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고 싶냐니.”
순간 시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것을 본 이한이 버럭 외쳤다.
“이상한 생각 금지! 그런 의도로 물은 거 아닙니다. 앞으로 이나와의 미래를 어떻게 보내고 싶냐고 물은 겁니다.”
“이나 씨와의 미래…….”
그제야 시현은 이상한 생각은 관두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긴 했다.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시현이 웃었다. 마치 이나가 옆에 있는 것처럼 행복하게.
“서로 사랑을 나누고, 보듬어 주고 또 지켜 주면서. 그렇게 이나 씨와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이한은 시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속내를 읽어 내려는 듯이.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그의 속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났으니까.
이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합격.”
“네?”
“합격이라고요, 당신.”
시현이 멍한 빛의 눈을 깜빡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가 이한 씨의 마음에 든 겁니까?”
“아, 그렇다니까요!”
이한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시현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일도 있었고 말이지.’
이한은 이나가 실종된 게이트 앞에서 시현이 그를 도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고마웠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한은 시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시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빛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앞으로…….”
이한은 머뭇거리다가 벌써 몇 번이나 내뱉는 건지 모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이나, 잘 부탁합니다.”
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쿵!
시현의 대답을 들은 이한이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시현은 깜짝 놀라며 이한의 옆으로 가 그의 몸을 흔들었다.
“유이한 씨? 유이한 씨!”
“쿠우…….”
이한의 입에서 잠에 빠진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현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난감해했다.
“이걸 어쩐다…….”
이한의 집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예전에 한번 이나를 찾으러 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거기까지 이한을 데리고 간다 쳐도 집 비밀번호를 몰라 들어가질 못한다는 점이었다.
시현은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나 씨, 잠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내가 못 살아.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포장마차 간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허공에 떠 있던 이한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툴툴거리는 말과 달리 목 밑까지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나가 현관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벽에 기댄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시현이 물었다.
“이한 씨는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그냥 술 먹고 뻗은 거예요. 내일 출근하는 사람이 무슨 술이야, 술은. 머리나 안 아프면 다행이겠네요.”
이나가 툴툴거리는 말에 시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오빠와는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된 거예요?”
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시현이 구박이라도 받았을까 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시현은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표정을 보아 하니.”
이나가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며 신난 어투로 말했다.
“잘 해결된 모양이네요.”
“네. 인정받았습니다. 이나 씨를 잘 부탁한다는 말도 들었고요.”
“오빠한테서요?”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현을 올려다보았다.
오빠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말 Best 5위 안에 드는 말인데.
이나가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시현이 재차 말했다.
“정말입니다.”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줬네요.”
이나가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시현 씨.”
시현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조금 부끄러운 듯도 했지만 그는 이나의 손을 쳐 내지는 않았다.
이나는 킥킥 웃더니 긴급 제안을 했다.
“그나저나 시현 씨, 우리 술 마시지 않을래요?”
“방금 이한 씨와 마시고 오는 길입니다만.”
“나랑도 마셔요. 어차피 잘 취하지도 않을 거 아니에요.”
시현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는 씨익 웃으며 그를 술 마시기 좋은 장소로 이끌었다.
“여기가 술 마시기 좋은 장소입니까?”
“네. 경관이 아주 예쁘죠?”
이나가 들뜬 어조로 물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밑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한 높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그들은 그곳 난간 바깥에 앉아 함께 맥주를 마셨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이나의 말대로 예쁜 경관이었다.
이나와 시현은 도시의 풍경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벌써 11월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꽤 차가웠다. 이나가 몸을 부르르 떨자 시현이 제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이나의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시현이 싱긋 웃고는 이나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조금이라도 체온을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나도 그 마음을 눈치채고 슬쩍 시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나야, 그 겉옷보다 내 불이 더 따뜻한데.]
갑자기 들리는 파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떼었다.
파인이 두 사람 사이에 앉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령들이 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네.’
