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그래서 나는(5)
“악신(惡神)……?”
이전, 태양신과 마찬가지로 온갖 악(惡)을 품고 있는 신을 말하는 것 같았다.
〖처음 듣는 얼굴이구나.〗
“네. 애초에 미지 영역이 무너져 내린 세계에 대한 정보 따위 제게 없는걸요.”
〖그래?〗
천지해가 놀랍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장천의, 그 녀석이라면 분명 네게 모든 걸 보여 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모든 걸 보여 주기는 했어요.”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아니. ‘윤리사’가 죽으면 어떤 식으로 모두가 파국을 맡게 될지를 보여줬죠.”
윤리오는 유랑단에 입단하여 ‘백정’의 길을 걷게 됐다. 윤리타는 그에게 몇 번이고 손을 뻗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자살했지.’
저세상에 의해 윤사해가 죽었단 사실에 더는 버티지 못한 걸 수도 있다.
피붙이라고는 이제 윤리오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을 동생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으니.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충분했어요.”
장천의도 그걸 알고 제한적으로 정보를 준 걸 테다.
이후의 일은.
“제가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겠죠.”
마땅히 그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생각해보니 장천의를 한 대 더 때릴 걸 그랬다. 아니, 아주 그냥 뺨을 때려 버릴 걸 그랬다.
‘시바.’
욕을 삼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는 거다.
“악신에 대해 얼마나 아세요?”
〖많은 걸 알고 있지.〗
대도깨비가 비릿하게 웃었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던 녀석이 바로 악신이었으니 말이다. 아, 물론 내가 말하는 세상이란.〗
“알아요.”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저세상이 넘어온 세상을 말하는 거잖아요.”
대도깨비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이 주인공으로 있던 세상.〗
내가 읽은 이야기의 무대.
〖그 세상의 모든 걸 파괴한 게 바로 악신. 참고로 저 녀석은 같은 신도 먹는 녀석이다.〗
“오.”
입술을 오므리며 감탄하자마자 대도깨비가 말했다.
〖그 수만큼 인간 역시 먹었지.〗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하긴, 같은 신도 먹는데 인간이라고 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처리하는 방법은요?”
〖으음.〗
대도깨비가 곤란하다는 듯 난처하게 웃었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솔직하게 말해 주리?〗
“네.”
악신이든 뭐든 적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알아두는 편이 좋았다.
내 대답에 천지해가 말했다.
〖우선, 없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 때문에 굳이 실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사.〗
그때, 대도깨비가 나를 부드럽게 부르며 말했다.
〖내가 없다고 말한 이유는, 저 녀석이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나를 향해 대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언제인가 네게 말했지. 나는 땅과 하늘, 바다가 존재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다고 했었죠.”
가로채며 내뱉은 말에 천지해가 싱긋 웃었다.
마치, 기특하다는 듯이 말이다.
‘나 참.’
어린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요?”
천지해가 나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든, 아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저 악신에 대한 정보였다.
답을 채근하는 내 목소리에 대도깨비가 말했다.
〖똑똑한 내 계약자라면 진작 알아차렸을 것 같다만, 나는 무수히 많은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장천의에게 되돌려진 그 수많은 세계를…….
〖이 몸은 기억하고 있지.〗
천지해가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물론, 내 기억 속의 악신은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 그러나 죽지만 않았지, 그 직전까지 몰아놓은 적은 많지.〗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당연히 악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사람은 저세상이겠죠?”
대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죽이는 건 모두 실패했지.〗
“악신을 죽이기도 전에 저세상이 죽어서요?”
〖똑똑하구나.〗
정답이란 말이었다.
이어 대도깨비는 말했다.
〖저세상, 그 아이가 죽으면 멸망했던 세계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래.〗
대도깨비가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네 오빠들이 납치를 당하기 전의 시간으로 말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사해는 지하 길드와 손잡고 제 아이들을 납치한 서차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그렇게 시작됐겠지.’
저세상이 이끌어 나가야 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말이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를 다시 보는 건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단다.〗
대도깨비가 말하는 건, 어느 책의 완결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의 종말.
대도깨비는 그를 ‘끝’이라 말하며 웃음을 흘렸다.
〖무슨 영문인지, 다른 녀석들은 이전 세계에 대한 기억도 없고. 내 얼마나 쓸쓸했는지 아느냐?〗
“쓸쓸했던 게 아니라, 씁쓸했던 것 아닌가요?”
대도깨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것도 잠시뿐.
〖아하하하!〗
천지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계약자께서는 정말이지, 참 재미나단 말이지.〗
장천의가 나를 왜 ‘주인공’으로 내세웠는지 알 것도 같다며 천지해가 키득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장천의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수도 없이 시간을 되돌리며 종말이 아닌 다른 끝을 위해 노력했다고 해도.
‘결국, 포기한 작자잖아.’
저세상의 의견 따위 묻지도 않고 그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랬으면서 저세상이 계속 실패하자 끝내 그를 포기했다.
아니, 버렸다.
‘대도깨비 님이 말했었지?’
장천의가 악신의 데이터를 데려왔을 리가 없다고.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망할.”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됐어.’
저세상은 적이다.
윤리오와 윤리타를 상처 입히고, 끝내 백시준까지 죽인…….
‘적.’
그러니까 그에 대해 동정을 가지거나 그런 건 그만둬야 하는데.
〖리사?〗
저세상과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할수록 심란해지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 따위 없었다.
대도깨비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 세상에 나타난 악신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또 하나의 적이었으니까.
“그래서 악신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뭐예요?”
〖없다고 했지 않느냐?〗
“물론, 그랬죠. 하지만 그건 저 악신이 죽은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거잖아요?”
붉은 하늘을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말해 줘요.”
감히 예상해보건대, 그 신을 처리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올 것 같았다.
미지 영역을 닫든, 닫지 않든.
“대도깨비 님.”
천지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처연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도깨비 님?”
〖아해야.〗
“네.”
대도깨비가 한숨을 내쉬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죽을 수도 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아요.”
이제 와서 그런 게 두려울 리가 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대도깨비가 예상했다는 듯이 픽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멍하니 대도깨비를 쳐다봤다. 그는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내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네가 말했지 않느냐? 장천의가 ‘윤리사’란 존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보여 줬다고.〗
“그건…….”
막상 입술을 뗐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장천의가 보여 준 건 어디까지나 일곱 살의 ‘윤리사’가 죽은 후의 이야기일 뿐.
‘만약, 내가 죽는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친구들은?
나와 인연을 맺은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게 되는 거지?
〖리사.〗
다정한 목소리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질문들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대도깨비가 훌쩍 커진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신을 죽이는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다. 아, 내가 말하는 죽음이 소멸을 말하는 건 알고 있겠지?〗
“……네.”
거주자에게 있어 죽음은 곧 소멸이다.
〖악신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네가 온전히 받아들이면 된다.〗
“네?”
〖말 그대로 악신이 담고 있는 힘을 네 것으로 만들면 끝이란 거다. 인간인 네가 새롭게 악신이 되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무엇이라 말하기도 전에 망할 대도깨비가 웃었다.
〖신이었으나 인간이 된 존재도 있지 않느냐?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을,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