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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498)화 (498/500)

498화. 해후(3)

“오지 마.”

그토록 찾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몰아친 광풍에 곳곳에 상처가 났지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저세상?”

잔뜩 화난 얼굴이 나를 보자마자 쏘아붙였다.

“너 바보야? 너라면 악신을 쉽게 죽일 수 있었잖아!”

곧, 그는 나를 타박했다.

“악신을 죽이면 평화를 되찾을 수 있어. 너도, 아저씨도, 형들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래서?”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저세상이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악신을 죽이면 너도 죽잖아.”

“그건…….”

저세상은 자신의 몸을 악신에게 넘겼다.

그러니 그를 죽이면 저세상 역시 죽을 터.

“리오 오빠도 리타 오빠도 네가 죽는 것 따위 원하지 않아.”

그 두 사람뿐일까?

“아빠도 그래.”

또한.

“나도 그렇고.”

저세상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곧, 그가 코웃음을 쳤다.

“윤리사, 너 정말 바보구나?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잖아.”

“그래, 잘 알고 있지.”

우리 가족을 산산이 조각냈는데 어떻게 모를까?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혔다. 도윤이의 가족을 앗아 가기도 했고.

“그런데도 죽이지 않겠다고? 너 정말 바보야? 아님, 그새 머리라도 다친 거야?”

악신을 가리키는 건지, 저세상 그 자신을 가리키는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으니.

“응, 안 죽여.”

저세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회할 거야.”

금방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에서 잠깐 보였다.

저세상과 처음 만났던, 그 어릴 적의 얼굴이 말이다.

멍하니 그를 보는데 저세상이 입을 열었다.

“아직 안 늦었어.”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저세상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거, 여기에서 그냥 나를 죽여. 너라면 이곳이 무너져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또한, 악신도 죽게 될 거라면서 저세상은 말했다.

“곧바로 죽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결국에는 죽겠지.”

그를 이루는 본질인 ‘저세상’이 죽어 버렸으니.

“자, 그러니까 윤리사.”

성큼 다가온 그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나를 죽여.”

나를 잡은 상처투성이 손은 무척 단단했다.

어떠한 떨림도 없었다.

“……멍청이.”

“뭐?”

“멍청하다고!”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 질렀다. 벙찐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쫙!

파열음과 함께 저세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나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아니.”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이 세상이 알고 있겠지.”

저세상의 두 눈이 내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내며 이어 말했다.

“네 죄는 살아서 갚아. 죽음으로 속죄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하…….”

공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같은 윤리사. 애초에 나는 죽음으로 죄를 속죄할 생각 따위 없었어.”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애초에 내가 저지른 죄에 죄책감 따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데 속죄라니?”

저세상의 말에 얼굴이 구겨졌다.

분명,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거다.

그래야만 했다.

들려온 목소리에서 어떤 거짓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윤리사, 네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저세상이 싱긋 웃었다.

“아저씨가 지금 악신을 상대하고 있는 거 알지?”

“……뭘 하려는 거야?”

“그냥, 악신이 모든 힘을 온전히 낼 수 있게 하려고.”

저세상이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내 진심이 네게 전해지지 못한 것 같아서.”

그의 뒤로 불길한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저세상을 삼켜 버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저세상!”

하지만 저세상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삼키려고 드는 그림자에 몸을 맡기며 웃을 뿐이었다.

“윤리사.”

저세상이 미소를 그렸다.

“너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고, 나는 네가 쓰러뜨려야 하는 마지막 적이야.”

주인공…….

“네가 나를 쓰러뜨려야만 이 망할 이야기는 끝을 맺을 수 있어. 해피 엔딩으로.”

그 망할 주인공!

“너라면 할 수 있잖아.”

“닥쳐!”

그림자에 삼켜지려던 몸을 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누가 그래?”

놀란 눈이 버럭 소리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것 놔!”

“못 놔!”

그 전에 대답이나 하라며 나는 외쳤다.

“장천의가 그래? 아니잖아!”

아니, 맞다.

장천의는 나를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렇게 ‘윤리사’가 됐지마는.

“내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나의 세상에서 주인공은 ‘저세상’이었다.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놈도 아니었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던 놈도 아니었어.”

최애와 차애도 아니었던 주인공.

“정이라고는 하나도 가지 않는 놈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너는 주인공이었어! 네가 비록 윤사해를 죽였었다고 해도, 네 정의를 내세우며 네 앞을 막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크게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는 내가 읽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고.”

『각성, 그 후』를 읽은 독자라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러니까 네 멋대로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마.”

이 이야기에 주인공은 없으니까.

“하지만 해피 엔딩은 있을 거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어떻게든 나를 떼어 내려고 하던 저세상이 멍하니 물었다.

그에 일곱 살의 미운 나이에 짓궂은 얼굴로 할 법했던 말로 답해 줬다.

“예쁜 짓.”

저세상이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싱긋 웃어 주며 찰지게 그의 뺨을 때렸다.

“너는 내 말이나 들으면 돼.”

쫘악!

손에 힘을 실어 때린 덕분인지 저세상의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다.

곧, 어느 순간 보지 못했던 푸른 창이 내 앞에 나타났다.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은 ‘저은호’입니다.】

저은호…….

“뭐야, 세상이란 이름보다 예쁜 이름이잖아.”

어느 누가 자식 이름을 ‘저세상’이라고 짓는 건가 싶었다.

『각성, 그 후』가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때는 작가 새끼가 미친 건가 싶었고.

하지만 아니었다.

“너도 네 이름을 알고 있었어?”

스킬의 영향으로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고 있던 저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 덕분에 네 진짜 이름을 알게 된 거네?”

“진짜 이름이라니…….”

“저은호.”

저세상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완전히 그림자에서 빼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세상이란 이름보다 더 예쁜 이름으로 많이 불러 줄 테니 나가자.”

“나, 나는.”

말을 더듬는 그를 향해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가자고. 내가 말했잖아?”

너는 내 말이나 들으면 된다고.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괜히 S급 스킬인 게 아니었다.

잠시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던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멍청이…….”

이번에는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맞아, 나 멍청이야.”

저세상의 욕에 유쾌하게 웃으며 그가 빠져나온 그림자를 쳐다봤다.

불길한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세상뿐만이 아니라 나도 잡아먹을 것처럼 말이다.

우습기도 해라.

“그림자는 내가 더 잘 다루는데.”

나는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저세상의 두 눈을 꼭 닮은 색을 지닌 그림자가 그를 휘감고 있던 것을 덮쳤다.

쿠구궁―!

나를 덮쳐 왔던 광풍이 다시 또 몰려왔다.

―리사야! 윤리사!

―안 돼……!

―윤리사, 제발!

바람 속에 절망 어린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지마는.

“괜찮아.”

나는 미소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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