이나는 민망해하는 표정을 짓다가 파인에게 말했다.
“당연히 파인 네 불이 더 따뜻하지. 이건 그냥 연인끼리 하는 애정 표현 같은 거야.”
그 말에 파인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파인에게 외쳤다.
[파인 바보! 이나를 방해하면 어떡해!]
[한창 좋았는데!]
[그치마안…….]
정령들이 떠들자 한창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시현이 정령들에게 슬쩍 말했다.
“이즈, 저기서 어떤 분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서 감시해 줄 수 있습니까?”
[감시?]
“네. 여러분이 도시의 안전을 위해 순찰단이 되는 겁니다. 정령 순찰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정령 순찰단!]
정령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알았어! 우리가 한번 보고 올게!]
“네. 고맙습니다.”
정령들은 빠르게 시현이 가리킨 방향으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나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들 다루는 솜씨가 제법인데요?”
“하하…….”
시현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이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옆에 딱 붙었다.
시현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이나의 어깨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다시 그럴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나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좋네요. 늘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어요. 던전이고 나발이고 다 잊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칼릭스도 죽었는데 던전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시현이 의문을 드러내자 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이미 벌어진 차원의 틈을 되돌리지 않는 한.”
“그렇군요. 조금…… 아쉽습니다. 이나 씨와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시현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나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왜 이나 씨가 미안해하십니까?”
“이 세계에 던전이 생긴 원인엔 저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시현이 깜짝 놀라 이나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이나 씨, 그런 생각은 절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이나 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네요. 방금 말은 철회할게요.”
이나가 살포시 웃었다. 시현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저는 이나 씨가 이 세계로 와 주어서 좋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이런 뜻입니다.”
시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가 이나의 입술을 입에 머금었다. 순간 놀라서 굳었던 이나도 곧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깊은 입맞춤 끝에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지자 이나가 빨개진 얼굴을 시현의 가슴에 묻었다.
시현이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장난스레 말했다.
“가만 보면 이나 씨는 은근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이런 성격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나가 뚱하게 대답하자 시현이 쿡쿡 웃었다.
잠시 후, 이나는 여전히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를 불렀다.
“시현 씨.”
“네.”
“솔직히 제 탓이 완전히 없다곤 못 하겠어요.”
시현은 이나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에 이나는 부담 없이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던전에는 계속 들어갈 거예요. 이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
“하지만 노력할 거예요. 지금의 이 일상을 절대 놓치지 않도록.”
이나가 고개를 들어 올려 시현과 눈을 맞추었다.
“저는 저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네. 그거면 됩니다.”
시현이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이나가 방긋 웃었다.
그녀와 마주 웃던 시현은 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에게 물었다.
“이나 씨는 L급 헌터라고 밝힐 의향은 없습니까? 그렇게 되면 모두가 이나 씨의 편의를 봐줄 텐데요.”
“왜요? 밝혔으면 좋겠어요? 그럼 더 바빠져서 시현 씨랑 더 멀어질 텐데.”
“그건……!”
시현이 눈을 치켜뜨며 절대 안 된다고 외치려는 순간 이나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 그럴 생각 없으니까. 전 눈에 띄는 거 싫어하거든요. 지금보다 더 바빠지는 것도 싫고. 그러니 지금처럼 S급 헌터로 남을 거예요. 영원히.”
“다행입니다.”
아까와는 달리 시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나는 금세 태도를 바꾸는 그가 황당했지만 픽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이나야! 우리 순찰하고 왔어!]
[이상 없습니다, 대장님!]
“그래, 그래.”
이나는 때마침 돌아온 정령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시현이 불쑥 맥주 캔을 내밀었다. 이나는 부드럽게 웃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제 맥주 캔을 들어 그의 것에 대고 살짝 쳤다.
툭-
이나와 시현은 그대로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 동시에 캬아, 소리를 내곤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행복이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