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은 던전이 리셋되기 전과 똑같았다. 초원을 채운 가지각색의 꽃 몬스터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거대한 보스 몬스터 라플레인.
여전히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이나도 시현도 섣불리 꽃밭을 건드리지 않았다. 꽃의 잎이라도 건드렸다간 몬스터들이 깨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꽃밭으로 들어가려는 이한을 단단히 붙잡으며 이나에게 말했다.
“라플레인은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이나 씨는 여기서 오빠분과 함께…….”
“아뇨. 제가 갈 거예요.”
“네?”
“오빠는 이시현 헌터가 봐 주세요. 정령들도 몇 마리 두고 갈 테니까 여차하면 도움받고요.”
이나가 그의 앞에 척 서며 이를 까득 갈았다.
“저놈은 제가 해치워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요.”
이나의 뒷모습에서 살기 어린 오라가 느껴졌다. 시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우리 오빠 잘 부탁해요.”
이나는 그 말을 남기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시현에게 달려들 것을 대비해 그의 주변에 작은 흙벽을 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나는 리카, 파인, 윈티, 그리고 네움을 데리고 잠들어 있는 라플레인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네움, 전에 했던 거 기억하지? 부탁해.”
[…….]
이나의 오른쪽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네움이 땅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후, 땅에서 진동이 일더니 몬스터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키잇?”
“키이잇!”
몇몇 몬스터들이 이나를 발견하고 울었다. 하지만 높이 떠 있는 이나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런 몬스터들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합체였다.
[히익……! 이, 이나 님! 무서워요!]
겁을 집어먹은 윈티가 이나의 품 안에 비집고 들어갔다.
줄기와 꽃잎들이 얽히고설켜 몬스터들이 하나의 거대한 몬스터가 되었다. 보스 몬스터인 라플레인만큼이나 거대했지만 어디까지나 왕은 라플레인이라는 듯 거대해진 몬스터는 그 앞을 지키고 섰다.
합체한 몬스터가 이나를 향해 뾰족하게 만든 줄기를 뻗어 왔다. 하지만 그 줄기가 이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쿠구구구-
때마침 땅이 크게 진동하며 거대한 흙벽이 몬스터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탓에 공격도 벽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키이잇!”
분하다는 듯 몬스터가 울었지만 이미 끝난 일에 계속 미련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흙벽이 차례대로 세워져 퇴로를 막아 버린 것이었다.
겉보기엔 전과 같은 벽이었지만 이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쿠르르르-
흙벽 꼭대기에서 흙이 움직이더니 천장을 만들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오갈 수 있었던 길이 막혀 버린 것이었다.
하늘이 막혀 버린 흙벽 안은 깜깜했다. 몬스터가 이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괜한 수고였다.
몬스터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온 이나가 파인의 불을 이용해 흙벽 안을 밝혔다.
“날 찾고 있었어?”
“키이잇!”
거대한 몬스터는 섣불리 이나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나를 없앨 수 없다는 걸 안 것이었다.
그런 몬스터가 선택한 방법은 한 가지였다.
“역시 스스로 보스의 양분이 되는구나.”
예상하고 있던 이나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기다렸다고.”
이 순간만을 기다린 이나가 씨익 웃었다.
자고로 화풀이용 샌드백은 단단해야지 칠 맛이 나는 거였다.
“키이잇.”
부하를 흡수해 깨어난 보스 몬스터 라플레인이 공중에 떠 있는 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나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라플레인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공간에 불빛 하나만이 덜렁 있었다. 그 빛에 비친 이나의 미소는 평소보다 한층 더 사악해 보였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마치 복싱장에 울려 퍼지는 벨 소리처럼 이나가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거의 동시에 라플레인이 움직였다.
쾅!
이나를 향해 쏜 라플레인의 줄기가 흙벽에 부딪쳤다. 사람에게 부딪쳤다면 뼈가 아작 났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흡수한 몬스터의 양이 꽤 되는지 라플레인의 힘은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이나는 흙벽을 뚫은 라플레인의 줄기를 힐끗 보며 말했다.
“뭐, 좀 세지긴 한 모양인데.”
라플레인을 돌아본 얼굴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래도 여기선 나한테 안 돼.”
“키잇!”
콰과각-
흙벽을 들이받은 라플레인의 줄기가 그대로 이나를 향해 움직였다. 이나는 가뿐히 피했지만 그녀가 날아든 그곳에 또 다른 줄기가 뻗쳐 왔다.
공격하고, 피하고, 공격하고, 피하고. 이나는 요리조리 피하며 라플레인을 약 올렸다.
그러자 결국 라플레인도 폭발하고 말았다.
“키에에엑!”
라플레인의 양팔이 여러 갈래의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이나에게 날렸다.
쾅! 콰광! 쾅!
줄기가 차례대로 흙벽에 꽂혔다. 다만 그 끝에 이나가 꽂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꽤 많은 수였기에 전부 무사히 피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나 님, 뒤요!]
