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49)

순식간에 자유의 몸이 된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마치 거인이 일어나는 것 같은 긴장감이 서준을 덮쳤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굳은 목을 풀던 그림자가 씨익 웃었다. 그의 흉흉한 눈빛이 정확히 서준과 정재원을 향했다.

“전세 역전이로군. 그렇지 않나?”

서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재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림자가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오려 하자 어느새 다가온 수용소 헌터들이 그를 막아섰다.

“얌전히 투항해라!”

“투항?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몸을 포박하고 있던 끈을 잘라 낸 덕에 인벤토리를 쓸 수 있게 된 그림자가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본 헌터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림자가 조금 더 빨랐다.

펑-

그가 바닥에 무언가를 내던지자 희끄무레한 연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집어삼켰다. 연막탄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상대는 어쌔신 계열의 암살자.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유리한 것은 그림자였다.

무기를 쥔 헌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침착하게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그 순간이었다.

“컥!”

동료의 비명 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동시에 털썩, 하고 쓰러지는 소리도.

그것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도 되는 양 비명 소리는 점점 늘어났다. 불안에 찬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는 이도 있었지만, 그 비명조차도 곧 끊기고 말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헌터가 외쳤다.

“젠장! 어디냐! 빨리 나와!”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흠칫 몸을 떤 헌터가 뒤로 돌았다. 그러나 그는 무기를 채 휘두르기도 전에 목을 잡히고 말았다.

있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놈의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크윽……! 이 망할 자식! 컥!”

순간적으로 목에 가해지는 힘에 그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유명을 달리했다.

그림자는 헌터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던지고는 서서히 뒤로 돌았다.

“자, 그럼.”

그의 눈에 연기 속에서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서준과 정재원이 들어왔다.

그림자는 악귀처럼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는 어떻게 죽여 줄까.”

서준은 일반인, 정재원은 정신계 마법사였다. 둘 다 그에게 대항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림자는 일부러 인기척을 숨기지 않고 걸어갔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 닿았다.

온몸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힌 그를 보며 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고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애초에 용서 따위 바란 적 없다.”

그림자는 다른 헌터에게서 빼앗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서준과 정재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림자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잘 가라.”

그 말과 함께 검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왔다.

서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에 베이는 소리치곤 둔탁한 소리였다. 무엇보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서준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떴다. 그러자 그림자의 검을 막고 있는 흙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람도.

“당신은…….”

“후. 아슬아슬했네.”

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서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이나 씨?”

이름을 불린 이나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무사하죠?”

“네. 덕분에. 근데 어떻게 여기에…….”

“설명하기 전에.”

이나가 다시 앞을 보았다. 그녀를 보고 전의 일을 떠올린 그림자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나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일단 이 상황부터 해결하죠. 윈티, 두 사람과 주변 마법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줘.”

[네……!]

서준과 정재원의 주변에 얼음으로 된 돔이 보호막처럼 생겨났다. 몰래 숨어서 전대일에게 비행 마법을 펼치고 있는 마법사들의 주변에도.

서준이 그 안에서 걱정스럽다는 듯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 씨,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혼자 아니에요.”

“네?”

설명은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마침 건물 밑에서 헌터들이 외쳐 댔기 때문이었다.

“천조 길드다!”

“청호 길드도 왔어! 지원군이다!”

안도감이 가득한 외침에 서준은 반대편으로 달려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시현과 도하가 그들을 가로막는 언데드들을 베며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길드원들과 함께.

“뭐야. 이시현 너도 부른 거야? 여긴 우리 애들로 충분하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전투에 집중해라.”

오늘도 투닥거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서준은 되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후드득-

그때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가 흙벽에서 검을 빼낸 탓에 흙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순순히 검을 돌려준 이나는 건조한 눈으로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림자 또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이나를 보며 말했다.

“잘 만났군. 너를 만나고 싶었다.”

“왜? 또 뒤지게 당하고 싶어서?”

이나가 피식 소리를 내며 대놓고 그림자를 비웃었다.

헌터 수용소에 묶이기 전, 그는 이나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을 아직 지니고 있는 그는 그날부터 계속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다.

그림자는 이나의 비웃음 소리에 검 손잡이를 꾹 쥐었다.

“그땐 방심해서 당했지만, 오늘은 기필코 너의 목숨을 가져가겠다.”

“너 바보야? 내가 어떤 던전을 공략하고 나왔는지 잊었어?”

