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 선택지 없는 선택지
“그만.”
김택동 소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들썩이던 세주가 그를 바라봤다.
그는 세주와 눈을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거, 웬만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웃는 게 좋을 것 같은 얼굴이시군요.’
이곳이 군대가 아니고, 수틀리면 저 사람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 없었다면.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미소다.
눈빛이 묘기 부리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다.
“돌로는 죽일 수 없다.”
세주를 외면하며 소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캬오오오!
뒤에서 괴성을 지르는 괴물이 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이 강철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그가 걸으며 철창 밖으로 향하자, 괴물이 발목부터 밑으로 끌려갔다.
쿵! 치지지지직!
“끼에엑!”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끌려가던 놈이 고함을 질렀다.
끼기기기기긱!
기중기라도 움직이는지 쇠 맞물리는 소리가 지하에서부터 들렸다.
쾅!괴물이 올라왔던 곳, 그 밑의 뜯긴 문 말고도 문이 있었나 보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놈의 괴성도 더 들리지 않았다.
“후우, 후우.”
옆에서 용 남자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세주 자신도 들썩이는 어깨를 진정시켜야 했다.
이들의 의도는 세주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고.
훈련병들에게 명확히 각인되었다.
“싸워라. 훈련해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탈영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 잡히면 죽는 거고 안 잡히면 평생 도망 다니고. 행복한 라이프겠다? 그치?”
말 한 번 참 재수 없게 했다.
저녁을 먹고 긴 하루가 끝나 내무반에 들어오자, 노곤함을 넘어서 몸이 축축 쳐졌다.
“어이.”
‘왜 내 옆자리가 너냐?’
용 남자였다.
“서른둘 김치용이다.”
또 시비를 거는 거라면, 정말 완곡하게 거절하고 싶었다.
힘들어 뒈지겠는데, 괜한 일로 체력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서른셋 반세주.”
세주는 드러누우며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머리에 구멍 나고 싶지 않으면 덤비지 않을 거란 계산도 깔려 있었다.
“거, 어제는 고마웠수다.”
세주는 그제야 이 남자가 안경 남자를 때리고 죽을 뻔했던 걸, 기억했다.
‘그게 어제라고?’
일주일은 지난 것 같다.
“됐어.”
“뭐,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형님.”
세주가 목만 꺾어서 고개를 들었다.
“뭐?”
“서른셋이라고 했으니, 형님 맞지 않습니까?”
여기가 군대라고 말을 해줘야 하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다가 조교가 알면 머리에 바람구멍이 생기진 않더라도 허벅지가 노랗게 될 때까지 로우킥을 맞을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씻기 위해서 다들 옷을 주섬주섬 벗고 있는데 용 남자의 허벅지가 빨갛고 노랗게 물든 게 보였다.
세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쉬자.’
“그래. 그래. 뜻대로 하소서.”
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쪽에서 말했다.
“여기가 무슨 양아치 집합손 줄 아나?”
“넌 닥쳐라.”
세주는 자신에게 이 자리를 배정한 조교에게 따지고 싶었다.
자신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냐고.
좌 용 남자, 우 안경 남자.
성격도 정반대, 살아온 환경도 정반대.
거기에 어지간해서는 져 줘야 할 것 같은 모습의 안경 남자가 용 남자를 보고 시비를 건다.
이 자식은 시비시비 열매를 처먹은 것 같았다.
용기용기 열매와 시비시비 열매의 싸움이다.
애니메이션이라도 보는 기분으로 보고 싶지만.
“둘 다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조교가 보면 ‘거기 두 분 싸우시면 안 됩니다.’ 하고 끝낼 것 같진 않잖아.”
“끙.”
의외로 김치용이라 밝힌 액면가 마흔둘, 호적상 나이 서른둘의 동생이 앓는 소리를 내고 안경 남자를 외면했다.
‘형님이라고 말만 그러는 게 아니라, 말도 잘 듣는 거였나?’
