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그래도 희망은 있다(5)
결과적으로, 윤사희는 내 부탁을 들어줬다.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 그때까지 네가 이곳을 지켜야만 한다. 알겠느냐?”
“네, 할머니.”
“그래. 사해, 그 녀석에게는 네가 알아서 잘 말해 주거라.”
“알겠어요.”
“대답은 잘하지.”
윤사희가 짓궂게 웃고는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그녀가 두 눈을 감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윤사희를 중심으로 그림자가 피어났다.
파앗!
윤사희를 중심으로 나타난 그림자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와…….”
사방으로 뻗어 나간 그림자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천지해는 담담한 반응이었다.
〖장천의를 찾기 전까지 사희는 계속 이 상태일 거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든 듣지 못하겠지.〗
“그래요?”
대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희, 이 녀석은 이런 상태에서는 무방비하니, 이 녀석을 지켜줄 놈을 몇 명 부르는 게 좋을 거다.〗
“알겠어요.”
이곳은 이매망량.
윤사희를 지킬 사람은 넘쳐났다.
‘문제는 다들 바쁘다는 건데.’
거주자들을 피해 이매망량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찬 상황인데, 윤사희를 지킬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윤사해는 안 돼.’
이매망량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윤리오랑 윤리타는…….’
저세상에게 당한 상처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광혜원이 두 사람 곁에 붙어서 계속 치료 중이지마는.
‘회복이 더디네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광혜원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었다.
‘나는…….’
안 된다.
윤사희는 내게 자신을 대신해서 이곳을 지킬 것을 부탁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매망량이 있는 귀수산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윤사희를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대도깨비님.”
〖나는 안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망할 도깨비가 두 손을 내저었다.
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대도깨비님께 할머니를 부탁할 생각 없었거든요?”
〖하긴, 그렇겠지?〗
대도깨비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럼, 왜 불렀느냐?〗
“이매망량 주위로 결계를 쳐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흐음?〗
천지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잖아요. 그 사람들을 위협하는 건 거주자들이고요.”
〖그래서?〗
“대도깨비님께서 결계를 펼쳐도 무리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다 그 녀석들과 함께 인간이 나타나면?〗
대도깨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물었다.
〖저세상.〗
들린 이름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대도깨비는 웃는 낯을 지우고서 내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녀석이 또 나타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저세상은 인간이다.
그가 만약 거주자들과 함께 대도깨비의 결계를 공격한다면…….
‘천지해는 결국 결계를 해제하게 될 거야.’
천지해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다.
그것도 나와 계약 중인 거주자.
미지 영역이 무너지며 세상 밖에 나온 거주자들과는 다른 몸.
만약, 결계를 계속 유지하려다가 저세상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소멸하겠지.’
그게 바로 거주자였으니까.
지끈, 머리가 울렸다.
나는 갑작스러운 두통에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면서 말했다.
“저세상이 나타나면 바로 결계를 해제하세요.”
〖그래도 되겠느냐?〗
“네. 대도깨비님의 안위가 중요하니까요.”
〖호오.〗
천지해가 입술을 오므렸다.
감격에 젖은 듯한 그 눈에 나는 급히 말했다.
“물론, 이매망량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도 중요해요.”
〖그런데 결계를 해제하라고?〗
“결계를 유지하다 대도깨비님이 소멸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테니까요.”
무엇보다.
“이매망량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아요.”
이건, 내가 한때 잠시나마 그들을 이끌었기에 알고 있는 사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내 계약자께서 그렇게 말한다면야.〗
천지해가 싱긋 웃었다.
〖내 걱정하지 않고 귀수산을 보호하도록 하마.〗
“거주자들과 함께 이곳을 습격하려는 인간이 나타나면.”
〖바로 결계를 해제할 테니 괜한 걱정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면서 대도깨비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아해야. 네 혼자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려고 하지는 말거라. 네 말대로 이곳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으니.〗
“……네.”
