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 주시게, 계약자!]
볼트가 이나의 어깨 위에 올라타 단숨에 마나를 빨아들였다. 호쾌한 성격만큼 거침없는 속도였다.
이나가 째려보자 볼트는 그제야 마나 흡수를 멈추었다.
[크, 크흠! 그럼 어디 실력 발휘 좀 해 보실까!]
볼트의 꼬리가 쭈뼛 섰다. 동시에 라이어트가 이나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이나에게 발톱이 닿는 일은 없었다.
콰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라이어트의 앞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때마침 놈이 피한 탓에 명중시키진 못했지만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아쉽군! 사자 통구이로 만들 수 있었는데!]
“너…….”
이나가 허공에 떠 있는 볼트를 손으로 덥석 잡았다.
의아해하는 얼굴로 이나를 올려다보는 볼트에게 이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실속이 없잖아, 실속이! 마나를 그만큼 가져갔으면서 정작 명중을 못 시켜서 마나를 낭비해?”
[아, 아직 힘이 조금 남았…….]
“됐고. 너 아웃.”
[이, 이보게, 계약자!]
이나는 매달려 오는 볼트를 무시하고 라이어트를 바라보았다. 라이어트는 방금 공격을 위협적으로 느꼈는지 몸을 낮추고 경계하고 있었다.
저렇게 되면 곤란했다. 짐승이 온 신경을 깨운 상태에서는 공격을 맞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빈틈을 만들어야지.”
중얼거린 이나가 이즈를 힐끗 보며 명령했다.
“이즈, 바닥에 물을 뿌려.”
[응?]
이나의 속셈을 눈치 못 챈 이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명령을 따랐다.
잠시 후 바닥은 비가 한바탕 쏟아진 것처럼 흥건해졌다. 안 그래도 열대 기후라 습했던 공기가 더욱 물기를 머금었다.
보스 몬스터 라이어트도 이나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눈치 못 챘기에 라이어트는 이나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크엉!”
축축한 땅을 박차며 라이어트가 이나를 물어뜯을 듯이 달려왔다. 그 틈에 이나는 윈티를 쳐다보았다.
“윈티, 땅을 얼……!”
퍽!
때마침 둔탁한 소리가 들려 이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데 눈앞에 있어야 할 라이어트는 저 멀리 날아간 상태고 웬 엉뚱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휴우. 아슬아슬했네.”
“백도하 씨?”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돌린 도하가 이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내가 너 살렸다.”
“아니, 그…….”
이나는 차마 거기다 대고 사실은 이즈와 윈티를 이용해 땅을 얼리려고 했고, 빈틈이 생긴 라이어트를 해치우려 했다,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입을 달싹이다 떨떠름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해요.”
“뭘.”
“크릉.”
도하와 함께 온 아란이 저를 봐 달라는 듯 작게 울었다. 이나가 아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너도 고마워.”
“크릉!”
사이좋은 이나와 아란을 바라보던 도하가 입을 열었다.
“아란이 네 냄새를 쫓아 여기까지 날 데려왔어.”
“그랬구나.”
“그보다.”
도하가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웬 사람을 이나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를 본 이나가 눈을 치켜떴다.
게이트 앞에서 헤어진 에덴 길드의 강철호였다.
다만 헤어지기 전과 달리 지금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특히 오른쪽 다리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었다.
대신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 같은 상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하가 인벤토리에서 그의 주 무기인 언월도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걔 좀 데리고 있어. 난 저 사자 놈 잡아야 하니까.”
“도하 씨, 이 사람은…….”
“알아.”
도하의 눈빛을 본 이나가 멈칫했다. 아무래도 강철호가 아란에게 포박 아이템을 썼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하가 담담하지만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쓰러진 강철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밖으로 나가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동조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상황을 주시하던 라이어트가 도하의 언월도를 보고 위협적으로 울었다.
“크르릉…….”
“어쭈. 감히 누굴 보고 으르렁대?”
그제야 사냥감에게로 시선을 돌린 도하가 픽 웃었다.
겉보기엔 여유가 넘쳐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해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쩌면 그래서 그가 길드장으로서 부하들을 통솔할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도하가 이나를 제 뒤편에 두고 라이어트를 향해 걸어갔다. 휘릭 돌려진 언월도의 날 끝이 라이어트를 향했다.
“덤벼.”
“크워어어!”
라이어트가 고개를 쳐들고 목청껏 울어 젖혔다. 하지만 그뿐, 아까처럼 도하에게 달려들거나 하진 않았다.
“뭐지?”
어쩐지 불길한 기분에 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하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라이어트의 뒤쪽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건…….”
이나는 눈을 치켜떴다. 숲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었다.
10, 20, 30……. 수는 점점 많아졌다. 그럴수록 이나와 도하 두 사람에게는 상황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몬스터였다. 정글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보스 몬스터 라이어트의 울음소리에 응답해 나타난 것이었다.
가히 몬스터 군대라고 불려도 될 정도의 수였다.
[이나야, 저기!]
정령들이 다급한 손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뒤쪽에서도 짐승형 몬스터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나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포위됐네.”
어쩐다. 여기서 정체를 밝히고 도와줘야 하나?
사실 도하 혼자 그녀를 지키며 이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눈앞에 보스 몬스터가 있고, 도하의 몸은 하나였으니까.
이나가 안 되겠다 싶어 몸 안의 마나를 끌어 올리려고 하는데.
