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설마…….”
주변을 둘러본 이나가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K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거예요?”
“응? 아니?”
“그럼 무슨 싸움 준비인데요?”
이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도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시현이 그에게 말했다.
“적당히 해라, 백도하.”
“내 사전에 적당히란 없거든?”
도하가 언월도 끝으로 바닥을 퉁 치며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하자 이나는 왠지 소외감을 느꼈다.
“그래서 대체 준비란 게 뭘 말하는…….”
“유이나 님?”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이나가 홱 뒤돌자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요?”
“네. 유이나 님, 맞으시죠?”
“그런데요?”
“레먼 님으로부터 한국의 헌터분들을 잘 모시라고 전달받았습니다.”
이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시현과 도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두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을 발견했다.
‘뭐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나가 더 의아해할 새도 없이 갑자기 팀을 나눈 사람들이 이나와 시현, 도하를 각자의 방으로 끌고 갔다.
얼떨결에 방으로 돌아온 이나는 그들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중 한 명이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연회복은 어디에 있나요?”
“아. 그거라면 저 가방에…….”
그녀는 이나가 가리킨 가방에서 조세프가 이나를 위해 만든 옷을 꺼냈다.
저걸 왜 지금 꺼내지 싶어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몇몇 이들이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럼 연회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저, 저기요?”
그들은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이나를 데리고 연회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게 연회 전에 관광을 하고 돌아오겠다던 그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
어느새 모스크바에도 저녁이 찾아왔다.
아직 연회가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연회장에는 사람들이 몇몇 도착해 있었다.
모두 각 나라의 S급 헌터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일행 중 가장 먼저 준비를 끝마친 시현이 발을 디뎠다.
“후우.”
겨우 스타일링의 지옥에서 벗어난 시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통 스타일의 연회복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가슴에 금색 체인을 달아 포인트를 살짝 잡아 주었을 뿐이었다.
머리도 평소 헤어스타일에 컬만 살짝 넣어 준 것 외에는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 덕에 준비를 일찍 끝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몇몇 헌터들이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다들 각자 아는 사람과 어울릴 뿐이었다.
시현도 딱히 그들과 어울릴 생각은 하지 않고 구석에 자리를 잡은 뒤 이나와 도하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 진짜. 겨우 풀려났네.”
구시렁거리며 다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온 이는 도하였다.
그는 캐주얼한 복장을 선호했던 평소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특히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 이리저리 뻗쳐 있던 머리가 지금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은 뒤로 넘겼고, 다른 한쪽은 조금 내려 볼륨을 넣어 준 상태였다.
그가 걸친 연회복 재킷은 와인색이었다. 자칫 튀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붉은 머리 덕에 그는 그 옷을 아주 잘 소화해 냈다.
연회장을 두리번거리던 도하는 이내 시현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시현에게 가까이 오자마자 그가 내뱉은 질문은 이나에 관한 것이었다.
“유이나는 어디 있어?”
“아직 안 왔다.”
“그래?”
조금 실망한 듯한 도하는 시현의 옆에 서서 연회장 입구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나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나 대신 다른 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 여기들 모여 계셨군요.”
시현과 비슷한 검은색 연회복을 입은 한주원이 방긋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살가운 인상이었으나 도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이나 씨는 아직 안 왔나요?”
한주원이 그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도하는 그의 입에서 이나의 이름이 나오자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도 시현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기에 차마 티는 내지 못했다.
“아직 안 왔어.”
“그렇군요. 곧 연회가 시작될 텐데.”
한주원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연회 시간이 다가오자 헌터들이 하나둘 연회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개중엔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기려는 모양인지 무척 화려한 복장을 한 이도 있었다.
시현과 도하는 눈으로 열심히 이나를 찾다가 이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한주원이 탄성을 흘리며 말했다.
“아. 저기 오는군요.”
그 말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지만 그들은 쉽게 이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다른 S급 헌터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령사의 특성을 가진 이나가 궁금해서 쳐다본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현과 도하는 달랐다.
오늘 이나는 평소와 달랐다. 예쁘게 화장도 하고, 늘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던 머리는 틀어 올려서 목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조세프가 영감을 받아 제작한 드레스가 보였다. 시현과 도하는 지금 이 순간 조세프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레스는 이나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발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의 머메이드 드레스는 샹들리에의 불빛을 머금어 여러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오팔을 갈아 넣어 만든 것처럼.
