 싫어 침을 뱉고 지나갈 것 같은 외모의 현무암 분대장이다.
분명 치정이다.
“여자 문제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주의 물음에 유진이 놀란 눈을 했다.
안 봐도 MP4 1080P 재생이다.
“이상하게 대로가 좋아하는 애들이 다 저한테 고백해서….”
에효. 말을 말자.
“됐어. 일단 훈련에 집중해. 트레이닝도.”
기회는 있을 거다.
교묘하게 괴롭혀?
미안하지만, 그런 짓은 세주가 훨씬 잘했다.
상사 몰래 엿 먹이기 대회가 있다면 세주는 자신이 능히 세계 챔피언이라고 평소 생각해 왔으니까!
*
새벽 구보, 오전 교육, 오후 전술, 그 외 자유 시간 트레이닝.
하루도 빠지지 않는 타이트한 일상이었다.
하물며 여긴 주말도 없었다.
그 외출권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또 뭐 안 걸려나?”
“이제는 그런 거 없을걸. 애초에 세주 네가 그거 통과했을 때 박민우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랬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외출권에 들떴을 뿐이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더라.”
이 관찰력 좋은 새끼를 봤나.
인준과 둘이 말을 나누니 금세 목적지가 보였다.
“그런데 우리 월급 너무 짜다.”
세주가 말했다.
“자대 배치 전에는 이렇다고 그랬어. 그렇다고 파업을 할 수도 없잖아?”
그랬다가는 협상으로 총알이 날아오겠지.
훈련병 월급 80만 원.
세금을 안 떼서 다행일까?
연봉 960만 원이었다.
“하긴 예전 군 생활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거긴 하지.”
딸랑.
문을 밀자, 위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우리 둘이 향한 곳은 POST EXCHANGE.
PX라 쓰고 신세계라 읽는 곳이며.
세주에게는 필수적인 장소다.
‘여기서 잘 먹으면 9년이 8년이 될 수도 있으니까.’
-농담이라고 하는 거 아니지?
‘나 진심인데.’
-형, 그 좋은 머리 진짜 안 쓸 거야?
‘농담이야. 브로.’
프로비던스가 삐지기 전에 수습해주고 과자와 냉동 음식을 사들였다.
“월급 안 남겠다.”
“괜찮아. 치용이가 자기 카드 주더라고.”
국군 장병 카드에 당당히 김치용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의외로 치용은 밥 이외의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술, 담배도 안 한단다.
요새 조직 폭력배는 몸 관리를 이렇게 살벌하게 하나 싶다.
부스럭.
“오호, 반갑네.”
감자 칩 중 오리지널과 어니언을 고민하는 중에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무암?’
유진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일진 놀이를 군대에서까지 하는 쓰레기의 얼굴이 보였다.
그 뒤에 서넛이 함께 다니는 걸 보니 참, 이 자식의 고등학교 생활이 빤히 보였다.
“난 안 반가운데.”
“동기끼리 너무 까칠한 거 아냐? 아, 혹시 정유진 때문에 그러는 거냐?”
긁적. 머리를 긁으며 주변을 살폈다.
PX는 꽤 컸다.
작은 마트 정도다.
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가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 말은 여기서 이 자식을 쥐어박아도 된다는 소리기도 하다.
문제는 이길 수 있느냐지.
이 자식의 이름은 양대로.
2소대에서는 꽤 입김도 있는 훈련병이다.
-형이 이길 확률 88%.
프로비던스가 용기를 북돋아 줬다.
하지만 몇 대 때린다고 이 자식이 정신을 차릴까?
아니면 원한의 칼을 갈까?
후자에 내 도박의 유일한 판돈, 왼 손목을 걸 수 있었다.
‘어설프게는 안 돼.’
“응. 맞아. 그러니까 말 걸지 마라.”
무시하고 가려고 했다.
굳이 여기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었다.
“아니, 그 남창 새끼가 뭐가 예뻐서 그러는 거냐? 혹시 너 취향이 그쪽이냐? 앙? 하하하.”
뒤쪽에서 다 같이 즐겁게도 웃는다.
하하하하하.
그래. 그냥 뒤지게 패자.
