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백시준(5)
“안녕, 윤리사.”
저세상이 태연하게 인사를 하며 내 옆구리를 찌른 것을 빼내었다.
“윽!”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시준이 아저씨도 오랜만이에요. 도윤이는 잘 지내죠?”
“그래…….”
백시준이 잡혀 있었다.
다름아닌, 저세상.
그의 손에 말이다.
백시준은 힘겹게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손등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러면서 애써 웃는 낯으로 저세상에게 말을 걸었다.
“도윤이가 세상이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데 말이야.”
“그래요?”
저세상이 픽 웃었다.
“그것 참 곤란한데요.”
내뱉는 목소리가 씁쓸하게 들렸다.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는 어떻게 한 거야?!”
윤리오와 윤리타.
저세상을 막고 있어야 했을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리오 형이랑 리타 형?”
저세상이 비스듬히 미소를 그렸다.
“형들은 걱정 마. 무사하니까. 당분간은 움직이기는 힘들 테지만.”
무미건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세상, 너…… 너 정말…….”
“응?”
왜 그러냐는 듯이 묻는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최악이야.”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너는 정말 최악이야. 저세상.”
“그걸 이제 알았어?”
날카롭게 묻는 목소리에 차올랐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야가 일순 흐릿해졌다.
그 때문일까?
저세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눈물 때문인가 보다.
나뿐만이 아니라 윤리오와 윤리타.
그 두 사람을 공격한 저세상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나는 황급히 두 눈에 다시 차오른 눈물을 급히 닦고는 외쳤다.
“시준이 삼촌을 놓아 줘!”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이매, 저 자식이랑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세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매를 턱짓하며 물었다.
그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백시준.
그가 가지고 있는 <[특수 스킬] Delet>를 빼앗기 위해서.
‘안 돼.’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지금, 백시준의 스킬은 인류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저세상에게 스킬을 빼앗긴다는 말은, 즉.
‘백시준은 죽을 거야.’
그래, 백시준이 죽는다는 말이다.
저세상은 자신이 죽인 상대의 스킬을 빼앗을 수 있으니까.
살아 있는 상태로는 통하지 않는 스킬.
애초에 통한다면 저렇게 백시준을 계속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을 거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대도깨비님.”
〖그래, 아해야.〗
천지해가 나와 마찬가지로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피를 쏟아 내고 있는 옆구리를 손으로 꽉 틀어막으면서 물었다.
“시준이 삼촌, 구할 수 있어요?”
〖글쎄.〗
천지해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구하려고 하는 순간, 저 녀석이 나를 공격하려고 하면 내 계약자께서 바라는 일을 들어주기 힘들 것 같구나.〗
거주자는 원래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
저세상이 공격하는 순간, 천지해는 그 공격을 곧이곧대로 받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러지 않으면 소멸하게 될 테니까.’
인간을 공격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천지해도, 그리고 백시준도 함께 죽을 수 있다.
“그래도요.”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걱정하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부탁할게요.”
도윤이와 약속했다.
백시준과 함께 무사히 돌아오기로.
‘다친 것부터 무사히 돌아가는 건 글러 먹었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
백시준도, 그리고 나도.
그러니까 어떻게든 백시준을 구해야만 했다.
〖그래.〗
천지해는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내 계약자께서 친히 부탁하는데 들어줄 수밖에 없지.〗
천지해가 유쾌하게 웃었다.
괜히 내 부탁을 들어주려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천지해가 다정하게 말했다.
〖아해야, 걱정하지 말거라.〗
그가 미소를 그린 얼굴로 이어 말을 내뱉었다.
〖나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으니.〗
또한.
〖어디든 존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괜한 걱정하지 말라며 그가 웃었다.
그러고는.
〖자, 그럼!〗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경쾌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던 장소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니, 바뀐 게 아니다.
〖어디 한 번 서로 신명나게 놀아보자꾸나!〗
위대한 대도깨비께서 재주를 부린 거다.
인간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그는 우리에게 재미난 환각을 보여줬다.
‘야! 저세상!’
