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조우(6)
“이운조!”
“최설윤 길드장님!”
거주자들을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만든 이운조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반겼다.
“멀쩡해 보이시네요?”
그 말에 하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운조를 쳐다봤다.
최설윤의 상태는 어떤 식으로 봐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운조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죽은 줄 알았어요.”
“그러기를 바란 건 아니고?”
“설마요! 농담도, 참!”
이운조가 너스레를 떨고는 입을 열었다.
“상황은 어떤가요?”
“보다시피.”
최설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안 좋지.”
이운조에 의해 한 발짝 물러난 거주자들이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두 눈을 번뜩이고 있는 그들을 보며 이운조가 혀를 찼다.
“명색이 ‘신’이라 불렸던 자들이 승냥이처럼 떼로 몰려다니고 있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면서 이운조가 픽 웃었다.
“어떻게 하죠?”
“처리해야지.”
최설윤이 가시넝쿨을 길게 뻗으면서 말했다.
“리사 혼자서 악신을 상대 중인 모양이야.”
“네?”
이운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윤사희 님은요?”
“그분께서는 수장님을 상대 중입니다.”
윤이 답해 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두 분이서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더군요.”
“허어…….”
이운조가 탄식하듯 읊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야, 하현. 너는 알고 있었어?”
“무엇을 말입니까?”
“리사 할머님이 네 수장님이랑 아는 사이인 거.”
“몰랐습니다. 그보다 제 수장님 아닙니다.”
하현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적이지요. 부네께서는 저와는 다른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설마요.”
윤이 웃었다.
“입에 붙어서 계속 ‘수장님’이라 부르는 것뿐이지, 그분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제 적이랍니다.”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 하현이 코웃음을 쳤다.
“자자, 수장이고 자시고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최설윤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어서 저 망할 작자들을 처리해야지.”
그 말에 하현이 말했다.
“싸운 적 없습니다.”
“맞아요, 윤.”
전직 탈쟁이들의 말에 이운조가 키득거렸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지금은 자신들의 앞을 막고 있는 거주자들을 상대해야 할 때.
“운조.”
“네, 최설윤 길드장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파지직!
이운조의 주위로 푸른 빛이 일어났다.
“최설윤 길드장님만큼 저도 꽤 멀쩡하니까요. 버러지 같은 놈들이 꽤 귀찮게 들러붙었지만 다친 곳은 없답니다.”
“좋아.”
최설윤이 가시넝쿨 사이에서 검을 뽑아냈다.
“빠르게 간다.”
“네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윤리사 홀로 악신과 싸우고 있는 중이란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가야 했다.
“그럼, 가자.”
최설윤의 말에 맞춰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
“흐으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윤사희는 말했다.
“잘 싸우고 있는 모양이군. 내 귀한 손녀 쪽은 잘 보이지 않지만.”
“보일 리가 없지.”
명이 피를 토해 내며 말했다.
“누이의 눈으로 어찌 악신을 볼 수 있을까?”
“너는 보이는 모양이구나.”
“그럼.”
피를 닦아 내면서 명은 웃었다.
“누이의 아이가 악신에게 갈가리 찢기는 모습이 이 두 눈에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걸?”
“명아.”
윤사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예나 지금에나 너는 거짓말이 참 서툴구나.”
“아아, 들켰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명이 웃음을 흘렸다.
“누이는 역시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상대가 윤리사였으니.
“내 아이는 강하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명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누이가 핏줄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줄 몰랐는데.”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거짓말.”
명이 입꼬리를 올렸다.
“누이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누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누이가 자신의 핏줄을 귀하게 여겼으면 어찌 딸을 그렇게 버렸을까?”
윤사희가 표정을 굳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명은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그 딸이 낳은 자식이 제 부모가 비루하게 죽을 때까지 누이는 그저 내버려 뒀지. 찾지도 않았어.”
“그 입 닥치거라.”
“진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왜 화를 내는 거야?”
명이 히죽거렸다.
“도깨비, 그래. 윤사해. 그 아이도 참 불쌍해. 그 아이는 모르지? 제 어미가 제 할머니한테 비참하게 버림받은 것을.”
“버린 적 없다.”
윤사희가 짓씹듯이 말했다.
“딸은 내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유롭게 놓아준 것이다.”
“아니지, 누이.”
명이 웃는 낯을 유지하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누이의 딸은 언제나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어. 누이와는 다르게 아무 힘도 가지지 못했으니까. 참 우습게도 말이야.”
윤사희의 딸은 비각성자였다.
그녀의 아비가 비각성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윤사희도,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모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돌연변이였지.”
그들의 딸은 아니었다.
“누이도 알지 않았어? 그 아이가 스스로를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면서도 누이는 외면하고 무시했잖아?”
그렇게 윤사희의 딸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집을 나섰다.
“누이가 핏줄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렇게 두지 않았겠지. 그래, 그랬다면 말이야.”
명이 순식간에 윤사희의 눈앞에 다가와서는 속삭였다.
“사해, 그 아이가 자신의 어미가 제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죽는 것도 보지 않았을 거야.”
윤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감정도 얼굴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명을 노려볼 뿐.
명은 그것이 기뻤다.
윤사희가 자신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명아.”
윤사희가 한숨을 내뱉듯 그녀를 부르고는.
“내 언제인가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너는 혀가 긴 것이 단점이다.”
윤사희를 향해 조곤조곤 떠들던 입이 찢어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피에 명은 놀란 눈을 해 보였다. 곧, 기쁘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웃었지만 말이다.
윤사희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
자신의 딸도, 그 아이의 아들도, 그 아들의 자식들도.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기필코 죽일 것이다.”
명은 여전히 웃었다.
***
쿵, 쿠구궁!
그림자가 솟구치며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이 보였다.
“리사야?!”
“윤사희 님인 것 같네요.”
윤이 담담하게 답하고는 단검을 휘둘렀다.
〖윽!〗
가슴을 부여잡는 거주자의 목을 최설윤이 단번에 잘라 냈다. 목을 잃은 몸이 비틀거리다가 곧 쓰러졌다.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몸이네. 목을 잃으면 죽으니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현의 말대로였다.
목을 잃은 거주자들은 곧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것 참 곤란하네.”
윤리사를 도우러 갈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리사 쪽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불안했다.
악신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
하지만 그들 모두 알 수 있었다.
악신은 사라진 것이 아님을.
“리사는 괜찮겠지?”
“당연하죠.”
이운조가 푸른 전격을 쏟아 내며 말했다.
“리사가 누구 딸인데, 다친 곳 없이 괜찮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이면 악신이고 뭐고 모든 상황을 정리해 놓았을 거라며 이운조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마음속에는 불안함을 품고 있었다.
‘괜찮겠지?’
이운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윤리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아니야.’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이운조가 고개를 털었을 때.
“이운조!”
하현이 비명과도 같이 외쳤다.
이운조의 코앞에 거주자가 히죽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에 이운조는 헛숨을 삼켰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렇다고 스킬을 사용하기에는 저 또한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마는.
‘어쩔 수 없지.’
모 아니면 도.
이운조가 스킬을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그만하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거주자의 목을 휘감고서는 멀리 내팽개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