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이나는 한 기억을 떠올리고 말했다.
“그런 테스트 안 해도 돼요.”
“무슨…….”
“월요일에 이미 그런 테스트를 해 봤거든요.”
시현이 눈을 치켜떴다. 이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월요일에 어떤 일 때문에 헌터 협회 사람들이 저희 회사로 찾아왔어요.”
“협회에서 말입니까?”
“네. 그때 각성자 테스트도 했고요. 결과는 각성자가 아니다, 였어요. 의심된다면 협회에 한번 물어보세요. 아무튼 저는 아니에요. 하루 만에 각성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시현이 얼굴에 복잡한 빛을 띠었다.
“그럼 대체 누가…….”
“그거야 저도 모르죠.”
“혹시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 못 봤습니까?”
“못 봤어요. 그땐 몬스터에게 끌려가던 상태라 정신이 없어서.”
그러면서 은근슬쩍 손을 떨어 주자 시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 같군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았다. 이 모든 게 시현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으니까.
오히려 그를 속이려니 그녀의 양심이 괜찮지가 않았다.
[흐엥……. 이나야, 겁먹지 마! 내가 지켜 줄게!]
[나도 지켜 줄게!]
‘너희는 왜 속니?’
정령들의 말에 황당해졌지만 이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자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이 말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나 씨가 이 일에 연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만 가 보셔도 좋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이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냉큼 일어났다.
얼른 카페를 나온 이나는 여전히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시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나는 다시 허리를 쫙 펴고 걸음을 옮겼다.
[이나야, 우리 이제 어디 가?]
“어디 가긴.”
이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몬스터 잡으러 가야지.”
***
‘내가 괜한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건가.’
홀로 남은 시현은 몬스터 시체에 대한 서류를 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미심쩍기는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닐지도 몰랐다. 그냥 어떤 뛰어난 헌터가 잠깐 도와주고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한참 서류를 보던 시현은 그것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래. 덮자.’
이미 한 사람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면 된 일이었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네. 이시현입니다.”
[천조 길드장님, 혹시 지금 천조 길드에서 당산동으로 출동 가능하십니까?]
“무슨 일인가요?”
[당산동 B급 던전에서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미간을 좁힌 시현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예? 길드장님께서 직접이요?]
“B급 던전이면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마침 근처라서요.”
머리도 식힐 겸 가볍게 갔다 오기 좋을 것 같았다.
시현이 직접 가겠다고 나서자 상대방이 안심하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시현은 곧바로 당산의 B급 던전으로 향했다.
***
이나는 결계가 드리워진 게이트 앞에 척 섰다.
“오늘은 여기를 공략해 볼까.”
오면서 사 온 풍선껌을 푸우 불어 터뜨리는 사이 정령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여긴 무슨 등급이야?]
“B급.”
[여기도 어제처럼 몬스터가 나와?]
“그렇겠지.”
[와아! 다 날려 버리자!]
리카가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이나는 날개를 펄럭이는 리카를 보며 말했다.
“방심하지 마. 여긴 B급 던전이니까. 어제 들어갔던 곳들보다 더 어려울 거야.”
[하지만 우린 C급도 무사히 공략했는걸!]
“그건 그렇지만.”
사실 리카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이나 본인 또한 그렇게 긴장되지 않았다.
그야 리카의 말대로 C급 던전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공략했으니까.
아무리 B급이라지만 C급에 비해 얼마나 높겠냐는 마음이었다.
‘칭호가 울겠네, 울겠어.’
F급 던전에서 얻은 ‘방심하지 않는 자’ 칭호가 무색해지는 마음가짐이었다.
멋쩍게 뺨을 긁적이던 이나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자, 그럼 들어가자.”
[네에!]
이나와 정령들은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쑤욱 넣었다. 그러자 어제처럼 몸이 던전 안으로 이동했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감쌌다.
“……추워!”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설원이었다. 그것도 아무것도 없는. 아니, 눈만 가득한.
초여름 복장으로 설원에 던져진 이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이나야, 괜찮아?]
“안 괜찮아. 이러다 동상 걸리겠네.”
이나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발목까지 눈에 푹 잠겨 있었다.
그때 리카가 날개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이나야, 어제 그거 있잖아.]
“어제? 아.”
무언가를 떠올린 이나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인벤토리 한 칸을 채우고 있던 무언가를 쑤욱 꺼내 어깨에 덮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어젯밤 C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고 받은 보상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걸치고 있던 곰 가죽.
가죽은 그녀의 몸보다 훨씬 컸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았다. 가죽을 둘둘 둘러매고 나니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후우. 훨씬 낫네.”
[다행이다. 근데 여긴 왜 몬스터가 없어?]
“나오겠지. 일단…….”
얼굴을 때리는 눈보라에 얼굴을 찌푸리던 이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 동굴이 보였다. 이런 눈보라 치는 환경에서는 제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으니 차라리 저 동굴 안에서 싸우는 편이 이득일 듯했다.
