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해후(5)
“누구보고 아버님이래!”
남자가 버럭 소리 지르며 씨근덕거렸다.
“그리고, 뭐? 은호? 누가 그 새끼 이름이 은호래! 그 새끼는 세상이라고! 저세상!”
외치는 목소리에는 악의가 섞여 있었다.
곧, 그가 삿대질하며 말했다.
“똑똑히 들어.”
저은호는.
“저세상이야.”
‘세상’이란 이름도 얼마나 예쁘냐면서 남자가 웃었다.
“그러니까 그 새끼를 은호라고 부르지 마.”
“당신이 뭔데요?”
내 말에 남자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봤다면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렸을 법한 표정이었으나.
“아버지도 아니라면서요?”
나는 태연하게 물었다.
“설사, 은호의 아버지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네가 뭔데!”
남자가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나서는 목을 움켜쥐었다.
“그 새끼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내 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너는……!”
남자의 두 눈에 곧 핏줄이 섰다.
“그 새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악에 받친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떼어 내면서 말이다.
“내가 당신 아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요?”
남자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맞구나?’
눈앞의 남자는 저은호의 아버지였다.
제 자식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는 건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당신보다는 많이 알고 있어.”
나는 말했다.
“당장, 저세상의 이름이 저은호란 걸 알고 있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남자가 내 말에 발작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새끼를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 원래, 그 이름은!”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고. 내 이름이었단 말이야…….”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남자는 울기 시작했다.
“그 새끼는 각성하면 안 됐어. 계속 비각성자로 비루하게 살아야만 했다고. 나처럼, 그렇게 세상에서 버림받아야 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저은호는 당신 자식 아니에요?”
“내 자식이니까 하는 소리지!”
남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너는 모를 거야. 각성자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비각성자의 삶을, 하필 그 부모도 잘난 덕에 더욱 초라해져 버렸던 삶을!”
그때였다.
남자의 뒤로 익숙한 인영이 하나 보였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들었어? 아드님께서 비각성자라 하더라?’
‘정말? 남편분도 각성자이지 않아? 부모 모두 각성자인데 자식이 비각성자일 수 있어?’
‘돌연변이인가 보지.’
여러 사람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을 두고 숙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본부장님.’
강산에였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숨을 들이 삼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야지.’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나?’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강산에가 싱긋 웃었다.
‘세상이 은호의 이름을 지워 버릴 때까지 기다리자꾸나. 대신, 훗날 다시 새기자꾸나.’
‘새기자니…….’
‘내 아들이 비각성자라고 해도 그 자식 또한 비각성자일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훗날 내 손주가 태어나면 아들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한단다.’
그 말을 끝으로 강산에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후 나타난 건, 저은호였다.
아니, 저은호와 무척 닮은 소년이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소년이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 강산에의 말을 몰래 엿듣고 있던 소년은 그길로 집을 나섰다.
길거리를 전전하며, 제 삶을 끊임없이 비관하면서 소년은 살았다. 그러다 D급으로 각성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
‘이것 봐요, 여보. 예쁘죠?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저은호.
남자는 제 자식을 안으며 기쁘게 웃었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여보?’
저은호가 각성자였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태어나자마자 힘을 보인 ‘이상 각성자’였다. 불현듯 남자의 머릿속에서 제 어머니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제 손주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일 거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말이다.
그에 남자는 말했다.
‘세상이라고 합시다.’
어차피 이상 각성자는 얼마 살지 못했으니.
아이는 곧 죽으리라.
남자의 부인은 다른 이름을 원했으나 그는 확고했다.
‘세상입니다.’
곧 죽을 아이, 저세상.
하지만 ‘저세상’은 죽지 않고 계속 해를 넘기며 살았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를 향해 남자는 폭력을 일삼았다. 그를 막는 부인에게도 그러했다.
결국, 한때 사랑했던 연인은 제 자식을 두고 떠나 버렸다.
그렇게 남은 아이는.
‘저세상!’
아버지의 폭력을 여린 몸으로 받게 됐다. 각성자였으나 힘을 쓸 수 없었다.
제 자식을 두려워한 아버지가.
