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해후(4)
“윤리사……?”
미소를 지우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그림자에 밀려났던 것이 다시 크기를 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저세상을 먹으려 들었던 것을 해치우기는 해야 했다.
‘악신의 본체일 테니까.’
이대로 저세상을 데리고 나간다 해도 악신은 기세등등할 터.
“윤리사!”
나는 저세상의 손을 놓고 그를 먹으려 들었던 것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괜찮아. 나 안 죽어.”
“닥쳐! 닥치고 내 손 잡아!”
저세상이 저렇게 험한 말도 할 줄 알았다니.
아, 은호지.
저은호.
세상이가 입에 붙어서 계속 저세상이라고 부르게 됐다.
은호라는 이름이 더 예쁜데.
“뭘 그렇게 웃는 거야?! 어서 내 손 잡으라고!”
저세상이 애타게 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제발, 윤리사!”
나는 저은호를 노렸던 그림자를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말했잖아.”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그러니까 끝내러 가는 거야. 내 적은 네가 아니야.”
“아니야! 네 적은!”
“악신이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맞지, 은호야?”
“나, 나는…….”
저은호가 벌벌 떨며 말했다.
“그런 이름 몰라.”
이내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모른다고, 윤리사. 그러니까 제발 내 손을 잡아.”
“나중에 잡을게. 그러니까 너는.”
저세상의 손을 잡는 대신 단숨에 그의 앞에 나타나 상처투성이인 뺨을 가볍게 때렸다.
“곧장 나가. 네 눈에는 분명 길이 보일 테니까.”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은 ‘저은호’입니다.】
저은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자신에게 걸린 스킬을 어떻게든 부정하려는 모양새였지만.
“못 하잖아.”
그의 몸은 악신이 지배 중이었다.
저은호가 가졌던 힘도 악신이 아주 제 것처럼 사용 중이었으니.
“가.”
나는 단호하게 목소리를 뱉었고.
“아… 아아…….”
저은호는 내 힘에 굴복했다.
그대로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저은호를 덮치려고 들었던 그림자가 이내 나를 삼켰다.
***
〖윤사해, 물러나라!〗
검을 휘두르던 몸이 늑대의 입에 의해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바닥을 구른 윤사해가 사납게 물었다.
“랑야, 이게 무슨 짓이지?”
악신을 제압하기 직전이었다.
물론, 저 신은 가볍게 제 속박을 벗어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잠깐이라도 좋았다.
‘세상아.’
악신이 차지하고 있는 몸을 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을 테니.
〖뭔가 이상하다.〗
랑야가 악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상하다니?”
윤사해가 미간을 좁힐 때.
“우윽!”
악신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곧, 그의 배가 갈라지더니 누군가 검은 핏물과 함께 튀어나왔다.
익숙한 형체였다.
“세상아!”
“아저씨……?”
저세상이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이런, 세상아!”
윤사해가 다급히 저세상을 향해 달려왔지만 그보다 먼저 선수를 친 존재가 있었다.
〖리사는 어디 있느냐?〗
대도깨비가 저세상을 내려보며 조용히 물었다.
저세상은, 아니.
저은호는 그저 고개만 숙였다.
그때였다.
“이런, 착한 아이야.”
다시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악신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나온 거야? 왜 안 죽은 거야? 왜 살아 있는 거야?”
“……악신.”
“아니! 나는 너야! ‘저세상’이란 이름을 가진 너라고! 자, 그러니 말해 봐. 도대체 왜 안 죽고 살아 나온 거지? 약속이랑 다르잖아! 아, 그래!”
악신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를 죽이러 온 아이가 너 대신 죽어 버렸구나!”
저은호의 낯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닥쳐.”
저은호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윤리사는 안 죽어.”
설사, 죽는다고 해도.
“그건 네가 될 거야.”
