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49)

“스승님…….”

루엔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나의 곁에서 훌쩍거렸다.

그 뒤에 서 있는 세 사람, 시현과 서준, 그리고 도하의 안색도 그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시현은 더 어두워질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눈빛이 거무죽죽했다.

서준이 그를 힐끗 보고는 나지막하게 말을 전했다.

“이나 씨는 괜찮을 겁니다. 천해진 헌터가 말했잖아요. 몸에 피로가 쌓인 것뿐이라고. 휴식만 취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시현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도하가 서준에게 물었다.

“넌 안 가 봐도 돼? 올림픽 공원 던전 브레이크 뒷수습으로 바쁠 거 아냐.”

“바쁘긴 하지만, 이나 씨가 일어나는 것은 보고 가려고요.”

서준이 의식이 없는 이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슬쩍 미소를 그렸다. 웃고는 있지만 그도 썩 밝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도하는 더 말을 얹지 않고 팔짱을 꼈다.

성격이 급한 그는 원래 기다리는 것을 제일 못했다.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그는 바랐다. 이나가 얼른 깨어나기를.

그의 기도가 통하기라도 한 것인지, 마침 이나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

“스승님!”

“이나 씨!”

“야, 정신 들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침대에 붙어 섰다.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이나의 눈이 탁한 빛을 띠고 몇 차례 깜빡였다. 그러다 그들을 알아보는 듯 이내 이나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여긴…….”

“병실입니다. 이나 씨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데려왔는데, 기억 안 나요?”

서준의 말에 이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결국 쓰러졌군요.”

“그걸 말이라고…….”

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숨기지 못한 안도감이 한숨에 실려 같이 새어 나왔다.

이나는 침대에 손바닥을 얹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등을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시현이 굳은 얼굴로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시현은 어쩐지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에 이나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급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나는 서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던전 브레이크는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된 거예요? 몬스터는, 던전은요?”

“숨 좀 쉬면서 천천히 물어보세요. 급하지 않으니까요.”

서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그녀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모두 잘 해결됐습니다. 던전 브레이크로 빠져나온 몬스터들도 모두 해치웠고, 게이트는 닫혔습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닫힌 게 아니잖아.”

도하가 대화에 끼어들어 서준의 말을 정정했다.

서준이 반박하지 않자 이나가 도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닫힌 게 아니라뇨?”

“사라졌어.”

“네?”

“게이트가 사라졌다고. 흔적도 없이.”

뜻밖의 말에 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은 되었다.

들어갈 던전이 없어졌으니 그 문 역할을 하는 게이트도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었다.

이나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낌새를 보이자 도하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너 대체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음……. 그게…….”

이나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던전 자체를 폭파시켜 버렸어요.”

“……던전을 뭘 해?”

“폭파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모두 제 귀를 의심했다.

그에 이나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치만 그 방법밖에 없었는걸요.”

“그래서 그 <일체화>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수명 잡아먹는 스킬을 쓴 거고?”

“그……렇죠.”

이나가 뜨끔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하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끼어든 이가 있었다.

“그렇죠는 뭐가 그렇죠입니까? 그 스킬을 쓰면 이나 씨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씩씩거리며 소리친 이는 다름 아닌 시현이었다.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있던 이나도, 잔소리를 할 작정이었던 도하도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설마 시현이 이나에게 소리를 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분위기를 읽고 뻘쭘해했을 시현이지만 지금은 잔뜩 흥분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그 스킬을 써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남은 사람들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고마울 것 같습니까?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

“제발 저희도 이나 씨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에 응어리져 있던 것을 모두 쏟아 냈는지 시현이 의자에 털썩 앉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나는 왠지 죄책감이 들어 머뭇거리다 말했다.

“……미안해요.”

“…….”

시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유구무언이었기에 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두 사람의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루엔이 슬쩍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사과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신 게 어디예요. 모두 진정하시고 우리 과일이나 먹어요.”

“그, 그럴까?”

