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49)

‘그럼 바깥의 몬스터들이 정말로 엘프였고, 던전은 저쪽 세계와 연결된 건가?’

이나는 마음이 심란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막상 증거가 눈앞에 나타나자 거기에서 오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이나가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서 있자 기다리다 지친 해진이 그녀를 따라 올라왔다.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 표정이 왜 그래요?”

해진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그만큼 이나의 표정이 심각해 보인 모양이었다.

이나는 수호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해진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지만 이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터였다.

이나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할 일이 생각났어요. 얼른 끝내고 나가야겠어요.”

“할 일?”

“네. 그러니까 얼른 던전을 공략하고 나가죠.”

마을 하나를 토벌했는데도 공략 완료 시스템 창이 떠오르질 않았다.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거나, 아니면 이런 마을이 몇 개는 더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해진은 분위기가 확 바뀐 이나가 걱정되는 모양이었지만 묵묵히 그녀를 뒤따랐다.

그 후 이나는 산속에 숨어 있던 마을을 네 개 더 공략했다. 리카가 숨은 마을을 잘 찾아내서 기습했기에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마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여기만 처리하면 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런 것 같네요.”

이나는 산속의 한 풍경으로 보이는 눈앞을 보며 대답했다. 환상을 덧씌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리카의 말에 따르면 이 앞에 몬스터들의 마을이 있었다.

해진은 지금은 좀 풀렸지만 여전히 굳은 얼굴의 이나를 힐끗 보며 말을 꺼냈다.

“저기, 이나 씨, 혹시 고민이 있다면…….”

“가죠.”

“아니,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으라고요!”

내키지 않는 상담을 시도해 보려다 실패한 해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가 그러든 말든 이나는 숨은 마을을 향해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쐐액-

동시에 맞은편에서 여러 개의 화살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이나는 리카의 바람으로 그것들을 쳐 내고 적을 바라보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나 보네.”

“크으으…….”

몬스터들이 이나를 경계하며 재차 화살을 겨누었다. 검을 든 몬스터들은 화살이 날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나가 화살을 막는 틈을 타 공격할 모양이었다.

“그렇겐 안 되지.”

이나가 네움에게 명령하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땅이 활을 든 몬스터들이 올라가 있는 감시탑을 집어삼켜 무너뜨렸다.

몬스터들이 혼비백산하는 와중에 이나는 그녀에게 가장 위협적인 검을 든 놈들을 공격했다.

“캬아악!”

윈티의 얼음 비수에 맞은 몬스터가 원망 어린 눈으로 이나를 노려보다 숨을 거두었다.

한때는 엘프였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그저 몬스터.

그들에게 연민 같은 감정을 느낄 이유는 없었기에 이나는 그저 무심하게 토벌을 이어 나갔다.

“이나 씨, 저기요!”

뒤에서 방패를 세우고 이나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해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쪽을 쳐다보자 마을 안쪽에서 늙은 몬스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크르르…….”

몬스터는 이나를 보며 낮게 울었다. 다른 놈들보다 약해 보였지만 왠지 심상치 않은 기개에 이나는 놈부터 처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놈이 더 빨랐다.

“이런.”

늙은 몬스터가 손바닥을 맞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이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몬스터가 그녀에게 디버프 마법을 건 것 같았다.

“이나 씨!”

해진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이나도 이미 보고 있었다.

몇 남지 않은 몬스터들이 그녀를 향해 일격을 가하는 모습을.

해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나가 당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캬아아악!”

그런데 이나의 것이 아닌 비명이 들려오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몬스터들이 이나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해진이 중얼거렸다. 다행이긴 하지만, 분명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이나가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그야 내가 다루는 것은 정령이니까.’

이나가 검사나 마법사였다면 몬스터가 건 디버프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나는 정령을 다루는 존재. 그녀에게 그러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정령들이 그녀의 마력을 가지고 알아서 행동했기에 이 디버프는 그녀에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나는 그냥 정령들을 움직여 공격했다. 늘 그러듯 땅으로 놈들의 발을 붙잡고, 바람으로 베어 버렸다.

