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해후(1)
뺨에 길게 생채기가 나타났다.
〖괜찮으냐?!〗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에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대도깨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후두둑, 턱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으니.
〖리사…….〗
“말했듯, 저는 괜찮아요.”
설마 악신의 공격이 내 그림자를 뚫고 나를 노릴 줄은 몰랐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나는 손에 검을 쥐며 말했다.
“저세상을 구해야 하니까요.”
“구해? 누구를? 내게 자신의 몸을 넘겨준 착한 아이를?”
악신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그 착한 아이는 이미 내 안에서 잠들었어. 결코 깨어날 일은 없을 거야.”
“아니, 저세상은 깨어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그것참 기대가 되지만.”
작게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저세상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악신이 코앞에 나타났다.
“나는 착한 아이가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말이야.”
〖리사!〗
천지해가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악신이 가볍게 손짓하며 천지해를 날려 버렸다.
“대도깨비님!”
그림자를 뻗어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나를 봐야지.”
악신에 의해 손목이 잡혔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악신을 노려봤다.
저세상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가 아닌 망할 신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응?”
“원하는 게 있어서 저세상의 몸을 빌려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걸 거잖아.”
그러니까.
“원하는 게 뭐냐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악신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원하는 건 없어! 나는 그저 자유롭게 놀고 싶을 뿐이야! 말했던 것 같은데 잊은 모양이구나!”
보기보다 머리가 나쁜 것 같다며 악신은 웃었다.
“그보다 아이야, 네가 잠들어 버린 착한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뭐……?”
멍하니 묻는 목소리에 악신이 싱긋 웃으며 대답해 줬다.
“너도 삼켜지는 거야.”
검은 두 눈을 번뜩이며 악신은 말했다.
“그럼, 착한 아이를 분명 만날 수 있겠지.”
그 순간 보였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밤하늘과도 같은 새까만 두 눈에 붉은빛이 넘실거리는 것을.
“물론, 네가 내 안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야.”
시험하는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대도깨비가 곁에 있었다면 분명 말했을 거다.
악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면서 소리를 질렀겠지.
하지만.
“내가 네 안에서 제정신을 유지한다면?”
나는 물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착한 아이를 만나겠지.”
“그것으로 끝이야?”
또한, 도발했다.
벙찐 얼굴의 악신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재미없잖아. 저세상의 기억을 본 것 같으니까 말하는 건데, 그 망할 자식은 내 적이거든.”
어느 누가 적을 만나러 사지에 걸어 들어갈까?
“내가 저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건 그 자식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기 때문이야.”
“거짓말.”
악신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는 이 착한 아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악신의 말대로였다.
나는 저세상을 죽이고 싶은 마음 따위 없었다. 그가 암만 저지른 일이 있다고 해도 그랬다.
도윤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악신은 아무 대답도 없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바보 같은 아이.”
“누구 보고 바보래?”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먹어 버릴 것처럼 구는 악신을 보며 웃었다.
“바보는 너야.”
악신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곧, 뾰족하게 끝을 벼린 것이 곧장 악신의 몸을 꿰뚫었다.
“어……?”
후두둑, 내 위로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검은 피가 떨어졌다.
악신의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악신을 걷어차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바보 같은 악신.”
악신이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비웃었다.
“네가 차지한 게 인간의 몸이란 걸 잊고 있었나 봐?”
악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종일관 웃고 있던 얼굴에 금이 가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너…… 너는 나쁜 아이구나…….”
“맞아, 나는 나쁜 아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착한 아이였다면 이런 식으로 손에 피를 묻히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까 나쁜 아이라고 나를 욕해도 상관없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대화를 계속해 볼까?”
악신의 뒤로 대도깨비가 나타나서는 그를 결박했다.
“비루한 도깨비 자식이!”
〖시끄럽다.〗
천지해가 악신의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는 웃었다.
〖내 이렇게 너를 잡을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살다 살다 이런 순간이 다 온다며 대도깨비가 웃음을 흘렸다.
악신이 그에 이를 드러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뾰족한 이빨이 보였다.
“네 비루한 재주는 내가 금방 풀 수 있어.”
〖네 착한 아이가 남겨준 스킬로 말이냐?〗
대도깨비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내가 못 할 줄 알고?”
악신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곧장 너를 찢어 죽여 주마.”
〖먼저 벗어난 후에 입을 털거라. 입만 산 것도 아니고.〗
비웃는 목소리에 악신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 망할!”
하지만 그는 천지해의 결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닥과 하나가 되어 이를 갈기만 하는 모습에 나는 물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다른 세상의 하늘로 짓누르고 있거든.〗
“다른 세상의 하늘이라면…….”
〖저세상이 건너온 세상.〗
천지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지울 수 없다.〗
저세상이 악신에게 남겨준 힘도 마찬가지.
〖악신의 눈에 다른 세상의 하늘이 보일 리가 없으니. 저 녀석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거다.〗
그러면서 천지해는 말했다.
〖리사, 이제 네 차례다.〗
“네?”
〖저세상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는데 천지해가 말했다.
〖문을 열어 주마.〗
문을 열어 준다니.
“어떻게요?”
〖당연히 이렇게지.〗
천지해가 웃는 낯으로 악신에게 걸어갔다. 그에 의해 사지가 결박된 악신은 이를 드러내며 저주 섞인 말을 천지해에게 퍼부었다.
〖네가 이렇게 시끄러운 녀석이었을 줄이야.〗
“닥쳐! 네 힘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너를 죽여, 욱!”
천지해가 악신의 입을 잡고는 크게 벌렸다.
아니, 찢어 버렸다.
“대도깨비님!”
사방으로 튀는 검은 피에 놀라 그를 불렀다.
〖걱정할 것 없다, 리사. 이 망할 녀석이 차지한 건 저세상의 껍데기일 뿐이니 말이다.〗
“네……?”
멍하니 묻는 내게 대도깨비가 싱긋 웃어 줬다.
〖이 녀석은 저세상을 토대로 인간의 몸을 구현한 것뿐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구현한 건 아니라면서 천지해는 말했다.
〖저세상이 이 녀석에게 완전히 녹아들면 이 녀석은 정말 인간이 되겠지. 어쩌면 그저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그의 모습이 괴물 같지 않느냐며 천지해는 말을 이었다.
〖저세상이 완전히 이 녀석에게 잡아먹히면 방법은 없다.〗
그 말이 희망처럼 다가왔다.
저세상이 아직 악신의 안에 있단 거였으니.
“들어가면 되나요?”
〖그래.〗
천지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문이 열렸구나.〗
악신의 찢어진 입 사이로 검붉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아니, 연기가 아니었다.
‘시바…….’
문어의 다리처럼 생긴 것들이 악신의 입 사이에서 튀어나와 천지해를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다.
징그러운 광경에 욕이 절로 튀어나왔지마는.
〖리사, 어서.〗
재촉하는 목소리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리를 움직였다.
저세상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리사!”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였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달려오는 그를 보며 싱긋 웃어 줬다.
그러고는 그대로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으아아악!
―아아악!
절망에 섞인 목소리가 나를 집어삼키는 걸 느끼며,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