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지키기 위해(5)
‘저는 당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위 없어요.’
장천의가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윤리사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면서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천의 삼촌의 절망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했죠?’
그래, 아무도 모른다.
‘저는 알아요.’
윤리사가 암만 그렇게 말했어도 모를 거다. 장천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 아이는 모를 거다.
절대로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도대체, 왜 그 아이가 자신이 느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이 계속 드는 걸까?
“드디어 나도 미친 모양이지.”
장천의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은 지금 그 모습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장천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신을 비아냥거리며 조롱하던 목소리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분명 욕하겠지요.”
장천의는 일그러진 미소를 내보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분명 욕할 겁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벌인 일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온갖 욕을 하면서 주먹을 휘두를 거다.
“그 작은 주먹을 생각하면, 맞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장천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면 중 하나를 쳐다봤다.
검은 머리칼을 질끈 묶은 여자가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장천의는 물었다.
“그렇지요, 최설윤 길드장님?”
장천의는 생각했다.
최설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정확히는, 이 시간이 아닌 아주 오래전의 첫 만남을 말이다. 최설윤은 결코 알지 못할 시간이었다.
***
“천의야, 기억하렴. 너는 세상한테서 사랑받는 존재란다.”
장천의는 그 말을 들으며 어른이 됐다.
세상한테서 사랑받는 존재라니.
도대체 어떤 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인 걸까?
하지만 장천의는 부모에게 묻는 대신 웃으며 대답했었다.
“네.”
그렇게 스무 살, 아이는 성인이 되자마자 CW를 물려받게 됐다.
스무 살의 젊은 청년은 물려받은 CW를 공격적으로 키워나갔다.
애초에 장천의에게는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AMO의 강산에 본부장은 물론, DMO의 본부장까지. 또한, 여러 길드의 길드장들까지 만났다.
그들 중 친하게 지낸 사람은 바로 윤사해였다.
“고객님! 계십니까?!”
“장천의 회장.”
장천의는 심심할 때마다 두 손에 선물을 가득 들고 그를 찾아갔다.
“천의 삼촌!”
그럴 때마다 윤사해를 꼭 닮은 작은 아이들이 제 품에 안겨 왔기 때문이다.
“리오 군, 리타 군!”
장천의가 활짝 웃으며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새 또 자란 것 같군요! 살도 찐 것 같고요!”
“장천의, 좋은 말로 할 때 우리 애들 내려놓게.”
“맞아, 장천의 회장. 그러다 애들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사해가 가만두지 않을걸?”
윤사해의 곁에는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조언입니까, 서차윤 씨?”
이매망량의 부길드장인 서차윤.
그가 장천의가 던진 질문에 웃어댔다.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다.
장천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 안은 아이들을 내려놓았다.
“자, 이 삼촌이 선물을 사 왔으니 저기 앉아서 뜯어보시지요.”
“네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까르르 웃으면서 달려갔다.
“윤리오, 윤리타.”
그런 아이들을 윤사해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아이들이 곧장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장천의를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삼촌!”
장천의가 종달새처럼 짹짹거리며 인사하는 목소리에 헤실거렸다.
“우리 애들을 향해 기분 나쁘게 웃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윤사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천의는 계속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에이, 고객님! 저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구십니다!”
“치워.”
윤사해가 장천의의 팔을 가볍게 쳐내고는 말했다.
“앉아있게. 차를 내오지.”
“네넵!”
장천의가 유쾌하게 대답하고는 익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서차윤은 윤사해를 따라 주방에 들어가서는 그를 도왔다.
아니, 그를 놀렸다.
“사해야, 차를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면 안 되지! 장천의 회장 독살하려는 거야?”
“시끄러! 저리 좀 꺼져!”
“허억, 사해야! 그런 말도 하면 안 되지! 리오랑 리타가 너한테서 못된 말 배우면 어떻게 하려고!”