‘아악! 아저씨! 윤리사가 제 머리 잡아 당겨요!’
‘네가 먼저 놀렸잖아!’
‘내가 언제?!’
천지해가 보여 준 건 과거였다.
나와 저세상.
우리 둘이 함께 보냈던 어릴 적의 과거.
백시준을 붙잡고 있던 저세상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의 두 눈 역시 마찬가지.
‘리사, 오빠 머리를 그렇게 잡아 뜯으면 안 되지.’
윤사해가 다투고 있던 우리를 다정하게 타이르며 말렸다.
아, 그래. 생각났다.
‘나랑 키도 똑같은데 왜 오빠야? 저세상은 리사 동생이야! 동생!’
‘누가 동생이야!’
‘너! 저세상, 너!’
‘자꾸 너라고 하지 마!’
저세상과 함께 지내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
그때의 과거가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자, 세상아. 진정.’
윤사해가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던 저세상을 안아 들었다.
‘리사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세상이는 오빠지?’
‘네…….’
저세상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의 그는 항상 그랬다. 윤사해도, 그리고 윤리오와 윤리타도 어려워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그에 대놓고 속상함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래, 세상이는 오빠야. 리사의 셋째 오빠.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아이를 달랠 뿐.
‘오빠는 누가 오빠야?! 리사는 인정 못 해!’
외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린 나는 맹랑하게도 윤사해의 다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리사도 안아 줘!’
정말이지, 폭군이나 다름 없었다.
푸스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킨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내 뛰었다.
“저세상!”
우리 앞에 펼쳐져 있던 과거를 베며, 그렇게 그의 앞에 창을 들이밀었다.
저세상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시준을 잡고 있던 손을 빠르게 베었다.
살을 가르고, 뼈마저 갈라 버린 창에 피가 튀었다.
“리사!”
눈 깜짝할 사이에 내 품에 안긴 백시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백시준을 곧장 천지해에게 넘겼다.
“부탁해요.”
〖오냐.〗
나에게서 백시준을 안아 든 대도깨비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줄 알았다.
〖큭!〗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천지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는 없었다.
곧장, 나를 향해 피를 흠뻑 머금은 쇠사슬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윽!”
이를 악물며 그것을 막아 냈다.
조금 전, 저세상에 의해 난 상처에 다시 문제가 생겼는지.
‘망할!’
그의 공격을 막기가 벅찼다.
이럴 때 윤이나 진달래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두 사람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그때였다.
“잘했어, 윤리사.”
저세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칭찬했다.
“내 손을 자르다니. 앞으로 있을 싸움에 꽤 불리해지겠어.”
“저세상……!”
“그래. 나 여기 있어.”
저세상이 싱긋 웃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그가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
“다만, 윤리사. 도윤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줄래?”
“뭐?”
저세상이 불길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었다.
“너는, 시준이 아저씨를 지키는 걸 실패했거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쿨럭……!”
피를 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입술을 파르르 떨며 창백하게 질린 낯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시준이 삼촌.”
백시준, 그의 심장에 정확히 저세상의 쇠사슬이 박혀 있었다.
“시준이 삼촌!”
안 돼. 안 된다.
저세상의 공격을 막고 있던 손을 거두고는 다급히 그를 향해 곧바로 몸을 돌렸다.
푸욱!
몸 곳곳이 날카로운 사슬에 찔리고 말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준이 삼촌! 삼촌!”
백시준, 그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다.
그의 심장에 박힌 것을 어떻게든 빼야 했다.
아니, 그보다 먼저 광혜원에게 데리고 가야 했다.
그럼, 살릴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을 거야.
두 눈에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도윤이와 약속했는데. 백시준과 함께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는데.
그랬는데.
“리사…….”
금방에라도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괜찮아.”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요.
나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백시준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순간, 그가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내 손목을 세게 쥐었다.
동시에.
【A급 각성자인 ‘백시준’이 S급 각성자인 ‘윤리사’에게 <[특별 스킬] Delet>를 양도하고자 합니다.】
눈 앞에 푸른 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