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병사 반세주-10화 (10/206)

#  10

10. 선택의 여지는 여전히 없다

‘응?’

‘인류를 구할 영웅에게 이 정도 어드밴티지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멋진 친구 같으니라고.

너 내 동생 해라.

“좋아.”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찜질복을 입은 채, 남자의 로망이 집결된 곳을 노려봤다.

벽이라도 뚫을 기세다.

-딱, 한 번뿐이야. 약속해.

“내 왼 손목과 전 재산을 걸겠다.”

-그럼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모든 재산을 가압류하고 왼 손목을 강제 절단하도록 하겠다. 마스터.

아니, 꼭 이럴 때만 기계음으로 심각하게 말하네.

“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세주는 어서 시작하라고 말했다.

-프로비던스, 파인딩 모드 강제 개방. 일시적으로 투시 모드를 개방한다.

지이이잉.

갑자기 뇌가 타는 듯했다.

열이 훅 올라왔다.

얼굴이 붉어지고,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의 벽이 허물어지듯 사라진다.

스르르르.

그 뒤로 옷장이 보이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악!”

그리고 세주는 갑자기 눈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빌어먹을.”

제길이었다.

-왜 그래?

“왜 할머니들밖에 없냐?”

세주가 억울함을 담아 말했다.

-보통 평일 낮에 모이는 연령대는 50대 이후로 이 지역에 젊은 연령층의 분포도가 낮으므로 확률적으로….

“듣고 싶지 않아.”

세주는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무릎을 안고 앉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세주가 불가마 방을 찾아서 들어갔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까 투시했던 할머니 한 분이 안에 계셨다.

눈이 마주치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브로야, 그래서 인류 멸망을 막으면 좋은 게 뭐냐?’

-산다는 것.

‘난 그럴 생각이 없다니까.’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뭐,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 기생 로봇의 말을 반쯤은 믿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러니까, 나름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어차피 인류를 위해서 총을 들어야 할 위치에 있으니까.

그 사이 그의 눈앞에 다시 홀로그램이 펼쳐진다.

‘아.’

세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건 기억이었다.

“엄마!”

어린 세주가 뛴다. 그 뒤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돗자리에 앉아 지켜본다.

인형같이 생긴 여동생이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

더없이 행복한 일상의 한순간이다.

특별한 날도 아니었으면, 특별한 순간도 아니었다.

그냥 날이 좋아서 돗자리 하나 들고 주변 공원에 나왔을 뿐인 그런 날.

행복이란 글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표현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버섯 포자 같은 것들이 내려왔다.

그건 첫눈이 내리는 것만큼이나 갑작스러웠고 특별해 보였다.

송이송이, 포자들이 지상에 내려앉는다.

바닥에 내려앉은 포자가 땅에서부터 자라난다.

뿌드드득.

팔이 나오고, 대가리를 들이민다.

녹색의 침을 흘리는 기괴한 모습의 괴물.

악마 소위가 알까기라고 불렀던 놈들이었다.

아아!

세주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건 그냥 홀로그램일 뿐이다.

하지만 리얼리티라는 점에서 지금 이 장면은 100점 만점이었다.

놈들이 인간을 살육한다.

그들은 침략자였다.

‘살육’하고, ‘사육’한다.

목줄이 걸린 채, 철창에 묶인 여동생이 보였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지만, 아직도 숨을 쉬는 부모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사랑, 마지막 연인, 친구, 친척, 지인.

세주가 알았던 모든 사람이 죽임당하고, 고문당한다.

세주는 말을 잃었다.

손끝이 떨려 왔다.

-잊지 마. 인류의 멸망은 그 종의 끝을 의미해. 그 말은 형의 가족과 아는 모든 이들이 죽는다는 걸 말하는 거고.

홀로그램이 끝나며 프로비던스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

언제 흘렀을까? 눈물이 흘렀다.

