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는 시현과 함께 곧장 루엔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리카의 바람을 타고 내려오자 미리 나와 있던 서준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루엔은요? 지금 어딨어요?”
이나가 다급한 어조로 채근했다.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느낀 서준은 대답하는 대신 그들을 루엔이 있는 병실로 안내했다.
쿠당탕!
그런데 병실로 다가설수록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병실 밖에서 간호사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루엔을 감시 겸 보호하는 헌터들도 간호사들과 함께 밖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이나가 서준을 쳐다보자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조종이 풀리긴 한 모양입니다. 저희를 잔뜩 경계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나 씨가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나는 그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도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루엔을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고자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나가 들어오자 헌터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나는 그들에게 부탁했다.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제가 해결해 볼게요.”
머뭇거리던 헌터들은 이나 뒤에 있는 서준을 힐끔 보더니 이내 병실 밖으로 나갔다.
탁-
마침내 문이 닫히고 병실 안에는 이나와 루엔, 그리고 시현과 서준만이 남게 되었다.
시현과 서준은 문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루엔이 그들을 경계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나가 혼자 그에게 다가갔다. 경계하지 않도록, 천천히.
루엔은 특유의 선한 눈빛을 지우고 두 눈에 오직 경계심만을 가득 담은 채였다. 그리고 그 눈으로 이나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천천히 다가갔건만, 이나가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오자 루엔이 외쳤다.
“저리 가! 꺼져!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이나의 귀에 이세계의 언어가 꽂혔다.
오랜만에 듣는 언어에 반가워할 새도 없이 물건이 날아왔다. 이나는 리카의 힘으로 루엔이 던진 물건을 살포시 잡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꺼지라니. 너무하지 않니, 루엔?”
이나의 입에서 루엔이 구사한 언어와 비슷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루엔이 몸을 흠칫 떨었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이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는 루엔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야 내가 네 스승이기 때문이지.”
“스승……이라고?”
루엔의 눈빛에 다시 경계심이 스몄다.
“웃기지 마! 내 스승님은 오래전에……!”
“그래. 오래전에 죽었지. 그쪽 세계 시간으로 죽은 지 15년은 됐다지?”
일순 루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것을 느낀 이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 유언을 지킨 것 같아서 기쁘구나.”
“무슨……?”
“내가 없어도 식사 잘하고, 잠 잘 자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라고 했었잖아. 네가 하도 불안해하기에 가끔 꿈에 나타나겠다고도 했었는데, 음……. 이건 내 사정상 그럴 수가 없었네. 미안하다.”
이나의 말을 들은 루엔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설마…… 정말 스승님……?”
“이제야 날 알아보는 거야?”
이나가 웃음을 흘렸다. 이전의 생에서 루엔에게 자주 보여 주었던 따스한 미소였다.
“정말 많이 컸구나, 루엔.”
“……스승님!”
이나의 눈빛에서 셀리나를 본 루엔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뒤에 서 있던 시현과 서준이 순간 멈칫했지만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루엔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나는 이제 저보다 훨씬 커진 루엔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 녀석은 여전히 눈물이 많았다.
***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낸 루엔은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이젠 훌쩍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혹여나 또 스승을 놓칠세라 이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크흥. 네…….”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온 루엔은 이나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덩치만 좀 커졌을 뿐이지.
반면 루엔의 눈에 비친 이나는 눈빛만 같을 뿐 예전과 모습이 전혀 달랐다.
이나를 낯설다는 듯이 바라보며 루엔이 물었다.
“정말 스승님 맞죠……?”
“아직도 의심하는 거야?”
“그치만 모습이…….”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세계에서 환생했는걸.”
“화, 환생이요?”
현실감 없는 일에 루엔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고는 루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모습은 바뀌었어도 네가 기억하는 셀리나는 내 안에 있으니 안심해.”
“……네.”
오랜만에 받는 쓰다듬음이 좋은지 루엔이 강아지처럼 헤헤 웃었다.
완전히 경계가 풀린 듯하자 이번엔 이나가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 세계에는 대체 어떻게 오게 된 거고.”
“그게…….”
루엔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머뭇거리던 그는 이나가 저를 빤히 응시하자 결국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고, 저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잘 지내고 있었어요. 스승님의 뜻을 잇는 어엿한 정령사로요. 그러던 중에 행방불명되었던 칼릭스가 저를 찾아왔어요.”
“행방불명이라고?”