“이 미친 새끼…….”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를 성물을 이용해 제 자식의 힘을 봉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물은.
“진짜 또라이구나, 당신?”
온갖 좌절과 절망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정체 모를 신의 것이었다.
그래, 지금에 와서 ‘악신’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의 전신. 그것의 힘을 이용해 남자는 저은호를 부정하며 학대했던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남자가 내 물음에 벙찐 얼굴을 보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봤구나! 봤어! 감히 내 기억을 엿봤어!”
이윽고 남자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죽여 버릴 거야!”
“아니, 죽는 건 당신이야.”
그림자를 이용해 만들어 낸 창을 곧장 휘둘렀다.
“당신 같은 아버지 절대로 용납 못 해.”
남자의 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베어졌다. 베어진 몸에서 나오는 건 흰 연기뿐이었다.
이토록 쉬운 것을…….
“저은호는 하지 못했구나.”
흰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겼다.
“끝에서 항상 당신을 만났기에.”
그로 인해 모든 진실을 알아서.
“그래서 계속 실패했던 거야.”
그럼에도 저세상은 계속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장천의에 의해 몇 번이고 돌려진 세상을, 아무것도 모르고 제 몸을 던져 구하려고 했다.
“죽어! 죽여 버릴거야!”
세상을 멸망으로 이르게 한 진짜 원흉이 제 아버지인 것도 모르고.
“저세상, 그 아이는 저은호가 아니야! 죽어야 할 아이라고! 그럴 새끼라고!”
그 녀석은 그렇게 했다.
“죽어! 죽……!”
다시 한번 더 창을 휘둘렀다.
남자는 그렇게 사라졌다.
“하.”
남은 건 허무뿐이었다.
어둠이 물러나고 밝은 빛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윤리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멍하니 뭐 하는 거야!”
대답하기도 전에, 저은호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밖으로 나왔다.
두 눈을 깜빡이자 푸른 하늘이 보였다.
“파랗네?”
분명, 악신에 의해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었는데…….
“죽였어?”
멍하니 묻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크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죽이기도 전에 사라졌어.”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기괴하게 몸을 부풀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쏟아 내더니 이내 거품처럼 사라졌다고.
“뭐야, 그게.”
허탈하게 웃으며 또한 물었다.
“다른 거주자들은? 그 자식들도 거품처럼 사라졌어?”
저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악신이 사라지면서 물러났어. 아마, 머지않아 태세를 갖춰 다시 공격하려고 들겠지.”
“그래, 그렇겠지.”
작게 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그거면 됐어.”
저은호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응, 끝이야.”
여기에서 덧붙일 말이 뭐가 더 있을까?
“있잖아, 저은호.”
“……내 이름은.”
“저은호.”
자신을 부정하려는 입을 가로막으면서 싱긋 웃어 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예쁜 이름이야.”
저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구는 그 모습에 말했다.
때문에 입을 열었다.
“울지 마.”
“응.”
저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눈물 흘릴 자격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있잖아, 윤리사.”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내게 물었다.
“악신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내가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런 불안함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겠지.”
“그래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바닥에 몸을 눕히며 한참을 키득거리다가 말했다.
“절대로 안 죽여.”
그야.
“죽으면 끝이잖아.”
네 죄도, 네 이야기도.
저은호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작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끝이겠네.”
“응, 끝. 그러니까 안 돼.”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를 죽이는 선택 따위 하지 않아. 설마, 죽음으로 네가 저지른 죄에서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지?”
저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미소를 그렸다.
“살아. 그래도 되니까.”
그때였다.
저은호의 뒤로 보고 싶지 않은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곧장 저은호를 품에 안으며 그의 뒤로 나타난 사람을 매섭게 노려봤다.
“윤리사?”
저은호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나를 불렀지만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뒤로 나타난 달갑지 않은 손님을 향해 퍽 유쾌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장천의 회장님?”
“……장천의?”
저은호가 멍하니 그 이름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장천의!”
“가만히 있어.”
발버둥 치는 몸을 그림자로 묶어 버렸다.
“이런, 윤리사 양. 저세상 군을 아주 쉽게 제압하는군요. 그대로 죽이면 될 것 같습니다만?”