“그으으…….”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늙은 몬스터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몸을 포박했던 마법이 풀리자 이나는 늙은 몬스터에게 다가갔다. 이 몬스터를 죽여야 그들이 던전을 나갈 수 있었다.

몬스터는 자신의 앞에 선 이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나의 입에서 몬스터에게 익숙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엘프.”

몬스터가 눈을 뜨고 이나를 응시했다. 이나는 그런 몬스터에게 짧게 물었다.

“맞지?”

몬스터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몬스터는 그저 고요하게 이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것으로 답은 충분했다.

푹-

이나는 마지막 남은 몬스터를 해치우고 해진에게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S급 던전 ‘타락한 자들의 거처’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저주 인형(B)’을 획득하셨습니다.⌟

⌜5SP를 획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스템 창을 확인한 해진이 이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끝난 거죠?”

“네.”

“하아. 다음엔 제발 날 부르지 말아 줘요.”

“보고요.”

해진이 눈을 치켜떴지만 이나는 이미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였다. 잠시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던 이나가 앞장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나가요.”

***

이나와 해진이 던전을 나왔을 땐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 던전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사흘이나 지나 있을 줄은 몰랐기에 이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9월 17일? 미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저 안에 있어 봐야 얼마나 있었다고! 체감상 하루밖에 안 됐겠구만!”

날짜를 확인한 해진이 옆에서 툴툴거렸다. 이나는 그를 무시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전화하는 걸 보니 공략은 무사히 끝났나 보군요.]

전화를 받은 이는 서준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장난기도 장난기지만 안도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내심 S급 던전에 들어간 이나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이나는 공략에 대해 대강 보고한 뒤 그에게 물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죠?”

자신이 사흘이나 던전에 들어가 있는 동안 무슨 사건은 없었는지, K의 움직임에 대해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묻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서준은 그녀가 묻는 바를 바로 깨닫고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랭킹전 시즌이라 그쪽에서도 몸을 사리고 있는 건지.]

“그러게요.”

[아. 랭킹전 하니까 생각났는데요.]

“뭔데요?”

[이나 씨가 던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천조 길드장과 청호 길드장이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도하의 소원이 드디어 이뤄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나는 피식 웃었다.

“도하 씨가 기뻐하겠네요.”

[아주 날아다니죠.]

“안 봐도 비디오네요.”

서준이 웃음을 흘리다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정선으로 올 건가요?]

“아뇨.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만나야 할 사람?]

“양지은 헌터요.”

[양지은 헌터……?]

서준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서는 의문일 것이었다. 지은과 별로 접점이 없는 이나가 그녀를 만난다고 하니.

하지만 이나는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를 만나서 던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듣고 싶었다.

그걸 통해 던전이 전생의 세계와 왜, 어떻게 연결된 건지 알아내야 했다.

이나의 눈빛이 진지한 빛을 띠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해진까지 조용하게 만들 정도로 무거운 눈빛이었다.

이를 느끼기라도 한 건지 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더더욱 이곳으로 와야겠네요.]

“네?”

[양 팀장은 지금 여기 있거든요. 랭킹전을 하고 있는 이곳, 정선에.]

이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서준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

“금방 갈게요.”

***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하늘을 통해 날아왔거든요.”

이나는 감탄 어린 서준의 말에 대충 응수해 주었다. 서준은 이나의 주변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천해진 헌터는 같이 안 왔나요?”

“피곤하기도 하고 양지은 헌터를 만나기 싫다고 서울로 돌아갔어요. 둘이 사이가 안 좋아요?”

“음. 좋은 편은 아니죠.”

서준이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는 건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기에 이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양지은 헌터는요?”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기장 벽에 등을 기대었다.

때마침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리며 벽이 울렸다. 서준도 그 소리를 듣고 경기장 안쪽을 힐끗 보았다.

“결승이 시작되려는 모양이군요.”

그 말에 이나도 고개를 돌렸다. 이나가 신경 쓰여 하는 듯하자 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양 팀장이 올 동안 경기나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까 두 사람도 이나 씨를 찾는 모양이던데요.”

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경기장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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