눈가에 묻은 액체를 닦으며 세주가 물었다.

후.

일단 숨을 고른다.

세주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프로비던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일단은 초인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해.

다시 눈앞에 홀로그램 글자가 뜬다.

8일 남은 초인 프로젝트 LV0가 보였다.

‘초인 프로젝트가 뭐야?’

-인간을 뛰어넘는 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 내가 가진 기술 중 가장 선행해서 형의 몸에 시행해야 할 프로그램이지.

‘날 개조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브로.’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건데, 인벤토리에 있는 외계인의 피를 먹고 개조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정적일걸?

‘그거 안 버렸어?’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야. 외계인의 피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효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연구가 필요해서 보관했지.

‘너 어째 선조치 후보고가 일상이다.’

-신경 쓰지 마.

아니, 내가 신경이 쓰여.

인벤토리는 또 뭐야? 알아야 할 것도, 숙지해야 할 것도 산더미였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마음먹고 숨을 골랐다.

“후.”

후끈한 열기에 땀이 줄줄 흘렀다.

-우리는 이미 많이 늦었어. 전부터 말했잖아. 늦었다고.

세주는 그 늦었다는 말이 정확히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추천해. 초인 프로젝트 LV0를 오버클럭으로 끝내기를.

말과 함께 모바일 게임 이벤트처럼 월 500쯤 버는 웹 디자이너의 솜씨로 꾸민 누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 이미지가 떠오른다.

‘되게 불길한 말로 들리는데?’

-오후 8시까지 복귀하면 되니, 지금부터 시작한다면 회복까지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겠다.

‘LV0가 되면 뭐가 변하는데?’

-마스터의 가진 능력에 비례해서 하나의 모드를 개방하지.

‘모드?’

-개방되면 알아. 할까?

불길하다. 불길해.

세주는 하지만 초인이란 단어도 모드란 단어도 궁금했다.

노폐물이 사라진 몸만 해도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초인이라.’

남자는 못 먹어도 고다.

“하자.”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할 때는 하라고.

세주의 말에 프로비던스가 주의사항을 말했다.

-지금부터 바로 눕는다. 시뮬레이션 모드 실행으로 실패하면 목숨에 위협이 있다.

‘응?’

-이미 시작한 모드는 멈출 수 없으므로 건투를 빌어. 형. 이게 마지막이 아니길 기도할게.

‘야, 이 개 같은 새꺄!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잖아.

‘와, 이런 개 같은 로봇.’

동시에 세주는 정신을 잃었다.

편안히 잠이 든 것 같은 얼굴로 그대로 목침을 베고 누운 자세였다.

*

휘이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가랑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헐렁한 찜질복을 입은 세주는 몸을 일으켰다.

“와, 개자식.”

눈앞에 회색으로 칠한 벽이 보였다.

손을 대니 우툴두툴한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도 아니었다.

자신은 조금 전까지 분명 찜질방에서 곱게 누워있었다.

싸늘한 공기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덩그러니 놓인 회반죽으로 만든 건물을 제외하고는 건물은 없었다.

머리도 들어가지 않을 작은 창문을 통해 안을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주는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브로야.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의 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오늘의 상대는 라이]

[전부 격퇴 요망]

[살아남고자 하면 싸워라! - 인류의 희망이자 불세출의 오버테크놀로지, 프로비던스 적음]

“지랄이 풍년이구나.”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나니 주변이 보였다.

작은 테이블에 놓인 권총 한 정.

경찰들이 흔히 허리에 매고 다니는 38구경이다.

색이 바랜 옷장, 아니 열면 곰팡이가 박쥐 모양으로 기다리고 있게 생긴 옷장이다.

끼익거리는 나무 바닥.

동양보다는 서양식에 가까운 모양새다.

세주는 일단 38구경 권총을 챙겼다. 홀스터조차 없어서 안전장치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찜질방 바지에 대강 끼웠다.

