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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492)화 (492/500)

492화. 조우(4)

〖저 아이 진짜 웃기다! 우리 착한 아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시끄러워.”

저세상은 차갑게 대꾸했다.

자신에게 들러붙는 무수한 손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면서 말이다.

악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착한 아이야.〗

목소리만 들렸지만 저세상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차지한 악신이 분명 웃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곧이어 악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이대로 잠자코 있으면 돼. 지루하면 잠시 눈을 감는 것도 좋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테니까.〗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저세상은 악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절대 눈을 감지 않을 거야.”

두 눈을 뜨고 윤리사가 자신의 모습을 취한 악신을 죽이는 것을 망막에 선명하게 새길 거다.

피해서는 안 되는 일.

‘그래, 맞아.’

윤리사가 저를 죽이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겁도 없이 남의 뺨만 때려 대던 윤리사였다.

그뿐이랴?

듣도 보도 못한 스킬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윤사해를 위해 자신을 데리고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췄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녀의 알 수 없는 스킬에 의해 억지로 몸을 움직였었지.

저세상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윤리사…….”

그녀는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좋게 말할 때 당장 튀어나오라며 그렇게 저를 불러 댔다. 동시에 자신의 몸에 붙은 수많은 손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세상아.’

윤사해의 목소리도 있었고.

‘세상아!’

윤리타와 윤리오의 것도 있었다.

또한.

‘저세상!’

윤리사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만 불러.”

저세상이 무릎을 모으고서는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나는 그만 부르고.”

네 앞의 적을 죽여.

그렇게 내가 구하지 못했던 세상을 구하는 거야.

***

“라고 하는데?”

악신이 히죽거렸다.

그는 자신의 안에서 저세상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게 상세히 알려 줬다.

아주 고맙게도 말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닥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바.’

욕을 집어삼키며 말했다.

“저세상 얼굴로 히죽거리지도 마. 기분 더러우니까.”

“그래?”

악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떻게 웃으면 좋을까?”

자신의, 아니. 저세상의 얼굴을 만지면서 묻는 목소리에 차갑게 대꾸했다.

“그냥 웃지 마.”

저세상의 얼굴로 어떤 표정도 짓지 말아 줬으면 했다.

하지만 악신은 말했다.

“그건 안 돼. 나는 너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 주고 싶단 말이야.”

개소리를 아주 잘도 지껄이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애써 집어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 방법은 하나뿐이야.”

“뭔데?”

“네가 죽는 거.”

악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곧, 그가 저세상의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꽤 유쾌하게 말이다.

악신은 한참 후에 웃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기껏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됐고, 또 말을 할 수 있게 됐는데 죽으라니! 절대 그럴 수 없지!”

광기에 삼켜진 인간처럼 굴었다.

지하 길드에 속한 인간들한테서 자주 봤던 모습이었다.

어쨌든 악신은 말했다.

“무엇보다 내가 죽으면 이 착한 아이도 죽게 될 거야.”

악신이 싱긋 웃었다.

“그걸 원해?”

상냥하게 묻는 목소리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악신을 조우한 이후 계속 구겨져 있던 얼굴인데.

‘주름 생기겠네.’

나중에 저세상한테 피부 미용에 쓸 돈 좀 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세상이 죽기는 왜 죽어? 죽는 건 너뿐이야.”

악신이 감탄했다.

“우리 아이는 ‘죽음’을 정말 쉽게 입에 올리는구나.”

“그만큼 내게 가까운 거라서.”

그림자를 쉽게 다룰 수 있게 됐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니, 윤사희에 의해 몇 번이고 수도 없이 죽음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

“너는 죽어 본 적 없으니까 모르겠지. 죽음이란 것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말할 수 있었다.

“죽는 건 너뿐이야.”

악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우리 아이가 내게 이 몸을 넘겨준 착한 아이를 정말로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러니까 이 착한 아이가 저지른 많은 과오를 외면하고 있겠지.

“네 친구에게도 이 착한 아이는 아주 큰 슬픔을 줬지?”

