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악(惡)이란 것(3)
“그러니까, 리사. 네 말은 지금 악신만 처리하면 이 상황이 모두 정리될 수 있다는 거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흐음.”
내 연락을 받고,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 된 강남역으로 온 이운조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난 찬성.”
“이봐요, 이운조!”
이운조와 함께 강남역으로 온 선비가, 아니. 하현이 외쳤다.
“그렇게 쉽게 결정하면 어떻게 합니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휴, 잔소리.”
이운조가 듣기 싫다는 듯이 귀를 문지르고는 말했다.
“내가 그렇게 걱정이 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이 죽는다면……!”
하현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꾹 깨문 그 모습에 이운조가 물었다.
“내가 죽으면, 뭐?”
“됐습니다. 말 안 하렵니다.”
하현이 이운조한테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런 그를 그대로 둘 이운조가 아니었다.
“이 자식이 사람 답답하게 하네? 그러지 말고 말해봐. 내가 죽으면 네가 어떻게 되는데?”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스레 묻는 목소리에 결국 하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제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기껏 유랑단을 나왔는데!”
“유랑단을 나왔는데?”
그게 뭐 어쨌냐는 듯이 이운조가 하현의 말꼬리를 잡았다. 하현은 속이 타들어가는 얼굴로 그녀를 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 참, 바보 같은 아해들이구나.〗
대도깨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 다행이었다.
“나 역시 동감.”
나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유롭게 찻잔을 들던 윤사희가 키득거렸다.
“하현이라고 했나?”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그쪽은 이운조라고 했고.”
“네에, 뭐. 그런데…….”
이운조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쪽은 누구세요? 리사랑 같이 온 걸 보면 동료인 것 같은데.”
“나?”
윤사희가 자신을 가리키며 이운조에게 물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두 눈을 아주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이다.
“어, 음.”
이운조가 답을 고르는 사이.
“나는 이 녀석의 조상이다.”
윤사희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정확히는 증조할머니지.”
“그 말은, 그러니까.”
“사해, 그 녀석에게 있어 이 몸은 할머니란 말이다.”
“아아, 그렇구나.”
이운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하, 할머니…… 조상…….”
말을 더듬던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어깨를 붙잡고는 흔들었다.
“윤리사, 야!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누구를 데리고 온 거야?!”
나는 이운조의 손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그래도 아군이에요.”
“아군이고 자시고 수상하잖아! 네가 거주자의 후손도 아니고, 증조할머니란 사람이 왜 저렇게 젊은 건데?!”
그건 말이죠. 저 할머니가 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답니다. 생전 모습의 찌꺼기로 살아 있는 형태라고 할까요?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랬다가는 이운조가 나를 귀수산으로 돌려보낼 거다. 아무래도 아저씨 딸이 미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어쨌든 간에 나는 말했다.
“언니가 할머니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저희 아군인 건 확실하니 너무 걱정 마세요.”
“아니, 아군이고 자시고!”
“언니.”
나는 이운조의 말을 담담하게 끊은 후 입을 열었다.
“어서 평화를 되찾아야죠.”
이운조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저씨도 알아?”
“네, 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운조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모르는구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이운조였다.
“리사, 너도 참.”
이운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뭐. 악신인지 뭔지만 해치우면 다 끝날 수 있을 거라는데 뭔들 못하겠어?”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는 모든 게 끝난 후에 해 줘.”
이운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벌써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면 다 끝난 기분인 것 같단 말이야.”
“네, 언니.”
일 리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운조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기 무섭게 하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어떻게 하기로 했을 것같아?”
짓궂게 묻는 목소리에 하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이운조……!”
이운조가 그가 내뱉은 욕에 키득거리며 웃고는.
“잘 부탁해요, 어르신.”
윤사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사희가 그녀의 손을 맞잡고는 웃었다.
“나 역시 잘 부탁하네.”
이런 상황이니 탈쟁이였던 놈도 별 수 없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현도, 그리고 이운조도 합류했다. 하지만 순탄하게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
“리사,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언니.”
“멤버는 이게 끝이야?”
이운조가 사탕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악신이 있는 곳은 도깨비 님이 찾고, 그곳으로 하현이 데려다 주고, 그리고 처리하고.”
듣기만 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 처리할 상대가 악신이라는 것.
“우리만으로 괜찮을까?”
이운조의 걱정에 나는 솔직하게 답해 주기로 했다.
“괜찮지 않을 거예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예상외로 이운조는 내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아저씨라도 부를 생각이야? 아님, 리오나 리타?”
“세 사람 다 아니에요.”
“그럼?”
이운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나랑 너. 그리고 어르신하고만 움직이려고?”
“이운조, 저는 왜 빼는 겁니까?”
하현이 그녀의 말에 얼굴을 구기면서 태클을 걸었다.
“저도 함께 할 겁니다.”
“아서라, 가진 거라고는 괜찮은 이동 스킬이 전부인 네가 뭘 함께 해? 빠져 있어.”
“싫습니다.”
전직 탈쟁이는 단호했다.
“만약, 전투에서 저를 배제할 생각이라면 악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유치한 소리야?”
이운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하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야, 하현.”
이운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것 같아 나는 급히 말했다.
“괜찮아요. 대도깨비 님이 문을 열어주실 수 있으니까요.”
“이봐요, 도깨비의 따님!”
“리사에요, 윤리사.”
하현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윤리사라고 잘만 부르는 것 같더니, 왜 갑자기 또 도깨비의 따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딱히, 당신을 이름으로 부른 적 없는 것 같습니다만.”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하현은 내 말에 침묵을 고수했다.
자기가 불리할 것 같으면 입을 닫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알기 쉬운 성격에 키득거리며 웃고는 하현을 불렀다.
“오빠.”
“오빠?!”
하현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제 나이가 몇인 줄 알고 오빠란 소리를 지껄입니까?!”
“운조 언니한테도 언니라고 하는데요, 뭐.”
“이운조는 양심이 없는 거고요!”
하현의 삿대질에 이운조는 싱긋 웃기만 했다.
“어쨌든! 오빠 소리 집어치우고 확실히 하십시오!”
“뭐를요?”
“저 말입니다, 저!”
하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여러 차례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저, 데리고 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할 테니 꼭 데리고 가주십시오.”
이운조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에 웃었다.
“네.”
나를 보며 고개를 젓던 이운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리사, 너!’
그녀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운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현의 발목을 걷어차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왜 때립니까?!”
“답답해서 그런다! 누가 탈쟁이 아니랄까 봐!”
“저 이제 탈쟁이 아닙니다!”
“네네, 전직 탈쟁이 씨! 제가 잘못 불렀네요!”
이운조가 짜증스레 대꾸하며 휙 몸을 돌렸다.
하현이 그녀를 다급하게 쫓았다.
“사이가 좋구나.”
“깜짝이야!”
윤사희가 나를 보며 웃었다.
“내 기척을 읽지 못하다니. 아직 부족하구나, 리사.”
기척을 읽고 자시고.
“할머니 기척은 우리 아빠라도 읽지 못할 거예요!”
“그건 맞지. 귀신이니까.”
윤사희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리사. 말해 보렴.”
“네?”
“네가 준비한 패는 더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느냐?”
“연륜에서 나오는 짬밥이 대단한 것 같아서요.”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지 않소, 깨비 님?”
곰방대를 물고 있던 대도깨비가 키득거렸다.
〖사희, 너를 닮아서 그렇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아주 잘도 합니다, 깨비 님.”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대도깨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리사!”
내가 준비한 또 다른 패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