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해후(2)
“리아야, 아빠 얼굴 기억나니?”
두 눈을 번쩍 떴다.
“우리 리아. 아빠가 진작 데리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뺨을 쓰다듬는 거친 손에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네 엄마와는 이혼한 지 좀 됐다. 이제야 너를 데리러 올 형편이 돼서 이렇게 왔는데…….”
그 말에 떠올렸다.
내 뺨을 쓰다듬는 얼굴을 처음 보는 게 아님을.
“그래서 정부 지원금을 얼마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저 얼굴은 내 아버지였다.
‘윤리사’의 아버지가 아닌, ‘마리아’의 아버지.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망할 악신 새끼.
오래전에 잊은 광경을 이렇게 보여 줄 건 뭐람?
“리아야?”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에 곧바로 쏘아붙였다.
“아니요,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요? 그리고 저 아저씨 따라갈 생각 없어요.”
언제인가 했던 말이다.
아버지란 작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곧.
쫘악!
뺨이 돌아갔다.
아, 그래. 그때도 이랬지.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아버지란 작자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뭐?! 내가 기억 안 나?!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키워 준 은혜?
“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봐요, 아저씨. 당신이 언제 나를 키워 줬다고 그래? 나를 키워 준 건 아저씨가 아니야!”
윤사해였지.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망할 아버지가 또 다시 손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맞아 주지 않았다.
애초에 맞아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마리아’가 아니었다.
윤사해의 하나뿐인 딸.
윤리오와 윤리타의 동생.
윤리사였다.
“윽! 이, 이게! 안 놔?!”
나는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은 인간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곧장 으스러뜨렸다.
“아아아악!”
무척 거대해 보였던 남자가 으스러진 손을 잡고는 소리를 질렀다.
“이, 이년이 사람을 죽인다!”
그러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누구 없어?! 내 딸년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그때였다.
―리아! 그러면 안 돼!
―어떻게 아버지한테 그러니?!
―어서 사과하렴!
내가 ‘윤리사’가 되기 전에 지낸 나의 집.
희나리 보육원의 수녀님들이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리아! 어서 사과하라니까?!
“사과는 무슨.”
나는 곧장 그림자를 움직였다.
―꺄아아악!
나를 손가락질하던 수녀님들이 그대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내게서 도망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림자에 온몸이 붙잡혀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알았다.
내 앞의 ‘아버지’는 악신이 만든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때문에 나는 말했다.
“있잖아요, 아저씨.”
“으아악! 오지 마, 이 괴물아!”
“괴물이라니. 하나뿐인 딸한테 정말 너무하네.”
“딸은 무슨! 너 같은 딸 둔 적 없어, 이 망할 년아!”
“그렇겠죠.”
여하튼 나는 물었다.
“아빠는 저를 보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악신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이라고 해도 내 눈앞의 남자는 결국 ‘아빠’였다.
윤사해와 같은 존재였다는 거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분명한 사실.
그때는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아빠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이내 발작하듯 외쳤다.
“없어! 너 같은 걸 누가 보고 싶어 할까!”
내게 상처를 입히려는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담담했다.
그야,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때문에 말했다.
“아빠요.”
“뭐?”
“우리 아빠가 보고 싶어 할 거라고요.”
아마, 이곳에서 나가면 잔소리를 한바탕 얻어 듣겠지.
왜 이렇게 겁이 없느냐며, 자신의 심장을 기어코 떨굴 작정이냐면서 한 소리 들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 미친년.”
“맞아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해 줬다.
“그러니까 겁도 없이 악신의 몸에 들어온 거겠죠.”
저세상을 찾으러.
나는 ‘마리아’의 아버지를 향해 걸음을 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아저씨한테 뺨을 맞았을 때 무서웠어요. 아니, 처음에는 무척 기뻤어요.”
보육원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이 찾으러 오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그냥, 그랬다고요.”
나는 후련하게 웃으며 그림자를 움직였다. 남자를 잡고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그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비명도 없이 온몸이 찢긴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괴물…… 살아 있으면 안 돼,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안 죽을 거예요.”
저주를 퍼붓는 입을 잘근 밟고는 말했다.
“저세상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 우리 아빠한테 잔소리를 듣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예요.”
파스슥!
발로 밟고 있던 ‘마리아’의 아버지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수녀님들 역시 마찬가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물었다.
“이게 끝이야?”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마, 악신은 지금 내 질문에 답할 여유가 없을 거다. 대도깨비가 그를 붙잡고 있었고 윤사해 역시 도착한 상태였다.
“그래도 실망인데.”
내가 그동안 맛본 절망과 좌절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로 실망이야.”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세상 역시 나와 같은 경험을 했겠지.
아니, 하고 있을 거다.
“바보 같은 자식.”
과거의 케케묵은 기억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한들 이겨 내야지.
“당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나보다 더한 것도 겪었을 놈이.
나는 새까만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곳을 걸어 나갔다.
―리사야! 윤리사!
―안 돼……!
―윤리사, 제발!
이동할수록 절망에 사로잡힌 온갖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우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말했다.
“시끄러.”
그림자를 휘두르면서.
“시끄럽다고.”
내게 붙으려는 절망과 좌절을 모두 떼어 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려는 순간.
“아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그림자를 휘둘러 그 목소리를 지우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야, 나를 부른 사람은.
“혜향화 언니?”
결코 잊지 못할 이름을 가진 ‘탈’이었으니.
곱슬기가 도는 붉은 머리칼을 곱게 틀어 올린 언니가 나를 향해 옅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어릴 적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망할 악신 새끼가……!”
이가 갈렸다.
“언니.”
“그래, 아가.”
답하는 목소리에 나는 그림자를 검의 형태로 만들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혜향화가 내 사과에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었다.
“언니……?”
혜향화는 내 뺨을 때리지 않았다.
어느 한 곳을 가리킬 뿐.
“가렴.”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정말 언니예요?”
내 기억 속에서 이끌어 낸 형상이 아닌 진짜.
“정말 언니라고요?”
내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혜황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그러고는 내게서 돌아서 버렸다.
“언니, 잠깐만요! 언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두 걸음 더 멀어졌다.
“언니!”
어릴 적,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었다.
나를 구해 줘서 고맙다고.
그 말을 전해 줘야 하는데.
“가렴.”
어느새 내게서 훌쩍 멀어진 혜향화가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네 아이와 나가 네가 기다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야지.”
“언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혜향화의 곁에 그녀와 함께 결코 잊을 수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 한껏 미소를 그려 주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해요.”
지금까지 만난 절망과 좌절보다 더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 버리면 어떻게 해요.”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순간 두 눈에 열이 올라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곳에서 울고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혜향화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고마워요, 언니.”
혜향화에게 닿지 못할 인사를 작게 읊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어둠이 나를 먹어 치우려고 드는 게 보였다.
그에 알았다.
“저세상.”
그가 가까이에 있음을.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어둠을 헤쳐 나가며 입을 열었다.
“저세상!”
그때,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