악신이 속삭이듯 묻고서는 입을 열었다.

“분명 너는 네 친구가 겪은 그 슬픔에 이 착한 아이를 죽일 거라고 다짐했을 거야.”

그래, 분명 그랬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 마음을 엿본 건 아닐 터.

‘저세상의 기억을 엿보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알 수 없을 텐데?

그런 의문도 잠시, 나는 악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나만 죽일 거라고 말하다니!”

빌어 처먹을 악신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재미있어! 네 친구가 지금 너를 보면 분명 배신감에 치를 떨고 말 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악신이 그런 나를 보고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재미없네.”

“할 말은 다 했어?”

“아니.”

악신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네게 할 말이 남았어. 그것도 꽤 중요한 이야기지.”

깃털처럼 가볍게 걸음을 내디딘 악신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게 이 몸을 넘겨준 아주 착한 아이는 절망 속에서 두 눈을 감기로 했단다.”

검은 두 눈이 붉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헛숨을 들이 삼켰다.

악신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그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느끼지도 못했다.

악신이 저세상의 얼굴로 히죽 웃는 것과 동시에.

〖리사!〗

천지해가 나를 끌어당겼다.

***

쿠구구궁―!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악신이 있던 곳이지?”

“네, 그렇습니다.”

하현이 유랑단의 단원을 가볍게 제압하고는 물었다.

“걱정되십니까?”

“응.”

하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믿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물론, 믿어. 그렇지만 걱정되는 것과는 별개지.”

이운조가 하현의 뒤통수를 잡아 누르고는 그를 해치려고 드는 지하 길드원을 가볍게 때려눕혔다.

“이 망할 새끼들은 왜 자꾸 너만 노리는 거야?”

“배신자이지 않습니까? 유랑단은 물론 지하 길드도 저를 좋게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알 바야?”

이운조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안 되겠다. 그냥 한 번에 정리해야지.”

“네?”

“어차피 민간인은 대피한 지 오래잖아? 어서 이 쓰레기들 청소하고 리사 도와주러 가 봐야겠어.”

파지직!

이운조의 온몸에서 푸른 전기가 튀어나왔다.

하현이 놀라 외쳤다.

“잠시만요, 이운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운조는 온몸의 전기를 방출해 자신들의 앞을 막는 지하 길드원 모두를 눕혀 버렸다.

“으… 으윽…….”

곳곳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운조는 만족스레 웃으며 손을 털었다.

“진작 이럴걸.”

“당신, 정말……!”

“왜, 뭐?”

이운조가 불퉁하게 말했다.

“하나하나 상대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잖아.”

하현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다 당신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이운조의 스킬은 위협적이었다.

그녀 자신마저 휩쓸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현은 오래전의 실험실에서 이운조가 그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것을 많이 봤었다.

이운조 역시 하현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안 다쳐. 내 걱정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그게 쉽게 될 것 같습니까?!”

하현이 짧게 혀를 찼다.

“차라리 제게 부탁하십시오. 지하 길드원 모두 다른 곳으로 날려 버리라고 말입니다.”

“오, 그것도 좋은데?”

이운조가 키득거리고는 말했다.

“그보다 어서 움직이자.”

“윤리사 양이 있는 곳으로 말입니까?”

“아니.”

하현이 놀란 눈을 보였다.

“조금 전까지 윤리사 양을 걱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최설윤 길드장님이 신경 쓰여.”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야.”

이운조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기를 봐.”

최설윤이 윤과 함께 이동한 곳에 신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하현이 탄식하듯 읊조렸다.

“최설윤 길드장을 돕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래. 리사를 도우러 가 봤자 왜 왔느냐면서 잔소리나 들을 테니.”

그러니 최설윤을 도우러 가는 게 더 좋았다. 물론, 최설윤한테서도 같은 말을 듣게 될 가능성이 무척 높았지만.

“가자.”

이운조는 최설윤보다 윤리사가 더 무서웠다.

그래서 최설윤한테 가는 거다.

‘그래.’

이운조는 그렇게 최설윤과 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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