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그래서 나는(2)
장천의는 당황했다.
어느 순간부터 세계를 되돌린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습을 감춰버린 그였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서 사랑했고 사랑하는 연인한테서까지 숨은 그였는데.
“서차윤,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찾아왔단 말인가?
장천의의 두 눈이 흔들렸다. 당혹감에 물든 그를 보며 서차윤은 히죽 웃었다.
“궁금하지? 내가 어떻게 너를 찾은 건지? 그것도 나는 이미 죽은 몸인데 말이야.”
서차윤의 말대로였다.
그는 이미 친우였던 윤사해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몸.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지?’
장천의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이번에는 또 무슨 변수가 생긴 걸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헉……!”
장천의가 숨을 들이 삼켰다.
서차윤이 어느 순간 그의 코앞에 다가와 목을 졸랐기 때문이다.
“이대로 너를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될까?”
서차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발, 죽여 봤자 소용없겠지? 네 망할 스킬이 세계를 다시 되돌릴 테니까. 안 그래?”
목을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장천의가 기침을 터트리며 쓰러졌다. 서차윤이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항상 궁금했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계인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건지.”
서차윤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왜 리오와 리타를 납치해야만 하는지. 왜 사해의 손에 죽어야 하는지. 그러지 않으면, 왜.”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이내 버럭 소리 질렀다.
“왜!”
그러고는 장천의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너 때문이었어. 네가 나를 계속 그렇게 몰아붙이고 있었던 거야.”
지하 길드와 손을 잡고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납치하도록.
그로 인해 죽도록.
“맞지, 장천의?”
묻는 목소리에 장천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해!”
서차윤이 당장에라도 그를 씹어 죽일듯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장천의가 웃음을 터트린 건 그때였다.
“웃어?”
“그럼, 울까요?”
장천의가 능청스럽게 대꾸한 후, 자신의 멱살을 잡은 손을 힘겹게 떼어냈다.
“무엇보다, 서차윤 씨. 제가 답을 들려드린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집니까?”
“뭐……?”
장천의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당황한 듯, 동요하고 있는 그를 보며 장천의가 말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저를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천의가 흐트러진 차림새를 바로 정돈한 후 말했다.
“이 세계는 제대로 된 끝을 맺을 때까지 몇 번이고 되돌아갈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그렇게 되돌아간 세상에서 서차윤은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할 거다.
소중한 친구의 행복을 위해.
“하, 하하!”
서차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끝? 끝이라고?”
이어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끝이란 게 있어?”
서차윤이 기억하는 세계만 해도 수십, 수백에 이르렀다.
어쩌면 수천일 수도 있었다.
“네가 원하는 끝이 뭔데? 세상의 멸망?”
“설마요.”
장천의가 미소를 그렸다.
“세상의 멸망이라면 제가 왜 굳이 계속 세계를 되돌렸겠습니까?”
“그럼 도대체 왜 이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는 건데!”
서차윤이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이 세계는 글러 먹었다는 걸! 네가 암만 이 세계를 되돌려도 멸망해! 다 죽어 버린다고!”
자신을 죽인 친구도, 그 친구의 아이들도.
“모두 죽어!”
그리고 다시 시작됐다.
“차라리 내 기억이라도 온전하게 남겨 주던가!”
그러나 서차윤은 언제나 죽은 후에 모든 걸 기억해냈다.
수없이 죽어간 기억들을 말이다.
괴로움에 울부짖듯이 목소리를 토해내는 서차윤을 보며 장천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남겨 줬었습니다.”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 아닙니다.”
장천의가 서차윤의 말을 끊었다.
“당신에게 과거의 기억을 남겨 준 적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죽기 전의 기억을 말이죠.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황만 악화됐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 기억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기억한다고 해도 불분명한 꿈과 같이 기억하게끔 만들었다.
“서차윤, 저는 당신의 생각보다 꽤 오래 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서차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미 망가진 세계야. 그런데 왜 도대체 계속 되돌리며 유지하고 있는 건데?”
