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끝나고 9월이 찾아오자 날이 꽤 선선해졌다.
“랭킹전 하기 딱 좋은 날씨네.”
이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드디어 랭킹전이 개최되었다. 현재 16강에 진출할 헌터들을 가리기 위해 예선을 진행하고 있었다.
참고로 S급 헌터들은 빠르게 예선을 통과했다.
그야 S급이니까. 그 아래 등급의 헌터들과 무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손쉽게 승리를 점할 수 있었다.
간혹 까다로운 스킬을 지니거나 전략적인 작전을 짠 A급에게 패배한 S급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몇 안 돼서 위로 올라갈수록 S급들의 경기였다.
그럴 거면 S급 랭킹전을 따로 개최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지만, 이곳은 한국이었다.
이 조그마한 땅에 S급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S급 랭킹전을 따로 개최하기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튼 랭킹전이 개최된 탓에 원래도 바빴던 협회는 한층 더 바빠졌다. 그리고 이나의 옆에 앉은 사람도 원래대로라면 그들처럼 바빠야 했다.
이나는 옆을 힐끔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듣고 있어요? 랭킹전이 개최되었다고요.”
“당연히 알고 있죠.”
“근데 왜 여기서 저랑 커피를 마시고 있냐고요. 안 바빠요?”
이나가 계속 따지자 서준이 빙긋 웃었다. 마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치만 이나 씨가 요새 기운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안 찾아올 수가 있겠어요.”
“지금은 괜찮거든요. 하아. 오빠는 왜 그런 전화를 돌려서…….”
서준이 그녀의 옆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번 시현처럼 이한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전에는 바빴는지 괜찮냐는 문자만 보내길래 대충 대답해 줬더니 그게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서준은 기어코 찾아와서 이러고 있었다.
‘이 사람도 도하 씨처럼 단순하면 좋을 텐데.’
도하는 다짜고짜 전화하더니 괜찮다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아, 그래? 다행이네!’라며 넘어갔다. 덧붙인 말이라고 해 봤자 ‘나중에 아란 데리고 놀러 갈게!’라는 말이 전부였다.
반면 서준은 쓸데없이 질척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괜찮은데.’
오히려 서준이 바쁜 와중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이나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서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요리조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확실히 유이한 씨에게서 들은 것보다는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만 가세요. 바쁠 거 아니에요.”
“음. 이왕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서준이 은근슬쩍 그녀에게 붙으며 말했다. 이나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기분이 저조했던 거예요?”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개인적인 일이니까 묻지 마세요.”
“혹시 천조 길드장과 연관되어 있나요?”
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서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천조 길드장이 협회를 찾아와 이나 씨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K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협회에서 일어난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특히 천조 길드장인 시현이 찾아왔다면 더더욱.
서준이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눈치챈 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쪽 얘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어요. 시현 씨도 본부장님처럼 제가 걱정돼서 찾아온 것뿐이에요.”
“시현 씨……?”
“아.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더라고요.”
서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뭔가를 짧게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곧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천조 길드장이…….”
이나는 그가 그러든 말든 커피를 쪼옥 빨아들였다. 그사이 원래의 텐션으로 돌아온 서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서준 씨라고…….”
“싫어요.”
“……아직 말 다 안 끝났습니다만.”
“저 퇴사하면 그렇게 불러 드릴게요.”
이나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동정심을 사려고 일부러 그러는 듯했다.
그를 흘겨보던 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일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저 일해야 돼요. 이제 그만 가세요.”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이번엔 또 뭔데요?”
“앤드류와 K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나의 입가가 딱딱해졌다.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온다고?
이나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자 표정이 돌변한 서준이 다음 말을 이었다.
“헌터가 죽으면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는 건 알고 있죠?”
“들어 본 것 같아요.”
“앤드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전남 지부에서 수감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책임을 느꼈나 봅니다. 물건들을 본부로 넘겨 달라고 해도 한사코 자기들끼리 조사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 협회 전남 지부 때문에 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꽤 오래 고집을 부리길래 결국 제가 다른 헌터들과 직접 전남으로 내려가서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와 함께 전남으로 내려갈 헌터들은 시현과 도하가 될 터였다. 두 사람이 앞으로 K를 쫓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의문이었다.