그렇다면 아주 감사할 노릇이다.
자기 분대에서 매일 사건 사고가 터지는 건 질색이다.
“치용아.”
“네. 형님.”
“씻고 잠이나 자자. 내일을 위하여.”
“네.”
군 동기 내무반 내에서 존댓말이라니.
정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김치용의 행동을 놔뒀다.
샤워장을 비롯해 내무반, 훈련소, 식당 등 모든 시설이 마치 새것 같았다.
최소한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건물로 보였다.
덕분에 깨끗하고 편리했지만.
‘내가 입대했을 때랑 너무 차이가 나는데?’
12년 전 훈련소의 모습 따위가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당시와 다르다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따뜻한 물에 몸의 근육이 풀어지는 기분 이었다.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자자.’
다른 건 다 해도 금연만은 무리였다.
열다섯에 배운 담배다. 그 이후부터 하루에 한 개피도 안 피운 적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훈련소에 금연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담배를 무료로 배급해준다고 했다.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계인이라는 특정 생물체와 싸운다는 공포.
그런 것을 극기만으로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내무반으로 돌아와 침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추위가 느껴질 법한, 가을.
세주는 정해진 구역에 가서 담배를 물었다.
뻐끔하고 한 모금 피우자, 먼저 피우던 이들이 슬슬 들어갔다.
담배를 태우고 양치를 할까 하다가 손만 씻고, 침상에 누웠다.
드르렁!
그새 잠든 사람도 있었고, 잠을 이루지 못해 침상에 걸터앉은 이도 있었다.
복도에 간간이 불침번을 서는 기간병이 보였지만, 점호 후에 따로 강제로 훈련병을 재우진 않았다.
세주도 편히 잠자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정말 긴 하루였다.
보기 흉한 괴물이 외계인이었고.
살아남기 위해선 훈련에 임해야 했다.
그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모든 건 강요되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역시 인생은 일지선다야.’
잠이 들 것 같지 않았지만, 세주는 짧은 상념 뒤에 바로 정신을 잃었다.
드르렁!
곧 그의 코에서 세찬 소리가 울렸다.
*
기상나팔에 눈을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모닝콜을 최신곡으로 바꿔줬으면 한다는 것과 오른쪽 어깨가 마치 떨어져 나간 것처럼 감각이 없다는 거였다.
“팔이 안 움직여.”
누군가 말했고, 그건 세주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눈치와 머리가 돌아가는 것과는 별개로 세주의 몸은 15년의 흡연과 약 10년의 음주로 망가질 만큼 망가져 있었다.
“훈련 시작이다! 튀어 나가!”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날의 돌팔매질로 삐걱거리는 어깨로 옷을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녕한가? 제군들.”
그 앞에는 어제 괴물과 소개팅을 주선해줬던 김택동 소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 가뿐한 아침 구보 시간이다. 오늘의 구보는 ‘엄마 찾는 새끼오리’다.”
모두가 엉거주춤하자, 조교가 가장 뒤에 나온 훈련병의 무릎을 걷어찼다.
“귀먹었습니까! 쪼그려 앉습니다! 실시!”
잠에서 깨지 않아 몽롱한 정신 속에서 당한 폭력은 효과적이었다.
몇 초 되지 않아, 오와 열 따위는 무시한 새끼 오리 천 마리가 연병장에 모였다.
“자, 출발!”
김택동이 그 앞에서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
딱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싶게 하는 것과.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건.
“멈추는 분 계십니까? 뒤에서 당신들 엉덩이 걷어차는 것도 지겹습니다. 지금부터 멈추면 대가리에 바람구멍 내드립니다. 뛰어!”
일주일 내내 한 일이라고는 뛰는 것과 스트레칭이 전부였다.
오리걸음으로 산을 타고, 물구나무를 서서 연병장을 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미친 짓거리를 저들은 태연하게 시켰다.