손을 들고 적절한 구타를 선물하려던 찰나였다.
“부모님이 많이 슬퍼하셨겠다.”
놈들 뒤쪽, 인준이었다.
“뭐?”
“생긴 것도 외계인이 친구 하게 생겼는데, 성격도 방사성폐기물 같으니. 쯧쯧.”
혀를 차는 액션이 아주 적절했다. 슬그머니 들려던 손을 내렸다.
“…너 뭐라고 했냐?”
현무암 분대장이 몸을 돌렸다.
“청각에 문제가 있으면 의병 제대를 신청해 봐라. 외계인의 영원한 친구야.”
시비시비 열매가 이렇게 대단합니다.
“넌 뒤졌다.”
까득. 놈이 이를 간다.
“앗, 조교님!”
그 타이밍에 세주가 외쳤다.
그러자 상대 무리가 흠칫 놀라며 몸이 굳는 게 보인다.
쫄았네.
현무암 분대장이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뻥인데.”
“풉.”
인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후, 이 개자식들이.”
“거기 무슨 일이야?”
PX가 큰 만큼 관리하는 병사가 둘이 더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쪽을 주시했다.
세주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준을 끌고 나와 버렸다.
“후.”
나오자 인준이 머리를 쓰다듬어 올렸다.
그런데 걸리는 머리카락이 없자 손을 축 내린다.
이제는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그다.
괜찮아. 넌 삼손이 아니잖아.
머리카락이 없어져도 그 말발은 그대로일 거야.
“참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네.”
인준이 중얼거리고 내무실로 돌아갔다.
세주도 물론 함께 돌아갔다.
유진과 치용이 팔씨름을 하는 게 보였다.
턱.
금세 치용이 유진의 팔을 넘긴다.
“다시.”
일명 정유진 단련하기 중이다.
치용이 일대일로 데리고 다니는 덕에 2소대 놈들이 건들지 않았지만.
정작 저것도 고생으로 보인다.
‘브로. 테크룸으로.’
인준이 트레이닝룸으로 가고, 치용도 유진을 데리고 나갔다.
조용한 내무실에 누워 혼자서 유유히 눈을 감는다.
부웅.
단숨에 주변 풍광이 변하고.
“브로, 에너지 얼마나 있어?”
-그동안 모드 발동 전혀 안 했으니까. 80 있어.
“좋아.”
앞으로 열어야 할 많은 기능에 비하면 현저하게 적은 에너지지만.
테크룸에서 몇 가지 기능을 승인하고 돌아왔다.
좋아진 머리와 발달하는 육체.
하루하루가 달랐다.
매일 힘이 넘쳤다.
그럼 지금 필요한 건?
조악한 양의 에너지로 그는 프로비던스를 달달 볶아서 몇 가지 기능을 풀 수 있었다.
일단.
“온. 프로비던스.”
우웅.
3D 프린터에서 작품이 탄생하듯 지지지직 거리며 허공에 그림이 그려진다.
세주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푸른빛 렌즈를 지닌 소형 부유 로봇이었다.
그리고 세주의 오른쪽 어깨에 안착했다.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는 형태다.
-모습 구현, 에너지 소모 45. 유지 에너지 코스트 상승.
이렇게 하면 유지 에너지가 5가 된다.
“다음.”
-에너지 20 소모 투명화.
반투명한 모습으로 프로비던스가 변한다.
이제 마지막이다.
-현상재생 1회에 에너지 소모 15. 하겠어?
“물론.”
세주는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했다.
힘, 하루하루 기르는 것으로 현재는 충분했다.
두뇌, 본인도 본인의 두뇌 회전에 놀랄 지역이다.
지금 없는 것은 하나다.
경험이다.
살면서 싸워 본 경험도 적고, 목숨을 걸고 싸워 본 경험은 없다.
정작 적을 마주쳤을 때 얼어버리면 가진 능력이 뭐가 소용 있겠는가.
-현상재생 완료, 레이퍼.
가상의 적이 세주의 눈에 나타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절로 다리가 후들거린다.
쓸데없이 리얼리티가 뛰어났다.
*
만일 게임을 현실에 적용한다면?