느릿하게 대답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
“뭐라고?”
윤사해가 놀란 눈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귀수산을 침입하려던 거주자들을 막아내던 윤사희가 잠에 들었으니.
‘잠에 든 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할머님께서 결계를 펼친 건 줄 알았건만.”
“아니야. 저 결계는 대도깨비님께서 펼친 거야. 어쨌든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빠. 장천의 삼촌을 찾는 즉시 할머니는 바로 깨어날 테니.”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리사.”
윤사해가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갑자기 장천의는 왜…….”
하지만 그는 곧 말을 삼켰다.
하지만 나는 윤사해가 내게 던지려던 질문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장천의를 찾는 이유를 묻는 거겠지.
때문에 나는 미소를 그렸다.
“찾을 이유가 있거든.”
내 대답에 윤사해가 물었다.
“혹시, 장천의가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거주자들과 손을 잡고 있거나 그러니?”
“아마도 그건 아닐 거야.”
아니, 분명히 아닐 거다.
장천의, 그 망할 아저씨는…….
‘방관 중이니까.’
그는 분명 세상이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막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되게 내버려 뒀다.
그게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운명이라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윤사해에게 그 망할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장천의는 윤사해의 친구가 아니었지만 그 못지않게 가까운 사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백시준의 죽음을 추스르고 있을 텐데.
‘충격을 줄 수는 없지.’
때문에 나는 말을 아꼈다. 대신 말했다.
“할머니는 장천의 삼촌을 찾을 때까지 무방비한 상태에 노출되게 될 거래.”
“할머님을 지켜야겠구나.”
“응, 혹시 시간 남는 사람 있으면 할머니 곁에 붙여 줘.”
“시간 남는 사람이라…….”
윤사해가 입가를 어루만졌다. 그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
“아빠는 안 돼.”
“응?”
“아빠는 귀수산을 지켜야지.”
“리사, 할머님을 지키는 것 역시 귀수산을 지키는 일이란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젓고는 윤사해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귀수산은 내가 지킬 거야.”
윤사해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 이곳을 지켜왔다는 걸 그새 잊은 건 아니겠지?”
“……어떻게 잊겠니?”
윤사해가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 리사가 계속 큰 짐을 맡게 되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괜찮아.”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윤사해의 등을 토닥여 줬다.
“나는 정말로 괜찮아.”
백시준한테서 <[특수 스킬] Delet>를 양도받기 전부터 그랬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다.
분명, 그럴 테니까.
“아빠는 계속 이매망량을 지켜줘. 귀수산은 걱정하지 말고.”
아, 그래.
“할머니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 말에 윤사해가 옅게 미소를 그렸다.
“알겠단다. 하지만 나는 우리 딸이 너무 무리하지 말았으면 하는구나.”
당부하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차마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건 무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때였다.
“길드장님!”
서차윤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윤사해가 나를 놓아 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서차윤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그게, 결계 밖으로…….”
서차윤의 말에 나도, 윤사해도 그 즉시 결계 밖을 살폈다.
〖아해야.〗
천지해가 나를 부른 건 그 순간이었다.
〖이것, 참. 걱정하던 일이 바로 벌어졌구나.〗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거주자들과 뜻을 함께하는 인간들이 섞여 있다는 말일 터.
“알겠어요. 대도깨비님은 바로 결계를 해제해 주세요.”
〖괜찮겠느냐?〗
“네.”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창문을 열었다.
“아빠는 이매망량만 보호해. 할머니한테 따로 사람을 보낼 수 있음 보내고.”
“리사!”
“할머니가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저 자식들 상대할게.”
“혼자서는 무리일 거다.”
“괜찮아.”
걱정하는 목소리에 씨익 웃었다.
“아빠의 하나뿐인 딸은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나를 비췄다.
나는 그 눈부신 빛을 받으면서 윤사해에게 말없이 웃어줬다.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 산을 넘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