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조우(2)
“기어코 시작됐나 보군.”
윤사희가 시끄럽게 요동치는 하늘 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누이는 걱정되지 않나 보네.”
“당연하지. 리사는 내 가르침을 받은 아이. 그 아이가 악신인지 뭔지 하는 것에 쉽게 당할 거라 생각하느냐?”
“자신만만하네.”
명이 미소를 그렸다.
“하긴, 누이는 원래 그랬지.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고.”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그 말을 끝으로 윤사희가 한순간 모습을 감췄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명의 앞.
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걸음을 뒤로 물렀다.
허공을 베어난 검에 윤사희가 짧게 혀를 찼다.
“여전히 몸이 날래구나.”
“누이만 할까?”
명이 키득거리며 웃고는 재잘거렸다.
“그보다 아쉬워. 나는 누이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누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너라면 있을 것 같으냐?”
윤사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초에 너는 아직도 내가 왜 네 곁을 떠났는지 모르는 것 같구나.”
“아, 그래. 맞아.”
시종일관 웃고 있던 명의 표정에 순식간에 슬픔이 서렸다.
“말해줘, 누이. 누이는 도대체 왜 내 곁을 떠난 거야?”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명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왜 내 곁을 떠나, 그 같잖은 다른 세계의 신들 곁에 붙은 거야?”
“도깨비들이다.”
“이름이 어찌 됐든 간에 결국은 신이었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들.”
명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 녀석들은 인간들을 짓밟고 희롱했어!”
“너 또한 그랬지.”
윤사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명아,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구나. 우리는 인간들의 소망으로 인해 태어났다.”
신들에 의해 고통받던 그들의 아주 간절한 바람으로 이 세상의 ‘신’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인간들을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들로 봤지.”
아니,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
자신들을 탄생시킨 인간들을 제 기분에 따라 짓밟고, 또한 죽여 버렸다.
그래서 윤사희는 떠났다.
신들을 사냥하는 것도 그만뒀다.
윤사희의 말에 명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그건 누이도 마찬가지잖아! 나와 함께 인간들을 발밑에 무릎 꿇게 하여 세상을 누렸으면서!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아니, 명.”
윤사희가 명의 말을 끊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네 앞에 무릎 꿇었던 인간들을 직접 일으켜 줬었다.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차갑게 내뱉는 목소리에 명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그래, 내 사랑하는 누이.”
명이 애틋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이는 언제나 그랬었지. 그래서 누이께 더더욱 이런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어.”
명의 뒤로 그림자가 솟구쳤다.
윤사희의 것과는 다른, 붉은색을 지닌 그림자였다.
“누이는 아직도 인간이 좋아?”
“그럼, 당연하지.”
윤사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 내 인간이 되어 죽었지 않겠느냐?”
죽음을 입에 올리는 그 말에 명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이는 죽지 않았어!”
“아니, 죽었다.”
윤사희가 말을 정정했다.
“네 앞에 있는 나는 죽은 내 몸이 남긴 찌꺼기일 뿐이다. 네 놈이 이런 허튼짓을 벌였을 때에 맘껏 날뛰고 남긴 찌꺼기.”
그러니, 명아.
“우리 신나게 놀자꾸나.”
윤사희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두 눈으로 좇기 힘든 검격에 명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새겨졌다.
그럼에도 명은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누이, 그거 알아?”
붉은 그림자를 움직이면서.
“도깨비의 따님께서는 악신을 결코 물리치지 못할 거야.”
비릿하게 웃었다.
“도깨비의 따님께서는, 그래. 내 사랑하는 누이의 그 아이는 절망밖에 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악신의 먹이가 되겠지.
키득거리며 덧붙이는 말에 윤사희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휘두른 검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림자에 의해 단단하게 막혔지마는.
“혀가 길구나, 명아.”
상관없었다.
윤사희, 그녀 역시 그림자를 이용해서 싸우면 됐으므로. 그림자를 타고 올라간 윤사희가 명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절망하지 않을 거다.”
제 아비보다 단단한 마음을 지닌 아이가, 어찌 잡신 앞에서 절망할 수 있을까?
“리사를 걱정할 시간에 네 몸을 걱정하는 게 좋을 거다.”
윤사희의 검이 더욱 견고해졌다.
“나는, 못난 너와 함께 이 망가진 세상에서 절명할 생각이니.”
그렇게 해야만 ‘신’이란 존재 없이 이 세상이 다시 세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윤사희의 말에 명은 소리 없이 웃었다.
‘어리석은 누이.’
윤리사는 절망하며, 결국 악신의 먹잇감이 되고 말 거다.
왜냐하면, 그 악신은…….
***
“저세상.”
악신의 앞에서 나를 반기고 있는 남자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뱉는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동요하지 말자.’
저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뒀잖아. 그런데 왜 동요하는 거야? 정신 차려, 윤리사.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에.
“몰라서 묻는 거야?”
저세상이 물었다.
가슴을 차갑게 찌르는 질문에 입을 닫았다. 저세상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리사, 아해야.〗
“알아요.”
저세상이 악신을 불러낸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너는…… 정말 이 세상을 멸망시킬 작정이야……?”
제발, 빌었다.
저세상의 입에서 ‘아니.’라는 답이 나오기를.
그랬지마는.
“응, 맞아.”
저세상은 유쾌하게 대답했다.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리사.〗
천지해가 나를 잡아 주지 않았음 그대로 쓰러졌을 거다. 나는 대도깨비에게 몸을 기대며 저세상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일말의 희망마저 박살 내 버리다니.
‘못된 자식.’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자식 뺨을 꼭 때려 버리고 말 거다.
아니…….
‘죽여야지.’
도윤이를 생각해서라도.
저세상에 의해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저세상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온다고 해도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거짓말.”
저세상이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마뜩잖다는 얼굴에 나는 말했다.
“내가 네 거짓말도 알아차리지 못할까 봐?”
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집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너는 알고 있었잖아. 내가 결국 네 앞에 오게 될 거라는 것을 말이야.”
당장, 저세상은 몇 번이고 내가 자신의 앞에 찾아오게 되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말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고.
“저세상.”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성이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지금 내뱉으려는 말을 삼키는 게 좋을 거라고.
입 밖으로 내뱉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나는, 기어코 마음이 가는 대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 말에 저세상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늦었어.”
그러고는 미소를 그렸다.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잖아.”
저세상이 우리 가족을 배신한 것도, 도윤이의 아버지를 죽인 것도, 그렇게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그래도 그 과거를 토대로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갈 수는 있지.”
“세상이 멸망하면 미래 따위 아무 상관 없게 돼.”
“멸망하게 두지 않을 거야.”
나는 그림자 속에서 검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악신을 베어 버리고 세상에 다시 평화를 가져올 거거든.”
그러니까.
“비켜.”
명령이었다.
동시에 애원이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는 저세상이지만, 나는 결코 그를 베어 낼 수 없음을.
저세상은 내 주인공이었으니까.
최애도, 차애도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내가 읽은 모든 것의 주인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세상은 말했다.
“미안하지만, 윤리사. 네 앞에서 비킬 수는 없어.”
“저세상……!”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부르지 말아 줘.”
저세상이 애틋하게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비킬 수 없는 이유는, 네가 베어 낸다는 그 악신이.”
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바로 나거든.”
그 말과 함께,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입이.
“저세상!”
그를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