“그걸 왜 저한테 알려 주시는 건가요?”
이나는 시현의 제안에 따라 그 일에서 빠지기로 했다. 서준도 옆에서 시현의 말을 같이 듣고 있었으니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이나의 추측대로 서준은 그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이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나는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다.
“제가 같이 가길 바라시는군요.”
“……맞습니다.”
서준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이나 씨가 평범한 일상을 보내도록 협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나 씨, 저는 헌터 협회 본부장이에요. 천조 길드장과 청호 길드장만으로 K를 없앨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이상 이나 씨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확실히 그건 그랬다. 시현과 도하만으로는 K를 무너뜨리기 힘들 터였다.
앤드류 한 명도 셋이서 겨우 해치우지 않았던가.
이나가 원하는 대로 평범한 삶을 보내면서도 계속 찝찝했던 이유의 나머지가 여기에 있었다.
이나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넌지시 서준에게 물었다.
“언제 가는데요?”
“이번 주 목요일입니다.”
긴장이 어려 있던 서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나가 함께 갈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약속했던 목요일이 되자 서준이 이나를 데리러 왔다.
그것도 고급 세단을 끌고.
이나는 집 앞에서 번쩍번쩍 빛을 발해 사람들의 주목을 샀던 차와 서준을 상기하며 미간을 꾹 눌렀다.
“좀 평범하게 올 수는 없어요?”
“이나 씨를 모시고 가는데 평범한 차를 끌고 올 수는 없죠.”
“애초에 평범한 차가 있긴 해요?”
서준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없다는 소리군.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다 이웃 주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이사라도 가야 하게 될까 두려웠다.
‘내 편안한 삶이…….’
물론 K를 없애는 데 협조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이미 평범한 삶은 물 건너간 것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아냐. 아직 희망이 있어. K를 잡는 건 잡는 거고, 정체를 밝히는 건 다른 일이잖아?’
이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뒷좌석에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도 확실히 비싼 차라 그런지 의자가 편한데?”
들뜬 얼굴을 내민 이는 도하였다. 그는 차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크릉!”
아란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이나는 혹시나 아란이 의자 시트를 뜯을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서준은 딱히 개의치 않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편하다니 다행이군요. 이동하는 데 오래 걸릴 테니 두 분 다 한숨 주무시죠.”
“아무리 그래도 운전하는 사람 두고 어떻게 자요. 괜찮아요.”
이나는 조수석 의자에 편히 기대면서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아란에게 기대고 있는 도하도 딱히 피곤해 보이진 않았다.
“이야. 아무튼 유이나가 함께한다니까 좋네. 이시현 그놈이랑 둘이 움직일 거 생각하니 답답했는데. 잘됐어.”
도하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시현은 던전 공략 일이 있어 조금 늦게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나가 이 일에 합류한다는 얘기를 전했을 때 시현의 목소리가 떨떠름했기 때문이었다.
‘가면서 변명거리나 생각해 봐야지.’
이나는 다가올 시현의 잔소리에 맞대응할 거리를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동안 도하가 뒤에서 투덜거렸다.
“이시현 그놈은 너무 깐깐해. 가만 보면 꼰대 같다니까. 본인은 FM이라고 하는데 그냥 융통성이 없는 거 아냐?”
그 말에 이나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시현을 두둔하고 있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죠.”
“헐. 유이나, 너 지금 내 앞에서 이시현을 편드는 거야?”
도하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서준도 힐끗 시선을 주는 것이 흥미로운 듯했다.
이나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생각한 바를 말로 꺼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게 도움이 될 때가 많고. 시현 씨가 도하 씨 말처럼 융통성도 발휘하면 더더욱 훌륭한 리더이자 헌터가 될 것 같아요.”
도하는 이제 멍한 얼굴로 이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준이 끼어들었다.
“천조 길드장이 매뉴얼대로 행동했으면 이나 씨의 정체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퍼졌을 겁니다. 그때도 편을 들어 줬을지 궁금하군요.”
“…….”
할 말이 없네.
이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