그림자가 그녀를 밀어 넣은 던전은 S급. 그곳을 공략하고 나왔다면 필시 S급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그림자는 웃었다.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너야말로 주변에 보이는 게 없는지 묻고 싶군.”

“뭐?”

“이 정도 규모의 시체들을 조종할 정도면 내 보스의 등급이 무엇일 거라 생각하나?”

뜬금없는 물음에 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나는 곧 맥락을 파악하고 눈을 치켜떴다.

“너 설마…….”

“보스.”

그림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보스가 조종하고 있는 새 몬스터는 전대일과 대치 중이었지만 분명 듣고 있을 터였다.

그림자의 심장엔 그의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

“그 마법을 저에게도 사용해 주십시오.”

“진심? 스스로 써 달라고 하는 놈은 또 처음 보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이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목소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해골에게서 들려왔다.

그림자는 해골을 넘어 그를 지켜보고 있을 앤드류를 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제 앞에 있는 녀석을 꼭 없애고 싶습니다.”

이나는 가만히 있던 사람을 제가 먼저 죽이려고 했던 놈이 저런 말을 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림자는 해골을 응시했고, 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오케이. 이거 꽤 재밌겠는걸?”

목소리에 스며든 웃음소리가 꽤나 섬뜩했다.

그 순간 그림자의 심장 부근에서 붉은 빛이 발산되었다. 동시에 그림자의 고개가 푹 꺾였다.

이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조금 떨어져 그를 경계했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고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패치 완료, 라고 해야 하나?”

해골에게서 들렸던 그 목소리였다.

이나는 얼굴을 구겼다. 설마 놈이 자신의 보스에게 몸을 바칠 줄은 몰랐기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마찬가지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서준이 괜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봤자 이나 씨보다 낮은 등급의 헌터였습니다. 조종당한다고 해도 그뿐이에요. 이나 씨에게 해를 입히진 못할 겁니다.”

“꽤 비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봤자 일반인인가.”

그림자, 아니, 그를 조종하는 앤드류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무시당하게 된 서준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는 자기 할 말만 이어 나갔다.

“내 인형들의 장점이 뭔지 알아? 조종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야.”

“그게 뭐가 어쨌다는…….”

“고통을 느끼면 알게 모르게 주춤하고 망설이게 되지. 하지만 내 인형들은 그딴 거 없어.”

무언가를 눈치챈 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 반면 앤드류는 즐거운 듯 웃음을 흘렸다.

“고통을 모르고 달려드는 인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줄게.”

“네움!”

그림자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나는 급히 흙벽을 만들어 검을 방어했다.

하지만 검은 흙벽을 뚫고 아슬아슬하게 이나의 뺨을 스쳤다. 앤드류가 그림자의 근육을 한계치까지 끌어다 쓴 탓이었다.

이나는 뒤로 물러나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냈다. 서준이 제가 다 고통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나 씨, 괜찮아요?”

“네.”

이나가 짧게 대답했다. 곧바로 그림자가 공격해 오는 통에 더 길게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하늘로 날아오를까도 생각했지만 땅에 남아 있는 서준과 정재원이 걱정이었다. 게다가 위에선 전대일이 새 몬스터를 막고 있었다.

정말 까다로운 스킬이었다.

[이나 님!]

윈티의 다급한 외침에 이나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검이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네움이 흙으로 벽을 만들어 막아 주었지만 실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건물 위에는 이나 일행과 그림자뿐이었다. 단검을 던질 만한 이는 없었다.

그녀의 의문을 느낀 그림자가 히죽 웃었다.

“이놈의 스킬 중 하나야. 꽤 쓸 만하지?”

자세히 보니 단검 손잡이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희미한 실 같은 것이 보였다. 이나가 그것을 만지려 하자 실은 바로 사라졌다.

이나는 바닥에 툭 떨어진 단검을 주워 들고 중얼거렸다.

“어쌔신 계열이라더니. 귀찮은 스킬을 가지고 있네.”

“내가 부하 고르는 눈 하나는 좋지. 이놈은 내 부하 중에서도 뛰어난 편이었어.”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이나가 날 끝을 그림자에게 향했다.

“그래 봤자 나한텐 안 돼.”

“그러고 보니 실력이 꽤 좋은 것처럼 말했었지.”

아무래도 앤드류는 그녀의 등급만 대충 가늠하는 정도인 것 같았다.

그와 그림자가 죽이려고 했던 이가 그녀인 줄도 모르고.

그때의 기억을 아직 지니고 있는 이나가 비릿하게 웃었다.

“오늘 네 부하는 물론이고 너도 내 손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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