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49)

“천해진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이나가 해진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아저씨도 그녀의 시선을 눈으로 좇았다.

“볼일이라 하심은…….”

“힐러에게 볼일이 뭐가 있겠어요. 당연히 의뢰죠.”

아저씨의 얼굴이 곤란하다는 듯 변했다. 그도 해진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나는 애써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있어요. 수아 씨한테 들었거든요.”

“……혹시 해진이에게 맡길 의뢰 내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저라도 도울 수 있다면 꼭 돕고 싶습니다.”

이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려 줘도 상관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저희 오빠가 A급 몬스터의 독에 당했어요. 근데 이번에 처음 나타난 던전의 몬스터라 해독 방법을 전혀 모르겠어요.”

상황을 되새길수록 초조함이 밀려왔다. 잠시 진정하기 위해 이나가 크게 심호흡을 하는데 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상급 힐러를 찾아가기엔 상황이 여의치 못해요. 그래서 천해진 씨를 찾아온 거예요. 천해진 씨는 그나마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내가 터무니없는 거라도 바라면 어쩌려고요?”

“상관없어요. 의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던전 부산물이 필요한 거라면 제가 던전에 들어가서라도 얻어낼게요.”

이나의 눈빛은 결연했다. 아저씨와 이수아조차도 간절하게 해진을 바라볼 정도였다.

저에게 향하는 시선들을 보고 있자니 해진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해독 포션을 만들려면 독이 필요해요. 몬스터에게서 뽑아낸 독이.”

이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말은 제 의뢰를 들어주겠다는 건가요?”

“제 가족을 구해 줬으니 이 정도는 해야죠. 문제는 집 구석에서 해독 포션을 만들 순 없으니 연구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해진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옆에서 이수아가 빙긋 웃었다.

“집 구석에서 쓰레기처럼 사는 것보단 연구소로 돌아가는 게 낫지, 오빠.”

“……수아야, 그 말 꽤 아픈데.”

“아프라고 하는 소리야.”

해진이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얼른 가서 독을 구해 와야겠네요.”

“근데 어떻게 구해 오려고요? 설마 A급 던전에 들어가려고요?”

“아니면 어떻게 구해요?”

해진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변했다. 이나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곧바로 던전으로 가려 했다.

그런 이나의 앞을 해진이 가로막았다.

“그 전에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등급이 뭡니까?”

“그건 왜 물어요?”

“아무리 나라도 낮은 등급의 헌터를 A급 던전으로 밀어 넣어서 송장을 만드는 취미는 없어서요.”

이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사이 해진이 중얼거렸다.

“C급 이하가 삼촌이 부탁했다는 ‘얼음 여왕의 눈물’을 구해다 줬을 리는 없고. 그럼 B급 이상은 된다는 소린데…….”

“…….”

“B급입니까?”

“…….”

“그럼 A급?”

“…….”

“……설마 S급?”

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해진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전부 침묵으로 답하는 걸 보면 다 아닌 거예요?”

정확했다. 하지만 이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다행이게도 L급이라는 등급을 생각할 수는 없었는지 해진이 반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등급이 낮은 모양이네요. 그런 사람을 A급 던전으로 보낼 수는 없어요.”

“그럼 어떡하라고요?”

답답해진 이나가 물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해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 이번에 처음 나타났다고 했죠?”

“네.”

“그럼 분명 던전 안을 탐사할 탐사대가 꾸려질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부탁하려고요?”

“던전 부산물은 던전을 공략한 사람들끼리 나누게 돼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부탁하려면 돈이 들잖아요. 보아하니 돈은 없는 것 같으니 우린 돈이 안 드는 방향으로 가죠.”

“돈이 안 드는 방향?”

“당신과 내가 탐사대에 끼어서 직접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뜻밖의 말에 이나는 물론, 그의 가족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도 던전에 들어간다고?”

“A급 던전 탐사대에 낮은 등급의 헌터를 끼워 줄 리는 없으니까.”

“그러는 천해진 씨도 B급이잖아요?”

이나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해진은 어깨를 쫙 폈다.

“그쪽과 난 다르죠. 난 천해진이라고요. 내가 독 연구를 위해 들어가겠다고 하면 오히려 환영할걸요? 그리고 그런 내가 당신을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도 조수가 필요하다고 하면 반박 못 하겠죠.”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조금 꼴불견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것이 최선인 듯했다.

지난번 A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도 이나는 시현과 함께 던전을 공략했다. 게다가 시현이 공략 루트를 알고 있었기에 쉽게 나올 수 있기도 했다.