“네. 칼릭스는 스승님이 돌아가신 날 같이 사라졌어요.”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루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칼릭스는 대뜸 나타나서 스승님이 보고 싶지 않냐고 물어 왔어요. 하지만 스승님도 아시잖아요. 칼릭스가 미쳐 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 마력, 너무 사악해서 그냥 넘길 수 없었어요.”
“…….”
“칼릭스가 먼저 공격해 오기에 정령들과 함께 칼릭스를 상대했어요. 그러던 중 칼릭스가 제게 무슨 짓을 했고, 눈을 떠 보니 이곳에…….”
“그 전의 일은 기억 안 나?”
“전혀요.”
이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에 루엔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제 정령들이 느껴지지 않아요. 설마…….”
“맞아. ……네 정령들은 소멸했어, 루엔.”
이나가 대답하자 루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이내 슬프지만 차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군요.”
“네 정령들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스승님이 왜 미안해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잠시 눈을 벅벅 문지르던 루엔이 애써 의젓하게 말했다.
“제 정령들은 분명 자연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쉬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괜찮아요.”
이나는 문득 청계천 던전에서 소멸하기 직전의 정령들이 웃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루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수 있었다.
그 후 이나는 루엔에게 그가 정신을 잃은 동안 있었던 일들을 알렸다.
그가 칼릭스와 소피아에 의해 조종당한 것부터 영국의 정령사로 매스컴에 소개된 것까지.
물론 저쪽 세계에서 쭉 살아온 루엔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말 외에는.
루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이나가 계속 이제 괜찮다고 말해 주자 그도 마침내 안정을 찾았다.
“이나 씨.”
그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현과 서준이 다가왔다.
낯선 두 사람이 다가오자 루엔은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에 두 사람이 멈칫하자 이나가 루엔에게 말했다.
“괜찮아. 내 사람들이야.”
“아…….”
루엔은 그제야 경계심을 조금 푼 얼굴로 시현과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도 안도했다.
“이야기는 잘 끝마친 모양이군요.”
“네. 덕분에요.”
싱긋 웃은 서준이 이나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시현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할 분위기가 마련되자 서준이 입을 열었다.
“상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청호 길드장께서 곤란해지셨다고요. 그리고 두 분은 무명 길드장…… 아니, K의 멤버 한주원과 함께 던전에 들어갔었고요.”
“맞아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서준이 당장이라도 헌터들을 보낼 것처럼 물었다. 그에 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몰라요. 칼릭스가 도중에 빼 갔어요.”
“하필이면…….”
“그래도 소득이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에요.”
이나는 서준에게 진사 길드장이 거짓 진술을 한 것과 하드 모드의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서준은 이 사실을 협회에 알리러 가겠다며 곧장 병실을 나갔다.
그리고 병실 안엔 이나와 루엔, 그리고 시현만이 남게 되었다.
어색하게 서 있던 시현은 이나가 서준이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키자 그곳에 앉으며 이나에게 물었다.
“루엔 씨는 괜찮은 겁니까?”
“네. 다행히요. 두통이 조금 있는 것 빼곤 괜찮다고 하네요.”
“다행입니다.”
시현이 설핏 웃었다.
이나의 옆에서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루엔이 이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스승님.”
“응?”
“혹시 스승님의 애인이세요?”
“뭐, 뭐?”
이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루엔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맞는군요!”
“아, 아니야!”
“아니라고요?”
“그래. ……아직은.”
조그맣게 뒷말을 덧붙이는 이나는 수줍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엔은 그것이 신기하고도 흐뭇했다.
그야 그녀가 셀리나일 적엔 애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아니지.’
그러고 보니 한 명 있긴 했었다. 애인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사람이.
루엔은 시현을 빤히 응시했다. 그에 시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루엔을 마주 봐 왔다.
루엔은 그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닮은 것 같기도?’
스승님은 이런 사람이 취향이신가?
사실 상관은 없었다. 이나가 좋다면야.
루엔은 저를 보는 시현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시현도 얼떨떨한 얼굴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앞으로 잘 지내 봐야지.’
***
타닥, 타다닥-
빠른 타자 소리가 연구실 안을 울렸다.
연구실의 주인, 사무엘은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 의자를 빙글 돌려 자신을 찾아온 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움직였다는 건, 모두 당했다는 거구나.”
사무엘은 동료들이 몰살당했음에도 태연한 어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렇지? 한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