“왜? 힘들어? 탈영하라니까. 그러면 편히 간다. 그냥 죽여 달라고 하면 우리도 못 죽여. 딱 멋있게 담장 한 번 넘자. 그럼 내가 손수 멱 따줄 게.”
변태, 사이코, 씨발. 개 같은 악마 소위가 앞에서 말했다.
“아닙니다!”
모두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오, 그렇게 열 내지 말라고, 훈련하다가 고혈압 온다?”
‘끙.’
절로 사람을 지치고 고되게 만든다.
“좋아. 오늘 마지막이다! 이거 끝내면 내일 나랑 대련 기회 준다. 아, 나 비싼 몸인데.”
며칠 만에 사람이 사람을 향해 살의를 보이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니, 도발로 치자면 완전 극딜을 불러일으키는 초특급 도발러다.’
“내가 오늘 저놈 죽입니다.”
옆에서 김치용이 살벌하게 외쳤다.
역시 용기용기 열매를 처먹은 자식!
그래 파이팅이다!
세주는 말 할 힘도 없었다.
‘담배가 문젠가?’
15년 동안의 흡연이? 아니면 그동안 헬스장을 끊고 제대로 나간 적이 없어서?
꾸준한 운동은 사무실 책상에 박힌 몸이 된 그에게 무리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몸은 너무 엉망이었다.
“큭큭큭.”
언제 다가왔을까?
뾰족한 돌이 간간이 박힌 가파른 산길을 오리걸음으로 올라가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치가 아무리 빠르고, 머리 굴린다고 달라질 건 없지. 몸이 따라줘야 하는 거야.”
악마 새끼였다.
훈련병들은 이틀 만에 김택동에게 악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 그는 정말 그 두 글자에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럼 죽어라 뛰라고.”
모든 행군은 경쟁이었다.
이곳의 모든 건 점수가 도입되고 경쟁이 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주는 자신이 몸으로 하는 일에 이토록 재능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체력 F급.”
조교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헉헉헉.”
대답할 기운이 있으면 숨이라도 한 번 더 쉬겠다.
세주는 산 정상에 드러누웠다.
다리는 떨리는 걸 넘어서 근육이 찢어졌는지 미치도록 아팠다.
그는 자신의 몸이 망가졌다는 걸 알았다.
절벽이 즐비한 산길도 아니다.
위험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산길을 내려오는데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형님, 괜찮습니까?”
김치용이 옆에서 다가와 물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앞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는 까닥하고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몸 쓰는 것만은 A급이다.
하물며 그 안경 자식도 B급.
강아지상의 분대장도 B급이다.
사실상 병사의 그레이드는 C급 까지다.
그런데 F급이라는 건.
“폐급 병사 분발해야지?”
아, 시발 다른 건 모르겠고. 저 악마 소위 새끼가 시비나 그만 털었으면 좋겠다.
다년간의 직장생활로 이뤄진 포커페이스가 흔들린다.
“분발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폐급.”
소위가 앞으로 훌쩍 나아간다.
‘하.’
방금 대답으로 호흡이 더 딸렸다.
‘젠장.’
연병장까지 돌아오자, 벌써 오후 3시다.
오전 구보는 연병장을 돌고, 아침 식사 후에는 점심 전까지 하드 스트레칭.
농담이 아니었다.
스트레칭만 3시간을 했다.
유연성을 기르는 게 아니라, 힘줄이 끊어지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점심 식사 후, 데쓰 로드가 시작되었다.
악마의 길이자, 죽음의 길.
산행이다.
오리걸음으로 걷고, 한 발로 뛰면서 오른다.
토끼뜀으로 내려오며, 세 걸음에 열 개씩 팔 벌려 뛰기를 한다.
갖은 방식으로 인간의 육체를 한계에 봉착하게 한다.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저녁 식사 후, 내무실에 조교가 들어오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동의서입니다.”
그가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신체포기각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살벌한 문구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