주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장천의는 키득거렸다. 언제 봐도 참 사이좋은 두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사해가 장천의의 앞에 차를 내주었다.
“사해야, 나는?”
“잘난 네가 알아서 우려먹어.”
“너무해라.”
서차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윤사해가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가 다시 주방으로 떠난 후, 서차윤이 곧장 장천의에게 말을 걸었다.
“장천의 회장, 혹시 최설윤 길드장이라고 알아?”
“최설윤 길드장님이요?”
“응, 알아?”
“네, 이름은 들어 봤습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요.”
“그래?”
서차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장천의 회장이라면 당연히 만난 적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장천의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생각해보니 신기하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만난 적이 있는데…….”
최설윤은 아니었다.
“그럼, 이번에 만나볼래?”
“네?”
“사실, 이번에 파티가 있거든.”
“파티라니.”
장천의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어느 파티든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는 장천의였다. 애초에 그에게는 항상 초대장이 넘쳐나도록 왔었다.
“이럴 줄 알았지.”
서차윤이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장천의의 얼굴에 웃으며 초대장 하나를 꺼냈다.
“이번에 최설윤 길드장이 여는 파티야. 사실, 파티라고 하기에는 지하 길드들 같이 쳐부셔 줄 사람 찾는 모임에 가깝지만.”
“흐음.”
장천의가 서차윤한테서 초대장을 받은 후 미소를 그렸다.
“좋습니다. 한 번 참석해보지요.”
그렇게 장천의는 최설윤이 여는 파티에 참석하게 됐다.
참석하고 나니 최설윤이 왜 자신한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지하 길드를 파괴하는데 진심이었다.
‘저러다 일찍 죽을 텐데.’
장천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CW의 회장은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최설윤이 지하 길드를 쳐부수는 과정에서 자신한테 피해만 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 뿐.
그렇게 며칠이 지난 날.
“회장님! 큰일입니다! CW가 지하 길드에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장천의는 지하 길드와 지독하게 얽히게 됐다.
“정확히 어느 백화점이 점령당한 겁니까?”
“강서구점인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AMO에 연락 넣고, 이매망량한테도 연락을 넣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장천의는 곧장 지하 길드에 점령당했다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지하 길드라고 해도 유랑단이 아닌 이상 오합지졸들 뿐일 터.
‘내가 처리할 수 있겠지.’
장천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지하 길드를 제압하고자 나섰다.
하지만 그가 나설 일은 없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CW를 침입한 지하 길드는 이미 제압당한 상태였다.
“장천의 회장 아니야? 저번 파티에서 봤었지?”
최설윤이 멱살을 잡고 있던 지하 길드원을 바닥에 던지고는 웃었다.
“늦었네?”
“그, 그게…….”
장천의가 곤죽이 된 지하 길드원들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장천의 회장?”
“아, 그게. 이것, 참. 도움을 받았군요.”
장천의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도움은 무슨.”
최설윤이 픽 웃고는 말했다.
“조카랑 쇼핑하러 왔다가 휘말린 것뿐이야.”
휘말려요? 누가요? 지하 길드원들이 당신한테요?
장천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입을 닫고 있기로 했다.
“그럼, 장천의 회장이 왔으니 나는 이만 가볼게. 손해배상 청구할 거 있으면 전화해.”
최설윤은 그렇게 떠났다.
아니, 떠나려고 했다.
“장천의 회장?”
장천의가 그녀를 붙잡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장천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시 자신이 왜 최설윤을 잡은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천의 회장? 손 좀 나줄래? 아님, 할 말이라도 있어?”
들려온 목소리에 장천의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응?”
최설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장천의는 말을 쏟아냈다.
“최설윤 길드장님 덕분에 피해가 크지 않았으니까요! 다친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 일입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
장천의가 우렁차게 외쳤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최설윤 길드장님 번호 모릅니다!”
그게 최설윤과 장천의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