“아란.”
“크릉.”
도하가 옆에 있는 아란에게 눈짓하자 아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나에게 달려왔다.
“네가 여길 왜 와?”
옆에서 도하를 도와줘야 할 아란이 자신에게 오자 이나는 당황해서 도하 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눈앞에 불길이 화악 치솟아 올랐다.
“우왓……!”
[와! 불이다!]
정령들의 외침처럼 눈앞을, 정확히는 이나의 주변을 낮은 불기둥이 감쌌다. 그것도 푸른 불기둥이.
아란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도하의 길드가 ‘청호(靑虎)’ 길드라 불리는 이유이자 아란이 길드의 마스코트가 된 이유였다.
스쳐지나가듯이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본격적인 불꽃은 처음이었기에 이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엄청난데?”
“크릉!”
아란이 마치 ‘봤지?’ 하는 느낌으로 콧김을 세게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대단하다, 아란.”
[우우……. 이나야, 내 불꽃보다 저 푸르딩딩한 불꽃이 더 좋아?]
이나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파인이 질투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나는 손가락으로 파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연히 나한테는 네 불꽃이 더 쓸모가 많지.”
[그치?]
금세 토라진 게 풀렸는지 파인이 헤헤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란의 능력도 꽤나 볼만했기에 이나는 푸른 불기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크워어엉!”
때마침 라이어트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정글을 울렸다.
이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몬스터 웨이브. 그 말 그대로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광경이 꽤 위협적이어서 이나는 침을 조금 삼켰다.
‘도하 씨는?’
이나는 도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이나는 제가 한 걱정이 쓸데없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콰가가각!
도하의 언월도가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베었다.
단순히 베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상대하면서도 정확히 급소를 노려 치명상을 입혔다.
그 탓에 쓰러진 몬스터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도하는 몬스터들 틈에 숨은 라이어트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뒤로 움직이지 못하는 몬스터들이 점점 쌓여 갔다.
이쯤 되니 정글의 몬스터들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저쪽은 걱정 없겠네.”
한시름 놓은 이나가 픽 웃으며 제 앞을 보았다.
아란의 불기둥이 효과가 있는지 몬스터들은 불기둥 근처를 배회하며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불기둥을 뛰어넘어 들어오려는 놈이 있으면 아란이 사납게 물어뜯었다.
‘이대로면 쉽게 공략하겠는걸.’
사실 라이어트가 몬스터들을 불러내지만 않았어도 더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나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좀 더 기꺼웠다.
“도하 씨도 멀리 떨어져 있겠다.”
도하 쪽을 힐끗 본 이나가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들을 향했다.
“나도 마정석이나 좀 챙겨 볼까?”
***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도하의 캠페인 촬영을 맡은 PD는 초조한 얼굴로 한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 끝엔 에덴 길드원들이 지키고 서 있는 게이트가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바람에 결계가 허물어져 일반인들의 통제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저 안에는 그가 알고 있기로 도하만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어떡하죠, PD님? 설마 안에서 잘못된 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버럭 외쳤지만 그 또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터진 던전은 B급 던전이었다. S급 헌터인 도하라면 얼른 공략하고 나올.
그런데 한참 나오질 않으니 괜히 걱정이 들었다.
“어? 게이트가 열렸어요!”
누군가의 외침에 그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열린 게이트 너머로 누군가가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도하였다.
“하필 안이 정글일 게 뭐람. 한참 헤맸네.”
“백도하 씨, 무사하셨……!”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가던 PD는 같이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경악했다.
“아니, 유이나 씨? 왜, 왜 같이 나와요?”
“아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나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때 아란이 몸을 털어 등에 들쳐 메고 있던 강철호를 바닥에 떨구었다.
“아니, 강철호 헌터?”
“세상에……! 상처 좀 봐! 여기 힐러 좀 불러 줘요!”
그를 본 에덴 길드원들이 서둘러 그를 데려가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나가 도하에게 물었다.
“아까 가만 안 둘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깨어 있을 때 얘기지. 지금 상황에서는 왜 그랬냐고 탈탈 털어 봤자지.”
“그것도 그러네요.”
이나가 픽 웃음을 흘렸다. 도하가 그런 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괜찮아?”
“네?”
“일반인이 던전에서 몬스터 웨이브에 휘말렸는데, 충격이라도 받은 거 아냐?”
담담하게 물었지만 그 속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이 깔려 있었다.
눈을 깜빡이던 이나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괜찮아요. 도하 씨가 구해 줬잖아요.”
이나로서는 오히려 마정석도 꽤 챙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 사실을 모르는 도하는 이나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보며 마주 웃었다.
“다행이네.”
PD가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웃고 있는 두 사람을 기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든 말든 이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이 사실이 오빠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이미 듣고 게이트 앞에 있을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이한이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하고 있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위로 뜬 것은 이한의 이름이었다.
이나는 뜨끔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오빠? 무슨 일이야? 나 아무 일도 없었…….”
[여보세요? 이나 씨? 이나 씨인가요?]
그런데 스피커 너머에서 들린 것은 이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쎄한 기분을 느낀 이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우림 씨? 이건 오빠 핸드폰인데…….”
[이나 씨, 지금 바로 병원에 와 줄 수 있나요?]
“병원이요?”
[그게…… 팀장님께서……!]
상황을 전하는 김우림의 목소리가 떨렸다. 듣는 이나의 얼굴은 굳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