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병사 반세주-9화 (9/206)

#  9

9. 형이 너랑은 다르게 욕구가 있는 사람이거든

처음 스타트를 끊는 걸 보고 다들 고개를 저었다.

스팀팩을 빤 이들보다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그들이 그동안 이 코스를 통과하기 위해 짠 전략은 두 가지였다.

평지에서 최대한 빨리 간다.

그리고 세 번째 코스와 네 번째 코스보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코스에서 시간을 줄인다.

물론 세주는 그런 말 따위는 듣지 못하고 전력 질주했다.

텅!

동시에 기름이 흐르는 드럼통을 밟고 점프했다.

“미친.”

이인준이 자기도 모르게 읊조렸다.

저런 시도를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드럼통은 미끄럽다.

밟고 뛰는 거야 가능하지만 착지가 문제다.

넘어지는 순간 단단한 쇳덩이에 머리나 찧지 않으면 다행이다.

저번에 저런 짓을 했던 훈련병은 재수 없게 드럼통 사이에 다리가 껴서 부러졌다.

곧 끔찍하거나 우스운 광경이 나올 거라고 예상한 이들이다.

“…헉.”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일병 조교도 드럼통 구간은 차분하게 하나씩 밟고 넘어갔다.

하지만 세주는 한 번에 서너 개씩 밟고 뛰어넘었다.

중간에 기우뚱하기도 했지만, 놀라울 정도의 균형감각을 보이며 달렸다.

멀리뛰기를 하는 것처럼 넘더니, 그대로 못 코스로 넘어간다.

코스를 달리는 이들은 전부 맨발이 기본이다.

군화도 없이 저 못 코스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곳곳에 있는 딱 발 사이즈 만큼의 작은 공간을 밟고 넘어가야 했다.

미로와 비슷했다.

첫발을 잘못 디디면 그다음 밟을 곳이 너무 멀어서 되돌아와서 다른 시작점에 서야 했다.

못 코스는 정해진 공략이 있었다.

매일 못의 위치를 바꾸지만.

드럼통을 통과하며 눈으로 못 코스를 훑고 최적의 코스를 찾아내는 것이 공략이었다.

하지만 세주는 드럼통 코스를 너무 빨리 통과해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핫!”

그 사이 세주가 다시 점프했다.

“위험….”

인준이 자기도 모르게 외치려다 입을 다문다.

팍!

중간에 놓인 발자국 크기의 공간을 밟고 다시 점프.

그다음 발자국을 밟고 점프.

그렇게 여덟, 아홉 번을 뛰는 것으로 통과다.

‘말이 돼?’

세 번째 코스가 코앞이었다.

낮게 깔린 철조망.

그건 답이 없었다.

밑으로 포복 자세로 기어가지 않으면 망하는 거다.

세주는 겉옷, 군복을 벗어 팔에 칭칭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밑으로 슬라이딩을 했다.

사람이 납작하게 엎드려서 간신히 통과할 높이다.

촤아악.

흙먼지가 일어났다.

낮은 철조망은 중간에 필히 사람의 몸이 닿는 부분이 있었다.

세주는 납작하게 엎드려서 접시라도 되는 듯 그 안을 파고들더니, 딱 그 부분에서 팔에 감은 옷을 들어 막았다.

부부북!

옷의 일부가 걸려서 찢겼지만, 아랑곳 않고 그는 철조망 코스를 통과했다.

그리고 외줄 타기.

“안 멈춘다고?”

감탄의 연속이다.

그는 그대로 달렸다.

그리고는 줄 위를 달렸다.

휘청거리는 로프에서 달리는 게 가능한가?

인준은 스스로 묻고 답했다.

‘불가능하지, 절대, 절대.’

하지만 반세주란 인간은 했다.

그대로 반대쪽 반환점까지 달리고 역순으로 코스를 그대로 밟아서 돌아온다.

삑!

타임워치 버튼을 누른 박민우가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한다.

모두가 숨을 죽여 그의 입을 바라봤다.

10분 이내는 확실하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7분 58초.”

“와.”

“허허허.”

“8분 이내라고?”

다들 놀라서 한마디씩 한다.

세주는 걸레 조각처럼 변한 상의를 털었다.

그리고 박민우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사비로 사야 합니까?”

찢어진 군복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

아직도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질주의 쾌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 장애물을 통과하고 기록을 경신했을 때,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물론, 그 결과물로 현재도 대만족이었다.

