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그래서 나는(4)
“나는 믿어. 리사는 강하거든.”
비가 퍼붓는 날, 자신에게 우산을 건네주던 작은 손은 단단했으니.
“그러니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야.”
윤리오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서차윤을 노려봤다. 서차윤은 그 매서운 눈빛에 웃으며 물었다.
“리오는 못 믿나 보구나?”
“내가 왜 못 믿어!”
윤리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윤리타가 살아있는 세계잖아?”
바보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세계의 ‘윤리타’와는 다르게.
“그리고 나도 살아 있잖아? 두 눈 잘 뜨고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거 아니야?”
유랑단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백정’이 됐던 자신과는 다르게.
마지막으로.
“바보 같은 아버지도 있잖아.”
윤사해를 언급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윤리오가 그 위에 미소를 덧씌우며 말했다.
“나도 믿어.”
단지, 걱정될 뿐이었다. 또한, 미안할 뿐이었다.
서차윤이 말하는 ‘윤리사’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도 그랬다. 그 아이의 세계로 넘어간 악신은 꽤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미지 영역이 무너지면서 나타난 거주자들.
악신은 그들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힘을 키운 녀석이었다.
수많은 각성자가 그를 죽이고자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당연히 그 각성자 중에는.
‘저세상도 있었지.’
그 누구보다도 악(惡)을 증오하는 녀석. 하지만 저세상은 결국 그 악에 패배했다.
그렇게 이 세상은 버려졌다.
“서차윤.”
윤리오가 그 씁쓸한 사실을 상기하며 서차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이 세상에 희망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그럼, 당연하지.”
서차윤이 싱긋 웃었다.
“리오가 있잖아?”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있고. 물론, 거주자님이신 랑야 님도 계시지.”
〖하!〗
랑야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너희를 도울 마음 따위 단 하나도 없다.〗
“에이, 거짓말!”
서차윤이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까지 저랑 리오를 얼마나 많이 구해 주셨는데! 쑥스러워서 그런 말 하시는 거죠?”
랑야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잠시 서차윤을 쳐다보고는.
〖내가 말을 말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서차윤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는 웃었다.
“곧 돌아오시겠지.”
랑야는 언제나 그랬다.
매몰차게 사라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줬다.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한숨 좀 자자. 악신도 넘어갔고, 대부분의 거주자는 사라졌잖아.”
악신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만 먹지 않았다. 그는 같은 거주자 역시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세상을 완전히 파괴하나 했더니 아니었다. 장천의가 이 세상을 버린 후 악신은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그렇지만 영영 잠들 줄 알았던 악신은 다시 움직였고, 도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건지 장천의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생각해 보면…….’
저세상도 그랬다.
모두를 잃고서 그대로 좌절할 줄 알았던 망할 녀석은 어느 순간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죽은 건 아니었다.
‘악신처럼 다른 세계로 넘어갔을 뿐이지.’
역시 어떻게 그 세계로 넘어간 건지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할 일은 없어.’
정확히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지마는.
“망할.”
윤리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험한 목소리에 서차윤이 픽 웃었다.
“리오야, 나쁜 말은 쓰면 안 돼요. 착한 말만 써야지.”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아, 하긴. 우리 리오는 지금 이 삼촌보다 나이가 많지? 형이라고 불러줄까?”
“미친 새끼.”
윤리오가 소름이 돋은 팔을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차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적, 윤사해를 놀릴 때에 그 역시 저렇게 반응을 했기 때문이다.
“역시, 리오는 사해를 참 정말 많이 닮았다니까?”
“끔찍한 소리 그만하고 닥쳐.”
윤리오가 서차윤을 등진 채 몸을 눕혔다. 그의 뒤에서 서차윤이 정말 자냐면서 물었지만 윤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흠, 자나 보네. 저런 것도 사해를 똑 닮았다니까.”
라면서 중얼거리는 말에는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검을 들 뻔했지마는 말이다.
