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그래도 희망은 있다(4)
〖그래, 앞으로의 일이라…….〗
천지해가 다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이내 연기를 뱉어 내며 물었다.
〖네가 미래에 이룰 일이 궁금한 것이냐?〗
“그걸 궁금해 한다고 대도깨비님이 답을 알려 줄 수 있나요?”
〖없지.〗
천지해가 싱긋 웃고는 말했다.
〖너를 이렇게 만난 것부터 내가 알던 미래는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끊임없이 멸망을 반복하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과거.
그 과거에 ‘윤리사’는 없었다.
윤사해의 하나뿐인 딸은 지금까지 줄곧 어린 나이에 계속 목숨을 잃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 무엇이 궁금하느냐?〗
“제가 이 스킬로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요.”
백시준에게 양도받은 <[특수 스킬] Delet>의 힘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로…….”
잠시 말을 멈추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준이 삼촌한테 받은 이 스킬로, 세상을 구할 수 있나요?”
천지해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원래 이 스킬을 가졌던 저세상이 단 한 번도 세상을 구한 적 없기에 하는 말이겠지.
〖하지만, 리사.〗
천지해의 손이 내 머리 위에 닿았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할아버지한테 사랑을 받는 손녀가 된 기분이라 이상했다.
때문에 나는 괜히 입술을 씰룩이며 천지해의 손을 치웠다.
“말뿐이라도 감사하네요.”
천지해가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그가 웃음을 멈추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이냐?〗
내가 궁금해 하는 건 뭐든 말해 주겠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까지 세상을 끊임없이 돌린 사람은.”
〖장천의지.〗
천지해가 내 질문이 채 끝기도 전에 답을 알려줬다.
〖참고로 그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대도깨비님의 눈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모양이네요.”
천지해가 정답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참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야.〗
“동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했다.
하늘과 땅, 바다.
이 세상에 그중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을까?
‘있기는 하지.’
바로, 아공간.
장천의 역시 이동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과연 이동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마는.
‘장천의는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었지.’
이동 스킬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여전히 이 세상에 있다는 것.
‘과연,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바뀌어 버린 세상을.
‘지켜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약, 장천의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면, 그와 눈이 마주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대도깨비님.”
〖음?〗
“혹시, 장천의 아저씨를 찾을 수 있나요?”
〖흐음.〗
대도깨비가 턱을 쓸고는 말했다.
〖그건 어렵겠는 걸.〗
하긴, 가능했다면 진작 그 망할 인간을 찾았을 거다.
애초에 천지해가 먼저 장천의의 이름을 꺼내며 찾으러 가자고 했겠지.
과거를 읊는 천지해의 얼굴은 꽤 지쳐 보였으니.
“그럼, 가능한 사람이 있나요?”
〖으음.〗
천지해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의 답이 들려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곧, 천지해가 말했다.
〖네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녀석이 하나 있기는 하다.〗
“누구요?”
화색을 띠며 물었다. 천지해가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사희.〗
그의 입에서 떨어진 이름에 곧장 얼굴을 찌푸렸지마는.
“할머니가 장천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
천지해가 싱긋 웃었다.
〖사희가 그림자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녀석인 건 알고 있겠지?〗
“네에, 뭐.”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그림자가 없는 곳은 없지.〗
그 어떤 공간이라고 해도 누군가 있다면 그에 그림자가 비추기 마련.
천지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랜만이구나!”
“네, 오랜만이에요. 할머니.”
윤사희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혀 그러지 않은 표정인데?”
“설마요!”
너스레를 떨며 윤사희에게 붙었다.
“다친 곳은 없으시죠, 할머니? 계속 귀수산을 수호 중이라고 들었거든요.”
“이거 색다른 경험이구나. 네가 나를 걱정하다니.”
윤사희가 픽 웃고는 물었다.
“그래,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고?”
“네, 할머니.”
보랏빛이 감도는 짙은 검은색 머리칼. 그보다 더 진한 눈.
‘할머니’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 어린 모습을 지닌 윤사희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무엇이 궁금하느냐?”