일 리 있는 말이었다.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도 결국 같은 끝을 맞이하고 있는 세계.
포기하는 게 옳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끝을 맺는 걸 원하거든요.”
장천의가 싱긋 웃었다.
“바로, 저 주인공에 의해서요.”
“주인공……?”
장천의의 뒤로 가득 찬 화면은 단 한 명의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세상?”
“네, 그렇습니다.”
장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저 아이가 제가 정한 주인공입니다. 이 세계를 구해 낼 단 한 명의 주인공이죠.”
그가 희망찬 얼굴로 읊조렸다.
서차윤은 물끄러미 장천의를 보다 비웃었다.
“주인공 좋아하시네.”
그러고는, 성큼. 장천의의 앞에 다가서며 재잘거렸다.
“네가 말했지? 내 생각보다 너는 이 자리를 꽤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고.”
그 말은, 즉.
“저 애새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보람도 없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실패했다는 거잖아?”
몇 번이고, 셀 수도 없이.
“그런데 주인공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장천의가 표정을 굳혔다.
틀린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장천의, 너는 실패할 거야.”
“닥치십시오.”
장천의가 일그러진 얼굴로 서차윤을 향해 경고했다.
“당신은 제 성공을 바라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해의 손에 계속 죽을 테니?”
서차윤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상관없어. 내가 죽어서 사해가, 그리고 애들이 더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좋아.”
그 세계의 끝이 데드 엔딩으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괜찮았다.
결국, 눈 앞의 남자가 다시 시간을 되돌릴 테니까.
그렇게 다시 만날 테니까.
“그러니까 네 장단에 맞춰 줄게.”
서차윤이 일그러진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어디 한 번 열심히 노력해 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끝을 맞이할 수 있도록.”
비웃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그는 저세상을 비추고 있는 화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정한 주인공이 과연 언제 네가 원하는 끝을 가져다줄지 정말 기대되네.”
그 말을 끝으로 서차윤은 모습을 감췄다. 이후, 세계가 다시 멸망하고 장천의가 다시 몇 번을 돌렸다.
결과는 같았다.
장천의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그의 연인은 끝에서 언제나 죽었다. 끝까지 가기도 전에 죽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장천의는 다시 모든 시간을 되돌렸다.
“안녕, 장천의 회장?”
제게 건네는 인사를 다시 듣기 위해서.
“오랜만입니다, 최설윤 길드장님.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장천의는 포기하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되돌렸다.
하지만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장천의, 너는 실패할 거야.’
서차윤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실패했다.
아니, ‘저세상’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 세계는 실패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변수는 나타날 대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 변수를 처리할 대로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던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에서 또 어떤 변수가 나타나는 걸까? 그 변수를 또 얼마나 처리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이 빌어먹을 세계를 얼마나 되돌려야 하는 걸까?
“아…….”
차라리 죽고 싶었다.
혀를 깨물고, 목을 긋고, 그렇게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죽는 순간, 멋대로 세계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새로 시작했으니.
장천의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꾹 깨물었다. 두 손 역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주먹 쥐었다.
‘천의야, 기억하렴. 너는 세상한테서 사랑받는 존재란다.’
세상한테 사랑받는 존재는 무슨.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저주받는 존재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 추락한 장천의의 앞에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한 변수가 눈에 띈 건 그때였다.
“윤리사.”
저세상이 각성자가 되는 계기를 주는 던전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아이.
변수라고 하기에는 되돌린 세계에서 머무는 시간이 극도로 짧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아이였다.
분명 그랬는데.
“윤리사가 주인공이라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눈이 돌아간 장천의는 곧장 ‘윤리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래, 장천의는.
“안녕하십니까, 리사 양.”
자신의 주인공을 버렸다.
“리사 구해 주러 온 거예요?”
“죄송하지만 그건 아니랍니다.”
그렇게 새로운 주인공을 맞이할 무대를 창조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