이나는 눈길을 헤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만 피했을 뿐인데 훨씬 편했다.
이나는 눈보라가 훨씬 심해진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긴 뭐가 나오려나.”
그녀가 헌터 등록을 했다면 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리카, 바깥으로 가서 주변 탐색을…….”
끼긱-
그때 소름 끼치는 소리가 동굴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안쪽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뭐야. 몬스터가 여기 있었잖아?”
이나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밖으로 나가야 하나 고민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포위됐네.”
얼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골렘들이 눈 밑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들은 손바닥만 해서 처리할 만했다. 문제는 눈앞의 몬스터였다.
“쿠어어어…….”
성인 남자 네 명은 쌓아놓은 것 같은 크기의 얼음 골렘이 눈앞에 있었다. 골렘이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바닥이 쿵, 울렸다.
이나는 혀를 쯧 차며 중얼거렸다.
“동굴은 함정이었구나.”
반면 처음 보는 거대한 몬스터에 정령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어제 봤던 보스 몬스터보다 크다!]
[게다가 전부 얼음이야!]
말하는 어투에서 긴장이라곤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이나도 두려움보다는 난감한 마음이 더 컸다.
‘칭호 효과로 두려운 마음이 줄어든 건가?’
이유야 어찌 됐든 두려운 마음이 사라져 머리가 잘 굴러갔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물과 바람이야.’
불의 정령이 있었다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어제처럼 익사시킬 수도 없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골렘이 익사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나마 지금 쓸모 있는 능력은 바람인가.’
고민하던 이나는 리카에게 명령했다.
“리카, 바람을 응집시킬 수 있겠어?”
[바람을?]
“창날처럼 최대한 가늘고 뾰족하게. 그걸 골렘에게 날려 버리면…… 윽!”
그때 무언가가 이나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고개를 돌리자 등 뒤에서 다가오던 얼음 골렘들이 그녀에게 하나둘 매달리고 있었다.
[이나야!]
“난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말한 대로 해 봐!”
같은 골렘이지만 크기는 훨씬 작았다. 주먹으로 퍽 쳐 내면 떨어질 정도였다.
문제는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이러다간 앞의 골렘에게 당하든 뒤의 골렘들에게 파묻혀 죽든 할 것 같았다.
그때 바람 소리가 들려 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바람이 한곳에 서서히 뭉쳐지고 있었다.
[가늘고 뾰족하게, 가늘고 뾰족하게…….]
리카가 집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리카의 외침과 함께 바람이 거대한 골렘을 향해 날아갔다.
[가늘고 뾰족하게!]
텅!
큰 소리가 나며 바람의 창이 골렘에게 부딪쳤다.
하지만 골렘은 비틀거리기만 할 뿐 몸에는 큰 흠집이 생기지 않았다.
거기다 방금 공격으로 힘을 꽤 쓴 건지 리카의 몸이 3분의 1가량 줄어들었다.
[후에엥……. 이나야, 어떡해?]
“역시 바람만으론 무리인가…….”
귀찮게 됐다. 게다가 방금 그 공격이 오히려 화만 돋웠는지 골렘이 괴성을 질렀다.
“쿠어어어!”
[이나야!]
이즈와 리카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나는 그사이에도 자꾸 몸에 들러붙는 작은 골렘들을 손으로 떼어 내고 있었다.
‘젠장. 이럴 때 총이라도 있었음 반항이라도 해 보는 건데.’
팔에 들러붙은 골렘을 떼어 내 던지던 이나가 멈칫했다.
‘잠깐. 총?’
손에서 버둥거리는 골렘을 빤히 보던 이나가 씨익 웃었다.
“리카, 아까처럼 공기를 압축시켜서 한 번에 쏠 수 있겠어?”
[응? 할 수는 있지만…….]
“그럼 이걸 던져 줄 테니까, 저 골렘을 향해 있는 힘껏 쏴 버려.”
이나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골렘의 심장 부근을 보며 말했다.
“정확히 한 지점만 노려서.”
[아, 알았어!]
“그럼 간다!”
이나는 손에 쥐고 있던 골렘 한 마리를 허공에 던졌다.
“일단 한 놈!”
탕!
마치 총알이 발사된 것처럼 작은 골렘이 날아가 큰 골렘에게 꽂혔다.
작은 골렘은 얼음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큰 골렘은 분노한 듯 이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나는 서둘러 두 번째 작은 골렘을 던졌다.
“두 놈!”
탕!
“세 놈!”
탕!
그러한 행동이 한 다섯 번쯤 반복되었을 때였다.
거대한 골렘의 몸 가운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리카의 몸집도 제법 줄어들었다. 힘을 꽤 소모한 탓이었다.
이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여덟 번째 총알을 던졌다.
“리카!”
[간다!]
타앙!
이번엔 소리가 꽤 컸다. 그것을 느낀 이나가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후.
쩌적- 쩌저적-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골렘의 가슴 부근에 가 있던 금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고.
“쿠어어어!”
챙!
골렘은 이윽고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