악신이 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죽어? 이 내가? 우습지도 않은 소리! 나는 결코 죽지 않아! 단 한 번도 나를 죽인 인간은 없었다고!”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던 악신이 곧 저은호를 향해 재잘거렸다.
“어리석은 아이야. 죽는 건 내가 아닌 그 아이가 될 거야.”
그리고.
“너도 죽게 되겠지. 너뿐만이 아닌 이 자리의 모두가.”
저은호는 악신을 쳐다봤다.
제게 절망과 좌절을 안겨 준 존재였다. 이 세상의 진실을 알려 주며 손을 내민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 복수를 다짐했건만 그는 다시 적이 됐다.
‘내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불현듯, 윤리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놈도 아니었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던 놈도 아니었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장천의가 읽게 한 이야기에서 저를 본 거겠지.
‘정이라고는 하나도 가지 않는 놈이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윤리사는 제게 말했다.
‘그래도 너는 주인공이었어! 네가 비록 윤사해를 죽였었다고 해도, 네 정의를 내세우며 네 앞을 막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자신의 치부를 모두 알면서.
‘너는 내가 읽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고.’
저를 주인공이라고 말해 줬다.
그러니까.
“아저씨, 무기 좀 빌려주실래요?”
윤리사의 주인공으로서 할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수없이 저질렀다고 해도 그래야만 했다.
윤사해는 저은호를 물끄러미 보다 이내 검 한 자루를 넘겨줬다.
“가자, 세상아.”
세상.
이름만 보면 예쁜 이름이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새끼! 저세상으로 어서 꺼져 버려! 이 재수 없는 새끼!’
자신을 볼 때마다 욕을 내뱉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은호는 웃었다.
“아저씨, 제 이름 저세상이 아니래요.”
“음?”
“나중에 가르쳐 드릴게요. 저 망할 악신을 죽이고. 윤리사를 구하고.”
그런 다음에.
“제대로 알려 드릴게요.”
윤사해는 미소를 그렸다.
“그래.”
***
쿠웅―!
갑작스러운 진동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새까만 어둠뿐이었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 하나는 다행이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부르면서 울부짖던 목소리를 듣는 건 꽤 괴로운 일이었다.
여하튼.
“여기는 어디지?”
기껏 악신을 처리하려 이곳에 홀로 남았건만, 보이는 게 없었다.
나는 새까만 어둠 속을 돌아다니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다 파괴해 버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
“너!”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누군가가 나를 덮쳤다.
“윽! 누구……!”
“왜 방해한 거야!”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머리칼과 두 눈.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은호?”
“아니야! 그 새끼는 그딴 이름이 아니라고!”
저은호와 무척이나 닮은 얼굴의 남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안 거야?! 대체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냥 스킬을 통해 알아낸 것밖에 없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저은호한테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를 사용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는 분명 사용이 안 됐지?’
아마, ‘저세상’이란 이름이 진짜가 아니라서 그랬을 터.
어쨌거나 나는 말했다.
“누구세요?”
악신의 본체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망할 신은 저세상을 항상 ‘착한 아이’라며 재잘거렸으니.
내 물음에 남자가 소리 질렀다.
“네가 알 게 뭐야! 죽어! 죽여 버리겠어!”
곧, 그의 몸에서 나와 저은호를 삼키려고 했던 불길한 것이 올라왔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 그림자로는 맞설 수 없는 거란 것을.
때문에 피했다.
“날다람쥐 같은 년이!”
아버지란 작자가 생각났다.
윤사해가 아닌, ‘마리아’의 아버지 말이다.
나는 남자를 향해 웃었다.
“제가 좀 움직이는 게 빠르죠.”
그리고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아악!”
적을 제압하기.
남자의 뒤에서 그림자를 피워 낸 나는 곧장 그가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이, 이 망할 년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릴거야!”
시끄러워라.
나는 귀를 파내는 시늉을 하고는 그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동시에 물었다.
“당신, 저은호 아버님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