“저세상이 아니라 저은호예요.”
“그렇습니까? 이것, 참. 몰랐던 사실이군요.”
“장천의 회장님께서도 모르는 게 다 있네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모르는 게 많다면서 장천의가 넉살 좋게 웃었다.
나는 웃지 않고 물었다.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죠?”
“한번 맞춰 보시지요.”
얄궂게 묻는 목소리에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저은호를 죽이라고 말하려 찾아온 거라면 물러나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님, 당신 손으로 죽여 보시든가요. 그 전에 저를 막아야겠지만.”
“오, 윤리사 양. 저는 죽고 싶은 생각 따위 없답니다.”
장천의가 두 손을 들었다.
“윤리사 양께 위해를 가하게 되면 고객님께서 저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인사라니.
“이제 와서요?”
“네, 우습게 들리겠지만 뒤늦게 인사를 하려고요.”
장천의의 시선이 그림자에 묶인 저은호에게로 향했다.
“미안했습니다.”
“닥쳐, 장천의!”
저은호가 버럭 소리 질렀다.
“꺼져! 내 앞에서, 윤리사 앞에서 당장 꺼지라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뭐, 거주자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악신은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나머지는 아니니까요.”
장천의가 싱긋 웃었다.
“미지 영역은 복구될 겁니다. 제 시간을 거기에 쏟을 거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장천의가 말했다.
“이 세상은 더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작점을 맡고 있던 서차윤이 사라진 세상이니까요.”
그런 세상을 관조하고, 관망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장천의가 웃었다.
“그래서 서차윤과 같이 보람 있는 일을 한번 해 보려고요.”
째깍―!
장천의의 뒤로 황금빛의 시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장천의?”
최설윤이 그를 불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녀를 보며 장천의는 미소를 그렸다.
“지독한 이야기의 끝이군요.”
“시작이죠.”
장천의의 말을 고쳐 주며 말했다.
“시작이에요.”
“……그래요.”
장천의가 회한에 잠긴 눈으로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작이군요. 우리 CW의 VVIP 고객님의 하나뿐인 따님.”
“차라리 S급 각성자의 하나뿐인 따님이라고 해 줄래요?”
내 말에 장천의가 키득거렸다.
“그러기에는 이 세상에 S급 각성자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냥 편한 대로 말하렵니다.”
그리고.
“세상 군, 아니. 은호 군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장천의가 물끄러미 저은호를 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죽는 게 나을 겁니다.”
이 망할 아저씨가?!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악신은 은호 군이 살아 있는 한 계속 나타나려고 할 테니 말입니다.”
저은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에 말했다.
“신경 끄세요.”
저은호도, 그리고 장천의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면 되니까요.”
최설윤의 뒤로 이운조가 보였다.
전직 탈쟁이들도 함께였다.
그리고…….
‘아빠.’
윤사해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니, 우리지.
나는 저은호를 붙들고 있던 그림자를 풀고서는 입을 열었다.
“당신의 주인공을 믿어 주세요.”
장천의가 물끄러미 나를 봤다.
이어, 저은호를 바라보았다.
곧 그는 웃었다.
“그래요.”
후련하다는 듯이, 그렇게 웃으며 장천의의 시계가 돌아갔다.
“믿죠.”
그 말이 끝이었다.
“장천의 회장!”
한 박자 늦게 도착한 최설윤이 장천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왜…… 또, 왜…….”
최설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 줄까?
‘아니.’
최설윤이라면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장천의를 원망하며 자책할 게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리사.”
윤사해가 다정하게 나를 안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저은호도.
우리는 두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각기 다른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아빠.”
악신은 언제인가 다시 나타나고 말 거다. 그렇게 또 세상을 위협하겠지.
그 전에 저은호는 온갖 조사를 받게 될 거다.
‘괜찮아.’
최설윤과는 다르게 강산에한테는 진실을 알려 줄 생각이니까.
‘유랑단은…….’
멀지 않은 곳에서 대도깨비와 함께 있는 윤사희가 보였다. 자신을 본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윤사희가 입을 벙긋거렸다.
‘끝.’
그 한마디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끝이었다.
동시에…….
시작이었다.
-『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