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들어가려는 겁니까?”
“왜요? 뭐 이상해요?”
이나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할 건 없었다. 그냥 비키니 위로 청바지와 흰 티셔츠를 걸쳤을 뿐이었다. 티셔츠는 아랫부분을 옆으로 묶어 고정시키기도 했다.
모두 수영복만 입기 민망해서 걸쳐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해 보였나 싶어 이나가 쳐다보자 시현이 서둘러 양손을 저었다.
“이상한 건 아니고, 옷이 젖으면 움직이기 불편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음. 그러려나요? 안에 수영복 입긴 했는데……. 벗는 게 나으려나.”
고민하던 이나가 티셔츠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현도 서준도 깜짝 놀라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왜요?”
“그냥 입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안에 수영복이에요.”
“그래도요.”
두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하자 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대로 다시 티셔츠를 내렸다.
시현과 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목 너머로 흘려보내며 생각했다.
‘제발 그게 자극적이라는 생각 좀 해 주십시오.’
‘이 자각 없는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모두 이나가 그들을 그저 사람, 혹은 친구로 보기에 생긴 일들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시현과 서준은 괜히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오. 드디어 나왔냐?”
마침 그들의 곁으로 돌아온 도하가 이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물 온도 어때요?”
“딱 좋아. 너도 얼른 들어와.”
이나는 호수의 물을 손으로 몇 번 휘적이고 난 뒤 발끝부터 차례대로 물에 담갔다.
그런데 그 모습이 꽤나 답답했는지 도하가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우왓……!”
풍덩-
시현과 서준이 깜짝 놀라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튀어 올랐던 물이 가라앉자 도하에게 안기다시피 한 이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른 채 이나는 도하를 올려다보며 핀잔을 주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끌어당기면 어떡해요?”
“별로 차갑지도 않은데 답답해서 그랬지. 어때? 괜찮지?”
“뭐, 그러네요.”
사실 조금 차가웠지만 도하의 체온 덕에 춥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나는 새삼 물속으로 비치는 그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몸은 엄청 좋네.’
적당히 탄 피부 위로 복근이 튀어나와 있었다. 손으로 쓸어 보고 싶을 만큼 탐나는 근육이었다.
호수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니 서준도 하와이안 셔츠 사이로 적당한 복근이 보였다. 시현도 보이지 않을 뿐이지 아마 복근이 있을 터였다.
‘관리들을 철저히 하시네.’
그녀 본인은 만사 귀찮아하는 타입인데 말이다.
왠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이나는 도하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리고 물이 튀어 화들짝 놀랐던 파인을 땅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넌 여기서 놀고 있어. 무슨 일 생기면 말해.”
[응!]
파인이 안심한 듯 꼬리를 좌우로 휙휙 흔들었다. 다른 정령들은 신나게 물에 뛰어들었다.
[와아! 물놀이다!]
[야호!]
마지막으로 볼트가 물 위로 점프했다.
[그럼 이 몸도……!]
“스톱.”
[엑!]
이나는 볼트가 물에 닿기 직전 볼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볼트가 손안에서 버둥거리자 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안 돼.”
[왜, 왜인가!]
“네가 들어가면 우리가 감전될 거 아냐.”
볼트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나는 볼트를 파인 옆에 내려놓았다.
“너도 파인이랑 여기 있어.”
[그런……! 안 돼애애애!]
볼트의 절규가 들렸지만 이나는 깔끔히 무시했다. 다른 정령들도 측은한 시선을 보낼 뿐, 이나의 편이었다.
[그런데 이나야, 집에서 가져온 이건 뭐야?]
리카가 텐트 안에서 튜브를 가져오며 물었다.
이나가 그것을 받아 들자 도하가 옆에서 물었다.
“튜브? 튜브는 왜?”
“전 수영하는 것보다 그냥 떠 있는 걸 좋아해서요.”
그것을 증명하듯 이나는 튜브 사이에 몸을 끼우고 물 위에 얌전히 떠올랐다. 정령들도 튜브 위에 올라탔다.
[알았다! 물 위에서 쓰는 소파구나!]
“비슷해.”
[와! 리카 대단해!]
정답(?)을 맞힌 리카가 날개를 으쓱했다. 다른 정령들이 그런 리카를 보며 박수를 짝짝 쳤다.
도하는 그 모습을 황당해하며 쳐다보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이나에게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뭘요?”
“수영 못 하지?”
뜨끔.
이나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그것을 본 도하가 낄낄 웃었다.
“뭐야. 진짜네!”
“수영 못 해도 이즈가 있어서 괜찮거든요?”
[맞아! 내가 있으니까 이나는 물에 안 빠져!]
