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입니다.”
“아니, 왜요? 그냥 있는 옷 입고 가면 안 되나?”
이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자 서준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세 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들입니다. 그런 분들을 꾀죄죄하게 보내면 한국 헌터 협회 본부장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아요.”
“꾀죄죄라니……. 거 말이 심하시네.”
이나가 툴툴거렸지만 서준은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에 이나는 괜히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별로인가?’
이나는 멋보단 실용성을 추구했다. 물론 격식을 차려야 할 때 입는 옷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캐주얼한 옷들이었다.
오늘 입은 옷도 마찬가지였다. 흰 반팔 티셔츠 위에 걸친 청남방이 무척이나 심플해 보였다.
결국 이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시현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마지막으로 연회에 참가했을 때 모두 차려입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딱히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서 잊고 있었습니다만.”
“……그 정도의 연회예요, 이게?”
“주최자가 데이비드 레먼이니까요.”
“아악! 귀찮아 죽겠네!”
도하가 벌써부터 성질을 내며 차 시트에 널브러졌다.
이나도 불만 어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서준의 차가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곳은 거대한 호텔 정문 앞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세 사람을 돌아보며 서준이 말했다.
“얼른 들어가죠.”
그러더니 앞장서서 들어가 버렸다.
이나는 양쪽에 선 두 남자와 시선을 주고받은 뒤 서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은 호텔 맨 꼭대기 층의 스위트룸이었다. 그에 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준에게 물었다.
“옷 보러 간다면서 왜 호텔로 온 거예요?”
“외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라서요. 호텔로 모셨습니다.”
서준이 망설임 없이 벨을 누르자 이나는 괜히 긴장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오셨군요, 본부장님.”
외국인임에도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자세히 보니 왼쪽 가슴에 아이템을 차고 있었다. 통역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서준과 인사를 나눈 그가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분들이 본부장님이 부탁했던 그분들인가요?”
“네. 맞습니다.”
“흠. 확실히 힘을 좀 주어야 할 것 같은 분들이군요. 특히 두 분!”
그는 대뜸 이나와 도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졸지에 지목받게 된 두 사람이 몸을 움찔 떨자 그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특히 옷에 더 힘을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근데 누구신지…….”
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서준을 쳐다보자 그가 빙긋 웃으며 소개를 해 주었다.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디자이너, 조세프 가렐 씨입니다. 오늘 세 분의 옷을 봐 주실 겁니다.”
“반갑습니다.”
조세프가 그들에게 차례로 악수를 건네 왔다. 시현과 도하가 먼저 얼떨떨한 얼굴로 악수를 받았다.
이나라고 별다를 거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을 맞잡는 순간 조세프의 눈빛이 바뀌었다.
“호오. 이분이 바로 그…….”
“네. 맞습니다. 최근에 정체불명의 알을 깨운 정령사, 이나 씨입니다.”
서준의 소개에 조세프가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이 괜히 부담스러워 이나가 뺨을 긁적이고 있자 조세프가 손뼉을 짝 쳤다.
“어이쿠. 제가 손님들을 밖에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나 일행은 조세프의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2단으로 된 행어에 옷이 가득했다. 그런 행어가 넓은 스위트룸을 꽉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엔 장신구와 넥타이도 준비되어 있었다.
뭔가 본격적인 것 같은 광경에 도하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조세프의 직원들이 그들의 등 뒤를 막아서자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뒤돌아서야 했다.
“오늘은 사이즈와 여러분께 어울리는 색감과 디자인 등을 확인할 겁니다.”
“여기서 고르는 게 아니에요?”
“노우! 사람마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색감과 디자인이 있는데 이 중에서 고를 수는 없죠! 이 옷들은 전부 샘플입니다.”
벌써부터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저 말은 그러니까, 어울리는 색감과 디자인을 찾을 때까지 옷을 갈아입히겠단 소리지?’
심지어 나중에 완성된 옷까지 입어 봐야 끝이 날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이나의 속도 모른 채 정령들은 저들끼리 실체화해서 방 안의 옷들을 둘러보았다.
[우와! 옷이 굉장히 많아!]
[반짝반짝해요……!]