도하가 어색하게 루엔의 말을 받았다.

루엔이 사과를 깎아 접시 위에 예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서준에게도 사과를 권했지만 그는 미안해하는 얼굴 위로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서준은 쌓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결국 사과는 남은 사람들끼리 해치우게 되었다.

“…….”

“…….”

그 속에서 이나와 시현은 어색하게 사과를 아삭 깨물었다.

***

저녁이 되자 이한이 이나의 병실에 찾아왔다.

이한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나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가족 간의 회포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기에 시현은 도하와 루엔과 함께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홀로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아…….”

시현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전부 자만인 모양이었다.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전부 이나에게 쏟아 내 버렸으니.

이나가 모두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시현 본인도 같은 상황에 처해 선택을 해야 했다면 이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한 거였나.”

“아무래도 그렇죠?”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에 시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옥상으로 올라온 루엔이 그의 뒤에서 헤헤 웃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그가 온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시현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짓자 루엔이 그의 옆을 가리키며 물었다.

“옆으로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시현이 허락하자 루엔이 쪼르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과장되게 감탄을 내뱉으며 말했다.

“우와! 여기 경치가 정말 좋네요.”

“그렇습니까.”

“네.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시현은 괜히 뜨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루엔이 옥상 경치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힐끗 보았다.

“스승님에 관해 생각하고 계셨죠?”

“……네.”

시현은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왠지 민망해서 뺨이 살짝 붉어졌다.

루엔은 손으로 입을 가려 쿡쿡 웃었다. 그러고는 표정을 바꾸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시현 님이 이해해 주세요. 원래 스승님께선 한번 하기로 결정하면 고집을 잘 안 꺾으시거든요.”

“……저쪽 세계에서도 그랬습니까?”

“말도 마세요. 제가 아무리 말려도 절대 안 들으셨어요.”

루엔은 부러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물 토벌에 가지 말라 그래도 기어코 가서 피를 보고, 물이 없다고 전염병이 퍼진 마을에 가서는 병을 얻어서 한동안 마을에서 나오지도 못했다니까요.”

“그런 일이…….”

“안 그런 척하셔도 스승님은 마음이 여리셔서 사람들이 무슨 부탁을 하든 결국엔 다 받아 주세요.”

루엔이 일생일대의 고민이라는 듯 난간에 턱을 괴고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루엔은 시현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근데 이 세계에 계신 스승님을 보고는 조금 안심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맞아요. 근본은 어디 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루엔이 손가락 끝으로 시현을 가리켰다.

“이곳엔 시현 님과 다른 분들이 계시니까요.”

“네?”

“저쪽 세계에서 스승님은 늘 혼자셨거든요. 제자인 저도 스승님의 빈 마음을 다 채우진 못했어요.”

루엔은 당시의 이나를 떠올리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점점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곳에선 달라요. 가족이 있고, 시현 님이 있고, 스승님을 생각해 주는 다른 좋은 분들이 많잖아요.”

“…….”

“그런 의미에서 시현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루엔은 그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처럼 스승님께 계속 화내 주세요.”

“네……?”

“화내면서 스승님께 알려 주세요. 당신이 다치거나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아주 많다고. 그렇게 하면 스승님도 조금은 마음을 달리 먹으시지 않을까요?”

시현은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며 루엔을 응시했다.

그러다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군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헤헤.”

루엔은 뺨을 긁적이며 웃고는 옥상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날도 추운데 이만 들어갈까요?”

“그러는 편이 좋겠습니다.”

시현이 그를 뒤따랐다. 그는 왠지 마음이 한결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현이 루엔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던 때였다.

콰아아앙!

“……! 무슨……!”

난데없이 폭발음이 울려 퍼지더니 지진이 일어난 듯 건물이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루엔을 붙잡고 시현은 다시 옥상으로 나갔다. 난간으로 달려간 그는 보고 말았다.

병동의 건물 앞, 정원 산책로 한가운데에 생겨난 게이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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