이나와 이즈가 항변했지만 도하는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한참 웃던 그는 갑자기 이나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자.”
“손은 왜요?”
“잡으라고. 가르쳐 줄게, 수영.”
“됐어요. 이즈도 있는데 뭘…….”
“능력을 쓰는 거하고 스스로 헤엄치는 거하고는 느낌이 다르거든?”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이나 역시 몇 번 수영을 배워 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더랬다.
물론 그마저도 귀찮아서 안 했지만.
결심이 들었을 때 해야 한다고,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아서 이나는 튜브를 몸에서 빼고 도하의 손을 잡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맡겨 주시게, 제자.”
씩 웃은 도하가 이나를 위한 초보자용 수영 수업을 시작했다.
“손잡아 줄 테니까 몸에서 힘 빼 봐.”
그의 말대로 하자 몸이 두둥실 물 위로 떠올랐다. 그러자 도하의 말이 이어졌다.
“좋아. 그럼 이제 천천히 손을 놓아 볼게.”
이나는 벌써 손을 떼나 싶어 조금 긴장했지만 긴장은 곧 풀렸다. 여차하면 이즈가 구해 줄 거란 믿음 덕분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느낀 도하가 천천히 손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나는 도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물에 떴다.
도하는 물에 뜬 이나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발장구 쳐 봐.”
이나가 발장구를 치자 몸이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쭉 뻗은 손끝이 뭍에 닿았다.
이나는 땅 위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도하가 히죽 웃었다.
“잘했어. 처음인데 잘하네.”
이나는 어색하게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마치 생초보를 대하는 듯한 도하의 화법에 기분이 묘해진 것이었다.
도하는 그녀에게 다가와 다시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중간에 숨 쉬는 법을 알려 줄게. 숨이 찰 때는 말이야…….”
도하는 직접 시범을 보인 뒤에 이나를 가르쳤다. 물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진 이나는 도하의 지도를 곧잘 따라왔다.
시현과 서준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을 뭍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둘이 잘 노는군요.”
서준이 선베드 위에 누워 두 사람을, 정확히는 이나를 보며 말했다.
시현도 동감하며 맞장구쳤다.
“이나 씨가 잘 받아 주어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서준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어색한 정적 속에 갇혀 버렸다.
일 때문에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사적으로 함께 놀러 온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말을 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 이나가 두고 간 파인과 볼트가 서준이 누워 있는 선베드 위로 올라왔다. 두 정령은 서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본부장님은 같이 안 놀아?]
“저는 지금도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서준이 싱긋 웃으며 옆에 놓여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파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부장님 이나가 좋다며? 그럼 같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풉……!”
서준은 그만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정령들은 오직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같이 있으면 즐거움도 두 배, 라는 입장이었지만 서준은 달랐다.
정령들의 ‘좋아한다’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는 서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현도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좋아……합니까? 이나 씨를?”
“아니, 그…….”
서준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말을 고르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현이 가만히 바라보자 서준은 큼큼 헛기침을 내뱉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
시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가슴이 답답한데 그것을 말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사이 서준은 정령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심각한 얼굴의 시현이 보였다.
“천조 길드장님? 무슨 일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현의 떨떠름한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눈치 빠른 서준은 원인을 빠르게 캐치했다.
“혹시 제가 이나 씨를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까?”
“…….”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아까보다 더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 와중에 서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조 길드장께서도 이나 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군요.”
서준의 시선이 이나와 함께 있는 도하에게로 슬쩍 향했다.
“청호 길드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저는…….”
시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애매한 대답을 입 밖으로 내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나 씨에 대한 감정이 호감인지, 아니면 단순한 존경심인지.”
“이왕이면 존경심이었으면 좋겠군요. 아니면 쭉 몰라도 괜찮을 것 같고요.”
서준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눈빛에서는 경계심이 엿보였다.
“이나 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파인과 볼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속닥거렸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어렵구려.]
[동감이야.]
그때 이나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시현과 서준에게 외쳤다.
“두 사람은 안 들어와요? 물 엄청 시원한데!”
“이나 씨가 부르니 가겠습니다.”
안 들어갈 것처럼 굴던 서준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시현을 지나칠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주쳤다.
시현이 여전히 붙박이처럼 서 있자 결국 이나가 물에서 나와 그에게 다가왔다.
“이시현 헌터는 안 들어와요? 여기 계속 서 있으면 더울 텐데.”
“저는…….”
시현은 말끝을 흐리며 호수 앞에 서 있는 서준을 힐끗 보았다. 그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잠시 쥐었다 폈다 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옷 갈아입고 와요.”
“네.”
이나는 다시 놀기 위해 호수로 달려갔다. 시현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