“시발, 사제 공기다.”

역시 공기는 사제다.

아니, 뭐든 사제가 최고다.

논산 인근, 시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읍내다.

군에서 허용된 외출 범위는 넓지 않았다.

성폭행범처럼 발에 전자발찌도 차야 했다.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무서운 사람들이 잡으러 온단다.

하지만, 이 모든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역시 사제가 최고야.”

세주는 나오자마자 길에서 파는 군 옥수수를 먹고 하릴없이 걸었다.

터미널이 보였고, 그 옆에 만화방과 PC방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노래방, 가요주점, 모텔, 다방.

‘프로야.’

-말해.

‘형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내가 뭘 먹으면 뭘 먹는지도 알아?’

-당연한 말을. 나는 마스터가 먹는 성분을 분석해, 해가 되는 부분을 배출하고 이로운 부분을 몸에 흡수시킨다.

‘아, 8일 동안 독소 배출하고 끝이 아니냐?’

-8일 동안 내가 한 건 독소 배출 시스템을 몸에 구현한 거다.

‘그래, 그렇구나.’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확히 말해. 마스터.

‘혹시나 해서 말이다. 형이 나이가 좀 있고, 남자고 해서 말인데.’

-그래서?

‘그니까 형은 너 같은 기계랑은 다르게 하트가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계속해.

‘인간은 식욕, 수면욕, 성욕이 가장 강하다고 하더라.’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거냐? 그런 거냐?

‘아니, 야. 형이 엉. 막 그게 막, 뭘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게 남자는 본래 주기적으로 그걸 풀어줘야 해.’

-마스터, 당신에게 날 준 사람을 증오한다.

‘야, 그걸로 뭘 증오까지 하고 그러냐?’

세주의 눈이 휴게텔에 머물렀을 때였다.

-이 상황에서 그딴 말이나 지껄이다니, 놀랍다. 우린 이미 늦었다. 마스터.

프로비던스가 말했고, 세주는 네네 그렇구나 하고 답했다.

‘외계인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 이거 아냐? 막으려고 노력 중이잖아. 아니, 근데 그 외계인은 언제 쳐들어온 데?’

-무슨 헛소리야? 침공을 왜 막아?

‘그럼 우리 뭐 하는 건데?’

-침공은 이미 끝났어. 군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 결과다.

‘야, 너 능력 있다. 언제 인터넷에 접속했데. 그럼 영화나 한 편 다운 받아주라. 눈이 영사기 대신 영화를 상영하면 딱 인데.’

-제발, 개소리 좀 참아줘.

‘이 자식이 형보고 개소리가 뭐냐? 하여간 그래서?’

-주변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내리는 결론은, 침공은 끝났고 우리가 할 일은 달라졌다는 것.

‘본래는 침공 막는 거 막네.’

-그래. 그게 1차 목표였지만, 우린 이미 늦었어.

‘그래. 그래.’

세주는 어떻게 하면 프로비던스를 재울까를 고민했다.

여기서 스캔 시스템을 켜면 이틀은 잠들 텐데.

-우리가 막아야 할 건, 다른 종류로 변했다. 침공이 아니라, 멸망이다.

‘왜 어디가 망한 데?’

-인류.

“뭐? 어디?”

세주가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답했다.

-우리가 할 일은 인류 멸망을 막는 거야. 마스터.

*

“우리가 혹시 노아의 방주라도 만들어야 하는 각?”

-지금 그 말투는 마스터의 나이와 행색에 어울리지 않아. 알지?

넓은 유리창이 보였다.

세주는 거기에 비춘 자신이 보였다.

독소를 제거했다고 하더니, 없던 머리카락도 자라고 피부도 뽀얗다.

‘절세미남이 여기 있구나.’

화장실 조명이 아니라 자연광에서 이 정도라면 능히 연예인을 능욕할 수준이 아닌가.

-쓰레기 같은 생각을 멈춰. 마스터. 내 중추신경에 해가 된다.

“내 모습이 어디가 어때서, 이십 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내가 만일 사람이었다면 지금 마스터의 얼굴에 내 주먹 크기를 재봤을 거다.

“무슨 헛소리야.”

-얼굴을 후려치기 전에 닥치고 현실로 돌아와.

“현실?”

길을 걷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군복 입은 남자다.

“미쳤나 봐.”

“가까이 가지 마. 영수야.”