뿐만 아니라 어깨 부근에 날개처럼 튀어나온 소매가 앙증맞았고, 그녀가 걸을 때마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발목이 그들을 미치게 했다.
두 사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시현과 도하는 이 순간 이나가 멀리 떨어져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아.”
그들을 발견한 이나가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다가왔다.
그런데 드레스가 불편한지 이나가 걸어오다 말고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이 미치도록 어여쁘게 보였다.
‘미친! 귀여워!’
‘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도하와 시현이 같은 마음으로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나가 드디어 그들에게 당도했다.
그녀는 저를 빤히 보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봐요?”
“뭐, 뭐가?”
“낯선 사람 보듯이 보고 있잖아요.”
낯설긴 했다. 그야 이런 이나의 모습은 처음 보았으니까.
도하가 대답을 망설이는데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시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 굉장히…….”
예쁘다. 아름답다. 시현은 그런 말을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시선이 쏟아지자 망설임 끝에 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파격적이시군요.”
이시현 이 머저리 같으니.
시현은 말을 꺼냄과 동시에 후회했다.
그런데 옆에서 도하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그러게! 오늘 되게 파격적으로 입었네!”
다행이다. 머저리가 두 명이어서.
시현은 차마 이나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난감하다는 듯한 이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음. 역시 좀 과한가요?”
“과하긴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 모두 비슷한 차림인걸요.”
한주원이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해 주었다. 그러자 이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시현이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그러는 동안 연회장에는 초대를 받고 온 S급 헌터들이 모두 모였다.
초대객들이 모두 모이자 데이비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앞의 S급 헌터들을 동경심과 감격이 어린 눈으로 한 번 스윽 훑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파티의 주최자인 데이비드 레먼입니다.”
뻔한 자기소개였지만 모두들 지루해하는 티를 내지 않고 얌전히 경청했다. 도하 빼고.
이나가 도하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사이 데이비드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자리가 익숙한 분도 계시고 새로운 분도 계실 텐데요, 모두 세상을 지키는 영웅들이신 만큼 부디 부담 없이 즐기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자리는 여러분을 위한 자리이니 말입니다.”
마지막은 뻔한 감사 인사로 매듭지어졌다. 이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박수를 치며 그에게 호응했다.
이러고 있으니 실감이 났다. 드디어 연회가 시작됐구나.
주최자인 데이비드의 주변으로 헌터들이 몰리는 것이 보였다. 의외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한 것이, 데이비드는 G&I코퍼레이션의 대표였다. 그와 친분을 쌓아 놓으면 마도구라도 하나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도하의 말대로라면 이번 연회에서도 S급 아이템이 나올 터.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었다. 물론 이나도, 그녀의 일행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저는 저기 가서 음식이나 좀 먹고 있겠습니다. 같이 가시겠어요?”
한주원이 연회장 구석에 있는 푸드 코너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이나를 포함한 다른 일행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한주원은 혼자 그곳으로 향했다. 목적이 같은 일행만 남게 되자 이나는 슬쩍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때요?”
“아직 눈에 띄는 이는 없습니다.”
언제 그녀에게 얼이 빠져 있었냐는 듯 시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도하도 고개를 저었다. 시현과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한 가지였다.
이 사람들 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K를 찾는 것.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오긴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S급 헌터라는 점이었다. 여차하면 도망치거나 함께 싸울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래서 K가 몸을 사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지만.
“어쩌면 저희에게 몰래 접근할지도 몰라요. 저희 쪽을 보고 있거나 다가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번 떠봐요.”
“알겠습니다.”
“오케이.”
시현과 도하가 대답했다. 이나도 음료를 마시는 척 주변 사람들을 빠르게 탐색했다.
그때 이나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다.
그녀가 한 말처럼 계속 이쪽을 살피고, 올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가.
그는 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인가?’
이나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며 옆에 있는 시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시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이나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런데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어쩐지 멍한 얼굴로 가까이 붙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뺨이 붉게 물든 것도 같았다.
이나가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어깨를 두드리려 하는데, 그 전에 다가온 이가 그들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