‘총알은 여섯 발.’

허리 아래로 덜렁거리는 게 두 개로 늘어서 여간 신경 쓰였다.

“라이는 뭐냐.”

혹시라도 그 알까기같이 생긴 놈을 잡으라고 하는 거라면, 사양이었다.

그건 정말로 죽으라는 소리니까.

일단 몸 상태는 훌륭했다.

느껴지는 추위를 제외하고는 컨디션은 좋다.

그다음.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가진 무기는 권총 한 정이다.

불리하다. 상대가 무엇이 되었든.

그렇다면 현재 유리한 점은?

세주는 주변을 둘러보고 창밖을 살폈다.

그리고 문도 열어봤다.

주변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창 너머로 울퉁불퉁한 언덕이 보였다.

어떤 언덕은 깊게 파여서 그사이에 숨으면 쏙하고 숨을 수 있게 생겼다.

‘상대도 나를 모른다.’

안다면 지금 당장 죽이러 왔을 거다.

프로비던스는 재수 없고, 싸가지 없고, 예의 없고, 개 또라이 같은 미친 로봇이지만.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한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싸워라.

그게 세주에게 주는 가장 큰 힌트였다.

적은 자신을 찾는다. 그리고 세주는 그들을 격파해야 한다.

머릿속에 가상의 괴물이 자신을 찾는 모습을 그렸다.

특별한 탐색 능력이 없다면 적은 자신을 어떻게 찾을까?

‘눈으로 확인하겠지.’

시야에서 피하는 것.

그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기습.

가진 무기의 이점을 살려야 했다.

누구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발휘되는 그의 잔머리는 능히 그의 목숨을 구할 구명줄이었다.

*

위이이이이잉!

밝은 햇살이 천천히 서쪽으로 내려간다.

어떻게 만든 공간인지.

이 기술로 가상현실게임을 만들면 돈방석이 아니라 돈으로 종이접기를 해서 차도 만들 것이다.

위이이이잉!

기계음이 들려온다.

위이잉.

석양빛을 뒤로하고 덩그러니 놓인 집 앞에서 소리가 멎었다.

철컥.

곧 투박한 쇳덩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투다다다다다!

총성이 미친 듯이 울렸다.

퍼버버버버버버벅!

나무로 만든 조악한 문이 박살 나서 흩어진다.

부서진 나뭇조각 사이 톱밥 수준으로 갈린 나무 먼지가 일어난다.

또, 매캐한 냄새가 물씬 나는 회색 연기가 사방을 메운다.

그 사이로.

-생존자 파악 중.

치직 거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라디오 너머에서 들리는 것 같은 탁한 음성이었지만, 분명 인간의 음성이었다.

위이이이잉. 텅!

끼긱!

오래된 나무판자 바닥이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들어온 놈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외눈을 가지고 전신에서 치렁치렁한 줄을 늘어뜨린 놈이다.

아니, 줄이 아니었다.

파지직.

끝이 잘린 두터운 와이어 형태의 전선이다.

철로 만든 선의 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위이이잉!

붉은 외눈이 사방을 살폈다.

레이저 포인트 같은 빛이 옷장을 스치고 한 바퀴 돌고.

갑자기 놈의 총구가 재차 불꽃을 뿜었다.

투다다다다다!

옷장을 향해 집중된 포화가 떨어진다.

고작 옷장 하나 박살 내기에는 총탄이 아까운 수준이었다.

방 안에 다시 매캐한 화약 연기가 가득 찼다.

후두두두둑.

마지막 탄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몇 개가 구르며 깨진 나무판자 밑으로 들어갔다.

팅.

그 밑으로 떨어진 탄피가 바닥과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었다.

-생존자 없음.

붉은 외눈이 다시 사방을 훑는다.

보이는 건 없었다.

놈의 허리가 180도 돌아가고,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한 발을 들고 뒤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 순간.

탕!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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