헬 난이도로 유명한 다크소울 게임을 엔딩까지 본 세주는 리스타트야 말로 최고의 치트라고 말할 수 있었다.
푹.
레이퍼의 앞다리에 배를 뚫려도 따끔할 뿐 아프지 않았다.
-실패.
현상재생 유지시간은 10분.
길진 않지만, 레이퍼와의 격전에서 적어도 두 손가락 단위로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끝.
재상된 레이퍼가 사라지고.
죽기만을 반복한 그에게 프로비던스가 끝을 고했다.
‘아깝다.’
마지막 총질에 놈의 약점이 보였었다.
-아깝긴, 한 번도 못 죽여놓고는.
‘걱정 마라. 다음엔 잡는다.’
세주의 일상에 하나가 더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현상 재생.
지금 10분 동안 세주는 죽었다.
배를 뚫려 죽고, 머리가 터져 죽었다.
사지가 뜯겼고, 항문으로 놈의 혀가 뚫고 들어왔다.
죽을 수 있는 루트를 파악한 거다.
‘좋아.’
에너지 문제로 매일 할 순 없다.
그러므로 최대한 효율적인 방식을 고수해야 했다.
밥을 다른 훈련병에 두 배로 먹어도 매일 할 순 없는 수치였다.
*
“아따 형님. 위장에 구멍 났소?”
친근함의 표현을 말투로 하는 치용이었다.
“내가 좀 대식가야.”
“피엑스도 겁나게 가신다면서 뭐 그렇게 잘 먹습니까?”
“안 그래도 미안하다. 다 썼다.”
치용의 카드를 돌려줬다.
“쓸 데도 없으니, 상관은 없는데.”
세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도 다 썼다.
월급 160만 원 가지고는 택도 없다.
매일 PX에서 20만 원 상당의 음식을 먹는다.
8일이면 160만 원이 동이 났다.
식료품을 먹는 게 감당이 안 된다.
‘취사병이랑 친해져야 하나?’
세주에게 에너지란 목숨과 동의어였다.
이미 프로비던스도 어깨에 떡하니 올려서 구동하고 있으니.
구동 에너지가 없으면 생명 유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말은.
‘먹는 걸 멈추면 죽는다는 소리지.’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현상 유지가 최선이었다.
교육과 훈련은 계속해서 병행됐다.
하루, 이틀 긴장하던 훈련병들도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다.
“누구는 머리가 빠지고, 누구는 요실금인데, 인생 참 불공평하다.”
D를 먹은 훈련병 중, 가끔 부작용이 없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유진도 부작용이 있었다.
피부가 점점 맑아지더니, 우윳빛이 났다.
‘부작용은 부작용인데, 요즘 시대에 저런 건 돈을 주고서라도 하고 싶은 성형이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인준이 말했다.
“그 대머리는 날 지칭하는 말이냐?”
인준은 머리를 삭발했다.
더 이상 빠지는 머리를 보는 건 죽어가는 자식을 보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아냐.”
그의 멘탈 유지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나저나, 형님 요새 잠을 못 잡니까?”
치용이 불쑥 물었다.
“왜?”
“거울 한 번 보십쇼.”
세주가 거울을 보자, 퀭한 눈을 가진 남자가 보인다.
내일이라도 한강에 가서 뛰어내릴 것 같은 안색이었다.
“열심히 훈련해서 그렇지 뭐.”
세주는 대강 얼버무렸다.
현상 재생한 레이퍼라는 괴물과 1:1로 싸우는 중이다.
죽이기도 하지만 죽기도 한다.
아직은 죽이기보다는 죽는 횟수가 많았다.
가상이라지만 죽음을 경험한다는 건, 엿 같은 일이었고 뇌가 마모되는 것 같았다.
-역시 형은 정신력이 문제야.
툭하면 버진 고스트를 부르는 놈 덕에 그 정신력이란 것도 요새는 단련되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건, 절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차차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었다.
처음, 레이퍼를 죽인 건 원거리에서 소총을 쏘는 과정에서였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에임 모드는 꿈도 못 꿨다.
다음은 근거리에서 소총으로, 다음은 권총으로.
결국, 군용대검 한 자루를 들고 1:1로 놈을 죽일 때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