“에고, 총각. 할미가 사탕 줄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가까이 다가온 용기 있는 할머니를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잘 먹을게요. 할머니. 헤헷.”

어울리지 않게 웃어주고, 깜찍한 표정을 짓고 그곳을 벗어났다.

자연스레 걸음이 빨라졌다.

-미친놈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를 3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일부러 그런 거야. 어차피 다들 그렇게 쳐다보잖아. 그 기대를 저버릴 순 없지.’

-잠시, 마스터의 정신과 병력을 검색하겠다.

‘그딴 거 없어. 미친 기생 로봇아.’

-누군가를 부를 때는 하나의 명사로 지칭하는 게 좋다. 프로, 기생 로봇, 유령 꼬마 중 내 닉네임을 정확히 해라.

‘개 같은 로봇 정도로 하자.’

바로 맞받아칠 거로 생각한 세주는 말 없는 프로비던스의 반응에 순간 당황했다.

‘상처받았나?’

끼야야약!

전혀 아니었다.

“억!”

세주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너 이거 하지 말라고 했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고 눈앞에 버진을 간직한 귀신이 다녀갔다.

-아, 그랬었나? 개 같은 로봇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다.

와, 이런 미친 보복성 짙은 로봇 같으니라고!

‘좋아. 느낌 있게 우리 브로라고 하자. 앞으로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내야 할 것 같으니까.’

-브로?

‘괜찮지? 브로?’

-좋다.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참자, 후.’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사람을 살린단다.

일단 세주가 살려야 할 건 사람이 아니라 인류였으니, ‘참을 인’ 자를 5억 번쯤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인류 멸망을 막으라는 말이 뭐야?’

-말 그대로다 마스터.

‘형제처럼, 그냥 형이라고 해.’

서른두 살 차이쯤이야 우습다. 본래 사회에서 만나면 다 형이다.

-알겠다. 형, 하여간 인류 멸망을 막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내가 왜?’

-내 주인이니까.

‘브로, 그러니까 굳이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

사람은 이기적이다.

세주는 그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굳이 인류를 위해 싸울 생각은 없었다.

-세상을 위한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올해로 서른셋이다. 세상을 구할 영웅 연봉이 30억에 주4일 5시 정시퇴근 되면 고민해 보마.’

-인류의 가치를 고작 돈으로 따지다니. 쓰레기.

‘야, 다 들려 새캬. 너 돈 없으면 얼마나 서러운지 모르지? 지금 당장 PC방도 게임방도, 휴게텔도 전부 돈이 없으면 발도 못 들여놓는다?’

-휴게텔은 빼지?

‘어쨌든.’

-좋아.

프로비던스는 잠시 말을 멈추다 홀로그램을 띄웠다.

-좋아하지?

에이, 이건 반칙이다.

홀로그램에는 박보영의 전신 샷이 나왔다.

구글링하면 쉬이 보일 것 같은 사진이다.

그걸 홀로그램으로 구현해서 눈앞에 보여주니, 참.

‘보기가 좋네.’

그 이후로 김사랑, 진경, 현아, 아이린 등등 아이돌과 배우가 쭉 홀로그램으로 펼쳐진다.

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짓이다.

후르릅.

흐르는 침을 닦고 세주가 물었다.

‘어쩌라고?’

-멸망하면 이 사람들도 없어지는 건데?

‘와, 개새끼.’

-뭐?

‘아니, 브로.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주는 계속 걸으며 프로비던스와 말을 나눴다.

어느새 터미널에서 꽤 걸었고, 눈앞에 찜질방이 보였다.

-치사하지 않아. 일단 저기 들어가서 땀 좀 빼자.

‘왜?’

-독소 제거 시스템을 활용하자면 땀을 빼는 게 좋고, 이곳은 그런 면에서 최고의 환경이야.

“목욕만?”

“아뇨, 찜질도 할게요.”

세주가 카드를 내밀었다.

‘생각해보니까, 훈련병이면서 외출이라니 어마어마한 짓을 했네.’

과거라면 상상도 못 할 짓이다.

안으로 들어가며 세주가 물었다.

‘브로, 혹시 투시는 안 되나?’

반대쪽 ‘여’라고 보인 입구가 보인다.

-꿈도 꾸지 마. 최소한의 양심과 법치를 지키라고 형. 아, 형이라고 부르기 부끄럽다.

‘누가 뭐래?’

-…하지만 한 번 정도라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