‘말을 말지.’
윤리오가 두 눈을 꼭 감았다.
‘리오야, 너는 리사를 못 믿니?’
서차윤이 웃으며 건네던 질문이 떠올랐다.
‘못 믿기는.’
다른 세계의 윤리사.
윤리오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이지만 그는 믿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궁금했다.
‘얼마나 예쁘게 자랐을까?’
제 손을 꼭 잡던 어린 손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리오 오빠!’
자신을 부르며 맑게 웃던 얼굴도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리사? 리사! 안 돼, 제발, 응? 리사! 윤리사!’
차갑게 식은 채로 죽어 버린 그 모습이…….
“시발.”
선명하게 떠올랐다.
“리오야? 자는 거 아니었어?”
서차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윤리오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리오야, 왜 그래?”
서차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윤리오가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린 후 입을 열었다.
“서차윤.”
“응?”
“리사…….”
부르는 이름에 입술이 버석하게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윤리오가 말을 삼켰다.
그러지 않으면 서차윤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온갖 말을 쏟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천의에게 악신에 대해 경고를 해 줄 것이지, 도대체 뭐하러 그 자식을 만난 거냐고. 그러다 리사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윤리타는?’
빌어먹을 아버지 또한 죽으면 대체 어떻게 할 거냐고.
“됐어.”
윤리오가 얼굴을 구겼다.
서차윤에게 무슨 말을 토해내든 화풀이밖에 되지 않았다.
서차윤은 다시 자신을 등진 채로 돌아누우려는 윤리오를 물끄러미 보다가.
“뭐야?!”
그를 꼭 안아 줬다.
“안 놔?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놔!”
윤리오가 서차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게 끌어안을 뿐.
“야! 서차윤!”
참다못한 윤리오가 화를 냈을 때.
“괜찮아, 리오야.”
서차윤이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지 다 알아. 하지만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윤리오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릴 적, 서차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달래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모두 행복했을 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서 말이다.
‘리오, 왜 울어?’
‘아빠한테 혼났어! 윤리타가 먼저 때려서 나도 같이 때린 건데!’
‘그래도 동생을 때리면 안 되지.’
‘삼촌도 나 혼내는 거야?’
‘설마, 그럴 리가.’
기억에서 영영 지워버렸던 어릴 적의 추억이 떠올랐다.
‘왜?’
윤리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에게 있어 이 기억은 추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었다.
‘아빠는 리오 싫어해?’
‘아니. 좋아해. 삼촌은 네 아빠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지 다 알아. 그래서 알 수 있어.’
‘진짜?’
‘응, 그럼.’
서차윤, 이 빌어먹을 자식.
‘그러니까 뚝하자, 우리 리오.’
윤사해 못지않게 자신을, 아니. 자신들을 사랑해 놓고 무참히 배신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달래 주고 있는 꼴이라니.
“시발…….”
그 위로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라니. 윤리오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싫어.”
“응, 괜찮아.”
서차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훌쩍 자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것을.
“괜찮아, 리오야. 네 동생들도, 네 아버지도 모두 괜찮을 테니.”
그래, 분명 그럴 거다.
‘뭐, 물론.’
서차윤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소 당황은 하겠지.’
그 말대로였다.
***
“대도깨비 님.”
〖오냐.〗
“저게 도대체 뭐예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하늘은 왜 저래요?”
미지 영역이 무너진 이후, 맑은 날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왜 저렇게 빨간 거죠?”
저런 식으로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장천의에게 다녀온 시간은 꽤 짧을 터. 그사이에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흐음.〗
천지해가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곤란한 녀석이 나타났구나.〗
“곤란한 녀석이라고요?”
〖그래.〗
대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의, 그놈이 저 녀석의 데이터는 데리고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알아듣게 말해 줘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질문에 곧 대답이 들려왔다.
〖악신이 넘어왔다, 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