[이 몸이 입어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군!]
“옷 훼손하지 말고 이리 와.”
옷들이 척 봐도 비싸 보여 이나는 불안한 마음에 정령들을 불러들였다.
정령들이 다시 이나의 주위에서 맴돌자 정령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눈으로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특히 조세프는 눈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영감이……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네?”
“이걸 놓치면 안 돼요!”
그는 자기 할 말만 내뱉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사람들이 황당해하며 닫힌 문을 바라보자 한 직원이 다가와 그들에게 말했다.
“사장님께서 유이나 님을 보시고 옷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셨나 봅니다.”
“그런가요…….”
“유이나 님의 옷은 사장님께서 직알아서 하실 모양이시니 사이즈만 재고, 나머지 두 분만 체크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면 시현과 도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이나는 끌려가다시피 사라지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빠르게 사이즈를 재고 소파에 편안히 앉아 카탈로그를 들여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 나네.’
전생의 그녀도 가끔이지만 연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옷을 골라 입고 격식을 차렸었다.
‘나쁜 기억은 아니었지.’
이나가 직원이 준비해 준 음료를 마시며 즐거운 듯한 눈으로 카탈로그를 보고 있자 서준이 슬쩍 다가왔다.
“마음에 드는 옷 있으면 말해 보세요.”
“왜요? 사 주게요?”
“원한다면요.”
농담이었는데 서준이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이나는 카탈로그를 덮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옷 정도는 저도 살 수 있어요. 게다가 저는 이제 유이나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유이나 헌터잖아요. 돈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요.”
“그러네요.”
“그리고 본부장님도 아무한테나 뭘 사 주겠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다 호구 잡힌다니까요?”
“서준 씨.”
“네?”
이나가 올려다보자 서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퇴사하면 서준 씨라고 불러 주기로 했잖아요.”
“……그걸 기억하다니. 알았어요, 알았어. 서준 씨. 됐죠?”
“네. 만족스럽네요.”
서준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자 이나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그놈의 호칭이 뭐라고.
이나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서준은 말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한테나 사 주겠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이나 씨니까 사 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다 제가 집이라도 사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요?”
“이나 씨가 원한다면 그 정도는…….”
“아, 그만. 진짜 위험한 사람이네, 이분.”
서준이 하하 웃음을 흘렸다. 주변에 있던 조세프의 직원들도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잘생기고 환한 얼굴이었다.
우당탕탕-
그때 시현과 도하가 들어간 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도하가 난리를 치는 모양이었다.
서준이 잠시 보고 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에 홀로 남은 이나는 음료를 마시며 생각했다.
‘오늘도 평화롭구만.’
***
시간은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연회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나는 서준이 준비해 준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비록 서준은 함께할 수 없었지만 그들을 무척이나 신경 써 주었다.
공항에 떡하니 존재하는 거대한 전세기도 그의 작품이었다.
“우와…….”
“이거 진짜 우리만 타는 거야?”
이나와 도하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서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을 배웅 나온 서준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디 편하게 다녀오시길 바라는 마음에 준비해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최고예요.”
이나가 진심을 담아 엄지를 척 치켜들자 서준이 웃음을 흘렸다.
그사이 또 다른 탑승객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제가 좀 늦었나 보군요.”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띤 채 다가오는 그는 무명의 길드장 한주원이었다.
그 또한 이번 연회에 참가했기에 그들과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서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일행으로 참가하는 게 조금 낯설었지만 이나는 그러려니 했다.
다만 한주원과 함께 이동한다는 사실에 정령들과 도하는 불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나야, 저 사람도 같이 가?]
“전엔 따로 가더니…….”
이나는 혹시나 한주원에게 들릴까 봐 도하와 정령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때 이나를 발견한 한주원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연회에서 뵙겠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되었네요.”
“그러게요.”
“이동하는 동안에도, 연회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주원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딱히 잘 부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이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시현이 시간을 확인하며 슬쩍 눈치를 주었다.
전세기에 올라타기 전, 서준이 그들에게 말했다.
“부디 안전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시길 바랍니다.”
그 속에는 그들을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K를 만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전세기에 올라탔다.
이제 연회장으로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