윈티의 외침과 함께 리카가 이나의 몸을 홱 틀었다. 그 순간 이나의 뺨이 무언가에 베였다.
흙벽에 꽂혀 있던 줄기가 주인에게로 돌아가며 이나를 공격하려 한 것이었다.
[이나야, 괜찮아?]
“괜찮아.”
이나는 걱정스럽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정령들을 안심시킨 뒤 뺨을 문질렀다. 맺혀 있던 피가 손에 묻어 나왔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서서히 분노가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오빠를 신발도 없이 끌고 오려 했던 게 너였지? 덕분에 오빠 발이 엉망이 됐어.”
“키잇.”
라플레인이 비웃는 것처럼 짧게 울었다. 그에 이나가 건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표피를 벗겨 주마.”
이나에게서 묘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느낀 라플레인이 재차 공격 태세를 취했다.
자신을 향해 줄기를 뻗치는 라플레인을 보며 이나가 정령들에게 물었다.
“너희 힘을 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지? 오늘 다 해 보자.”
[진짜?]
[정말요?]
“그래.”
날아오는 줄기를 피하며 이나가 리카를 불렀다.
“먼저 리카. 이 줄기들을 전부 잘라 버려. 그리고 라플레인의 양팔도.”
[잘라 버린다!]
신난 리카가 이나의 마나를 끌어 들여 라플레인의 줄기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끝내는 어깻죽지마저 통째로 잘라 버리자 라플레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키에에엑!”
순식간에 양팔을 잃은 라플레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본게임은 이제부터였다.
“윈티, 저 녀석의 팔이 재생하지 못하게 어깻죽지를 얼려 버려.”
[맡겨 주세요……!]
윈티가 허공에서 얼음의 창을 만들어 내 라플레인에게 날렸다. 창이 닿은 그녀의 어깻죽지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키이이……!”
“파인.”
[알고 있어!]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신난 파인이 라플레인의 밑에서부터 불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리 센 불은 아니었다. 라플레인은 말 그대로 서서히 익어 가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라플레인의 어깻죽지에 붙은 얼음은 녹지도 떨어지지도 않았다.
얼음과 불. 라플레인은 식물형 몬스터에겐 극악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속성의 공격에 천천히 고문당하는 중이었다.
“키이이익! 키에에엑!”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라플레인을 보던 리카가 이나에게 다가왔다.
[이나야, 이제 화가 좀 풀렸어?]
“조금.”
이나도 서서히 무너지는 라플레인을 보며 대답했다.
이건 단순한 화풀이였다. 이한을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한.
‘역시 나도 좋은 사람은 못 되네.’
그렇게 생각하며 이나가 한숨을 살짝 내쉴 때였다. 라플레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이나야, 저 몬스터 몸이 막 부풀어 오르고 있어!]
“보고 있어. 뭘 하려는 거지?”
이나가 눈살을 찡그리며 라플레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라플레인이 히죽 웃었다.
퍼엉!
그것이 라플레인의 마지막 미소였다.
***
촤악-
“47.”
“키에엑!”
시현의 검에 베인 47번째 몬스터의 몸통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에 멈추지 않고 시현은 놈의 뿌리까지 완벽하게 없앴다.
치지직-
“키이…….”
[하하! 난 이걸로 48번째네!]
볼트도 이나가 함께 두고 간 마정석을 먹고 몬스터를 해치웠다. 어깨를 으쓱하는 원숭이 정령을 보며 시현은 픽 웃음을 흘렸다.
두 인간과 정령은 누가 몬스터를 더 많이 해치우나 내기 중이었다. 시간은 이나가 돌아올 때까지.
그래도 지능이 아예 없는 놈들은 아닌지 앞서 달려들던 동료들이 당하기만 하자 다른 몬스터들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시현은 숨을 고르며 멀리 세워져 있는 흙벽을 응시했다.
“괜찮은 건가.”
혼자서도 괜찮다곤 했지만 막상 이나를 홀로 보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늘 모두의 앞에 서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도 이러고 있으니 이나가 했던 말이 더욱 와닿았다.
“당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요.”
그것을 몸소 겪고 있으니 함께 싸웠던 동료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었다.
그리고 이나에게도.
시현이 이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사이 두 마리의 몬스터를 더 해치운 볼트가 말했다.
[계약자는 괜찮네! 그야 내 계약자가 될 인간이니까!]
“그렇군요.”
나지막하게 웃던 시현이 다시 내기에 집중하려 할 때였다.
털썩-
“이런……!”
급하게 고개를 돌려 보자 나무와 연결해 놓았던 이한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시현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냥 기절한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왜……?”
[이보게! 저기 좀 보게!]
볼트가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흙벽이 있는 쪽이었다.
시현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굉음이 울려 퍼졌다.
퍼엉!
“무슨……?”
시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굉음과 동시에 꽃밭의 몬스터들이 전부 시들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띠링!
⌜A급 던전 ‘공포의 꽃밭’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1SP를 획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