“찾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장천의?”
그녀의 입에서 들린 이름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윤사희가 그런 나를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예끼, 이 녀석아! 도깨비님께 다 듣고 왔는데 내가 알지 못하고 있을 줄 알았느냐?”
“아…….”
잠시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찾아 주실 수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윤사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대신, 아가. 네가 해 줘야하는 일이 있다.”
“네, 뭐든 말씀해 주세요.”
장천의만 찾을 수 있다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윤사희가 검지를 들고는 말했다.
“나 대신 귀수산을 지키고 있을 것. 물론, 나는 귀수산에 계속 있을 거다. 애초에 이곳을 떠날 수 없는 몸이니.”
하지만 장천의를 찾기 위해서는 계속 두 눈을 감고 그림자 세계를 봐야 한다며, 윤사희가 알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어쨌든, 중요한 건.
“할 수 있느냐?”
“네, 할 수 있어요.”
내가 그녀를 대신해 귀수산을 지킬 수 있다는 거다.
윤사희가 내 대답에 싱긋 웃었다.
“그래. 자신만만해서 좋구나.”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어서 두 번째.”
검지에 이어 중지.
“네 아비를 잘 부탁하마.”
“아빠를요?”
“그래.”
윤사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시준이가 죽었잖느냐.”
윤사해에게 남은 유일한 친구였던 백시준.
“내색하지 않고 있겠지만, 꽤 힘들 거다. 저렇게 보여도 정(情)이 많은 녀석이거든.”
“알아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혼을 했던 ‘에일린 리’를 위해 움직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계속 곁에 있을 거니까요.”
“그래.”
윤사희가 픽 웃고는 말했다.
“든든해서 좋구나.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렇게 든든한 녀석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제 첫인상이 어땠는데요?”
“말해 무엇하느냐?”
윤사희가 짓궂게 웃었다.
“최악이었지.”
“할머니!”
버럭 지르는 내 목소리에 윤사희가 키득거렸다.
“농이다, 농. 이것, 참. 증손녀가 무서워서 제대로 농담도 하지 못하겠구나.”
농담이고 자시고 나는 마뜩잖은 눈을 보였다. 윤사희가 그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눈에서 힘 좀 풀거라. 안 좋은 건 꼭 지 아비 닮았지.”
“엄마 닮은 건데요.”
“그래, 그렇다고 하자꾸나.”
윤사희가 너스레를 떨고는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세 번째.”
“세 번째도 있어요?”
“당연하지.”
윤사해가 약지를 들고는 말했다.
“네 몸.”
그러고는 나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함부로 내던지지 말도록 하거라.”
“네……?”
예상치 못한 당부에 멍하니 묻고 말았다.
윤사희가 그런 나를 보며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걸 네 혼자 떠안으려고 하지 말라는 거다. 시준이, 그 녀석이 네게 준 힘.”
특수 스킬, Delet.
“그 힘은 자칫 잘못하면 네 모든 것을 좀먹을 수 있으니.”
그래, 백시준이 가지고 있었던 이 스킬은 무척이나 위험한 힘이었다.
‘이매의 생명력을 빼앗기까지 했었으니.’
아니, 빼앗은 게 아니다.
백시준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듯 그의 생명력을 삭제시켜 버렸다.
“자칫 잘못하면 네 목숨을 없앨 수 있을 거다.”
듣기만 해도 섬뜩했지만 나는 두 손을 꼭 주먹쥐며 말했다.
“괜찮아요.”
백시준한테 이 힘을 받을 때부터 다짐했다. 그를 대신해 이 세상에 다시 평화를 가지고 오겠다고.
“그러니 부탁할게요.”
“나원, 참.”
윤사희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런데, 아가.”
“네, 할머니.”
“장천의는 갑자기 왜 찾으려고 하는 것이냐?”
“평화를 위해서요.”
“평화?”
“네.”
그리고.
“진실을 듣고 싶어서요.”
윤사희가 내 말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그 표정에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