만약 그녀 혼자 A급 던전에 들어간다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탐사대와 함께한다면 오히려 이득이었다.

고민을 마친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

해진이 준비를 하는 동안 이나는 출근하거나 이한을 간호하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드디어 해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오후 2시.]

짧은 메시지였지만 이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내일 오후 두 시에 새 A급 던전 탐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이나는 미리 일을 끝내 놓고 다음 날 모자와 마스크를 뒤집어쓴 뒤 A급 던전 게이트 앞으로 향했다.

과연 새로운 A급 던전 탐사라는 이슈답게 근처에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게이트 앞에 몰려 있는 헌터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미는 기자들을 보며 정령들이 물었다.

[이나야, 사람들이 들고 있는 저거 뭐야? 막 번쩍거려!]

[크흠! 그래도 내 번개보다는 덜 번쩍거리는군.]

이나는 카메라에 대해 대충 설명해 준 뒤 기자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기자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의아해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이나가 게이트 앞에 모인 헌터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발생했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탐사대 일원인지 잔뜩 무장한 헌터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하고 막아섰다.

이나는 모자를 더욱 눌러쓰며 대답했다.

“저도 탐사대 일원인데요.”

“네?”

헌터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나는 무기도 없었고, 자기 몸을 방어할 만한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결국 그가 물었다.

“어느 길드에서 나오셨습니까?”

“무소속이에요.”

“무소속……? 그럼 헌터증 좀 보여 주시죠.”

이나는 미간을 좁혔다. 보여 줄 헌터증도 없지만 그가 귀찮다는 듯 대놓고 무시하는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실랑이로 인해 기자들의 시선도 하나둘 그들에게 향했다. 이건 좋지 않았다.

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해진 헌터를 불러 주세요.”

“왜 갑자기 딴소리예요? 헌터증 보여 달라니까요?”

“제 신분은 천해진 헌터가 보증해 줄 거예요.”

그가 의심이 담긴 눈으로 이나를 훑어보았다. 이나가 재차 해진을 불러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왔네.”

때마침 그녀를 발견한 해진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유명 인사가 나타나자 기자들의 카메라가 그를 향했다. 해진은 곳곳에서 터지는 빛을 무시한 채 이나에게 말했다.

“얼른 와요. 곧 던전 안으로 들어간대요.”

“그러죠.”

어깨를 으쓱한 이나가 그녀를 막았던 헌터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나와 해진을 멍하니 번갈아 보기만 할 뿐, 붙잡지는 못했다.

한때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헌터 천해진이 보증한 이나였다. 그녀를 막을 권한은 그에게 없었다.

게이트 근처로 가자 몇몇 헌터들이 이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해진이 데려온 이나에게 호기심이 인 모양이었다.

동시에 숙덕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저 사람이 천해진 헌터가 데려온 헌터인가?”

“A급 던전에 들어가는데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야?”

숙덕거리는 목소리에서 이나를 향한 걱정과 언짢음이 느껴졌다.

이나는 살짝 내려간 마스크를 올려 쓰며 해진에게 말했다.

“천해진 씨가 유명하긴 한가 봐요. 이렇게 저한테 쏟아지는 시선이 많은 걸 보면.”

“그건 유이나 씨가 너무 태연하게 와서 그렇거든요? A급 던전에 들어가는데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기본적인 방어구가 하나도 없잖아요.”

모두가 지켜 줄 힐러인 해진도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옷 안에 방어구를 착용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나는 말 그대로 방어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잔소리에 이나가 귀를 막았다. 결국 해진도 포기했다.

그때 귀를 막은 손을 뚫고 들어온 목소리가 있었다.

“슬슬 탐사를 시작하도록 하죠.”

이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를 못 느낀 해진이 태연하게 어딘가를 보며 말했다.

“이번 탐사는 천조 길드를 중심으로 행해진대요. 던전 등급이 높은 만큼 천조 길드장이 직접 지휘하고요.”

이나의 시선도 해진과 같은 곳을 향했다.

그곳엔 시현이 떡하니 서 있었다.

“어어. 뭐 해요?”

해진이 제 뒤에 숨는 이나를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나는 다급히 그의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저 좀 숨겨 줘요.”

“뭐요?”

“저 좀 지켜 달라고요!”

해진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힐러인 그에게 숨겨 달라거나 지켜 달라고 하는 사람은 이나가 유일할 거라고 생각하며.

그러든 말든 이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해진 너머에 있는 시현을 쳐다보았다.

‘들키면 어떤 잔소리가 쏟아질지 몰라.’

어쩌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고 협회에 그녀의 정체를 알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이 사람 뒤에 숨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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