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그래서 나는(3)
“그렇지만 제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수십, 수백 개의 화면이 빈틈없이 채워진 공간. 그곳에 드러누운 채로 장천의는 읊조렸다.
저세상이 주인공이었던 세계를 버린 후, 그 정보를 바탕으로 윤리사가 주인공인 세계를 만든 것에 후회는 없다.
당장, 최설윤이 살아 있지 않은가?
계속되는 싸움에 그 고운 얼굴에 흉터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잖아.”
장천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에게 있어 이 세계는 마지막 기회였다. 서차윤이 제 곁에 붙어 있다면 몰라, 그는 떠나버렸다.
그것도 자신이 버린 세계로.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분기점을 만들어냈던 그가 사라졌으니, 장천의는 더는 세계를 돌릴 수 없었다.
“망할…….”
장천의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이 잘못된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왜?’
도대체 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된 걸까?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윤리사.’
자신이 주인공으로 정한 아이.
그 아이가 저를 똑바로 노려보며 내뱉은 말 때문인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찾았어야지. 몇 번을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았어야지!”
윤리사는 자신이 겪은 절망을 알지 못한다.
‘저세상이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았어야지!’
그래서 그런 소리를 지껄인 게 분명했다. 때문에 장천의는 또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 뭘 안다고 지껄입니까?! 저는 몇 번이고 찾았습니다! 수십, 수백, 수천!’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을 구할 방법을 강구했다.
“아니지…….”
장천의가 읊조렸다.
자신이 세상을 구할 방법을 찾은 게 아니었다.
‘천의 씨, 사랑해.’
자신이 사랑했고 또 사랑하는 단 하나뿐인 연인.
최설윤을 구할 방법을 찾은 거다.
윤리사는 그런 자신을 꿰뚫어 본 게 분명했다.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은 지금 그 모습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그러니 그런 말을 했겠지.
장천의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최설윤이 지금 자신을 보면, 분명 한심하다며 이마를 쥐어박을 거다. 대체 그동안 무슨 한심한 짓을 벌인 거냐며 잔소리도 하겠지.
“생각해 보면 포상인데.”
최설윤이 제 이마를 때리는 것도, 제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장천의에게 있어서는 모두 포상이었다.
“나도, 참.”
장천의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정말 글러먹었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장천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차윤?”
짓궂게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 서차윤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놀라는 건 나중에 해.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서차윤이 장천의의 말을 끊고는 물었다.
“장천의, 너.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지?”
장천의가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하지요.”
최설윤을 위해서라도 이 세계는 결코 멸망해서는 안 됐다.
장천의의 대답에 서차윤이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
장천의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서차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이해했기에 묻는 소리였다.
서차윤은 장천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지금 네게 기회를 주는 거니까.”
서차윤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서차윤!”
장천의가 다급하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아니, 닿기는 했다.
뻗은 손이 그대로 몸을 통과한 게 문제였지.
“서차윤!”
“응, 장천의.”
서차윤이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장천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렇게 장천의와 눈을 맞춘 그가 웃는 낯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잘 생각해. 네가 이 세상에 계속 남아 있는 게 옳은 선택인지.”
장천의가 표정을 굳혔다. 그와는 다르게 서차윤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흐릿해지던 몸이 이윽고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랬다.
“서차윤…….”
장천의가 멍하니 그를 불렀다.
물론, 부른다고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었다.
서차윤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
***
“서차윤? 서차윤!”
서차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눈을 떴다.
‘돌아온 건가?’
서차윤은 흐릿한 시야에 몇 번 두 눈을 깜빡거렸다. 곧, 흐릿했던 시야가 멀정하게 돌아왔다.
“오, 깨어나자마자 보는 얼굴이 우리 리오 얼굴이라니. 나 설마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윤리오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미친놈.’
마음 같아서는 서차윤에게 온갖 욕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장천의는 만났어?”
“응, 만났지.”
서차윤이 지끈거리며 올라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리오야, 이거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아팠다.
관자놀이를 눌러도 두통이 나아지지를 않았다.
“엄살 피우지 말고.”
“엄살 아니야. 진짜 아프다고. 우리 리오는 참 매정하단 말이야.”
“닥쳐.”
윤리오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애초에 당신이 간다고 했잖아.”
“그야, 그러지 않으면 리오가 갔을 테니까.”
서차윤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리오가 갔음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했을걸? 그럼, 이 삼촌은 이 세계에 홀로 남게 됐을 거야. 저 무뚝뚝한 랑야 님과 함께 말이지.”
〖머리 아프다면서 끙끙 앓더니 다 거짓이었던 모양이군.〗
곰방대를 물고 있던 랑야가 짧게 혀를 찼다.
〖그래서 소득은?〗
“맞아! 장천의에게 전했어?”
윤리오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 맞다.”
서차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는 걸 잊어버렸네.”
“뭐……?”
윤리오가 멍하니 물었다가 곧장 서차윤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죽고 싶어?! 그럼 도대체 그 망할 자식은 왜 찾아간 거야!”
“아니, 잠깐. 리오야, 진정해봐.”
“진정은 무슨!”
윤리오가 버럭 소리 질렀다.
“곧, 그 세계는 완전히 멸망하게 될 거야! 이 세계와 다름없이 되고 말 거라고!”
장천의가 내다 버린 세계에 곤히 자고 있던 ‘악(惡)’이 깨어나 그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그걸 경고하기 위해 서차윤은 이 세계에 남은 대도깨비의 힘을 통해 원래 있던 세계로 넘어갔다.
‘그랬는데, 이 망할 자식이!’
윤리오가 당장에라도 서차윤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리사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만 두지 않을 줄 알아.”
“물론, 당연히 그래야지.”
서차윤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당신이 어떤 기회를 날려버렸는지 알기는 해?”
〖그래, 서차윤.〗
늑대의 모습을 취한 랑야가 붉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는 지금 그 세계가 악신에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그냥 날려 버리고 왔다.〗
랑야의 얼굴이 윤리오와 똑같이 일그러졌다.
〖내 딸에게.〗
사위는 모르겠고.
〖내 딸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너의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서차윤이 실없이 웃었다.
눈 앞의 늑대는 단 한 번도 그의 손주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른 세계에 있는 제 딸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고 있단 것에 저렇게 반응하다니.
“와, 살벌해라.”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서차윤은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서차윤,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그만 웃고 말해.”
윤리오가 일그러진 얼굴로 서차윤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물었다.
“장천의가 있는 세계로 넘어가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으음.”
서차윤은 태연했다.
윤리오가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벨 것처럼 굴고 있는데도 굴었다.
곧, 서차윤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장천의에게 선택할 기회를 줬어.”
“기회?”
윤리오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서 너는 겨우 얻어낸 소중한 기회를 날려 버리고 온 건가?!”
“오, 리오야. 방금 전에 완전 사해 같았어.”
“서차윤!”
자신과 도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윤리오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드는 찰나.
“리오야, 너는 리사를 못 믿니?”
서차윤이 상냥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