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백시준(1)
바깥이 고요해졌다.
회의실 모든 벽면을 보호하고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움직인 건 그때였다.
“히익!”
테이블 아래에 들어가 있던 진민천이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었다.
“죽은 거야! 죽은 거라고!”
명색이 안보국의 국장이면서, 그는 체통따위 모두 잃은 것처럼 소리 질렀다.
“그, 망할 윤사해의 딸이 죽은 게 분명해!”
“국장님,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
백시준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리사와 계약 중인 거주자께서 아직 이곳에 계십니다.”
즉, 윤리사는 죽지 않았다.
거주자는 계약자를 잃는 즉시, 미지 영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닉에 빠진 진민천은 그런 백시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소리 질렀다.
“거주자잖아! 사실, 계약 관계가 아니었던 걸 수도 있어! 아아, 그래! 그렇고말고!”
진민천이 광기에 서린 눈으로, 알 수 없는 미소를 그리고 있는 거주자를 쳐다봤다.
“거주자님! 저는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흠?〗
천지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진민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진민천이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떠들었다.
“애초에 인간이 어떻게 거주자들께서 머무는 곳을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동시에 그가 진달래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저, 저기! 모두 진달래 회장 대리가 꾸민 일입니다!”
진달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놈을 국장으로 내세우고 있던 안보국의 모든 직원이 불쌍해졌기 때문이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부디!”
진민천의 말이 끊겼다.
백시준이 그의 목을 쳐 단번에 기절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쓰러진 국장을 보고는 이내 천지해를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 없네.〗
대도깨비가 손을 휘휘 저었다.
〖백시준, 자네 같은 인간도 있고. 저기.〗
“진달래라고 합니다.”
〖그래, 진달래. 당신 같은 인간도 있으니.〗
대도깨비는 쓰러진 진민천을 보며 싱긋 웃었다.
〖저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대도깨비가 픽 웃었다.
〖그런 인사는 내 계약자께서 바깥에 있는 놈을 처리한 후에 직접 해 주기를 바라지.〗
“리사는…….”
〖괜찮네.〗
대도깨비, 천지해.
그가 백시준의 말을 끊고는 곰방대를 꺼내 들었다.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지만, 내 계약자께서는 그리 약한 녀석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토했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내 계약자의 형제들이야.〗
“리오와 리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렇게 물은 건 진달래였다.
걱정 가득한 얼굴인 그녀를 향해 대도깨비가 싱긋 웃었다.
〖뭐, 일이 생기기는 했지.〗
백시준과 진달래.
대도깨비는 두 사람이 볼 수 없는 건물 바깥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리오와 윤리타.
제 계약자의 두 오라비가 한때 가족이었던 자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건물 내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제 계약자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지마는.
〖그래도 걱정할 것 없네.〗
천지해는 웃는 낯으로 인간들을 진정시켰다.
***
타앙! 탕!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그와 함께 자욱하게 깔려 있던 흙먼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걷어졌다.
“바보 같은 윤리오!”
윤리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저세상의 손에서 구출한 자신의 쌍둥이 형을 향해 윽박질렀다.
“왜 잡혀서 지랄이야?!”
“누가 잡히고 싶어서 잡힌 줄 알아? 애초에 어디에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사각을 찾았지! 사각을!”
윤리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못하면 너도 맞출 것 같았단 말이야!”
“그냥 맞추지 그랬냐?”
“아빠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지? 조금 전에 한 말, 아빠한테 그대로 전해 줘도 되는 거지?”
“될 것 같냐?”
윤리오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윤사해의 귀에 자신의 말이 들어간다면 곧장 귀수산에 갇히게 될 터.
그건 사양이었다.
여하튼 윤리오는 윤리타를 향해 물었다.
“다친 곳은?”
“없어. 너는?”
“나도 없어.”
윤리오가 쇠사슬에 붙잡혔던 손목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타이밍 좋게 잘 나타났어. 잘못했으면 손목이 부러졌을 텐데.”
그것도 아님.
“아예 손이 잘렸겠지.”
윤리오의 두 눈이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
쌍둥이는 음울한 표정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리타 형! 리오 형의 손이 이대로 잘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저를 공격하는 게 좋을 거예요!’
가족처럼 대했던, 아니.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스스로를 공격하게끔 만들었다.
“야, 윤리타.”
“왜?”
“세상이 어디 있는지 알겠어?”
연기가 걷어졌건만,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윤리오의 질문에 윤리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잡아야지.”
윤리오에게 있어서 저세상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처음 집에 왔을 때부터 그랬다.
자신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처럼 눈치를 얼마나 보던지.
“혹시 모르잖아. 세상이가 탈쟁이 새끼들 쪽에 붙은 게.”
“우리 때문일 수도?”
“응.”
간결하게 들려온 대답이었지만, 윤리타에게는 그것이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윤리오, 너도 참.”
윤리타가 픽 웃고는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이가 이제 스무 살인가?”
“그렇지.”
“어디 보자. 우리 세상이는 사춘기도 크게 앓지 않았으니 지금 반항해도, 뭐. 이상하지는 않네.”
윤리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는.
“저세상! 지금 우리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버럭 소리 질렀다.
“조금 전에 기세 좋게 윤리오를 위협하던 모습은 어디 갔어?! 당장 튀어나와!”
윤리타의 목소리가 허공을 시끄럽게 울리던 찰나.
촤르륵!
쇠사슬이 움직이는 불유쾌한 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들려 왔다.
“피해!”
윤리오의 외침과 함께 쌍둥이는 서로 갈라졌다.
그러기 무섭게.
콰직!
쇠사슬이 땅에 꽂혔다.
조금 전, 윤리오와 윤리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곧, 저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그가 싱긋 웃으며 윤리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공격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요. 그럼, 리오 형은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못했을 테니까요.”
저세상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윤리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아. 오른손이 없든 왼손이 없든, 손이 하나라도 남으면 나는 검을 쥘 수 있어.”
“그렇겠죠.”
촤르르―!
땅에 꽂혀 있던 쇠사슬이 나지막하게 토해 내는 듯한 저세상의 말에 맞춰 움직였다.
“그런데, 리오 형.”
저세상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윤리오를 보며 물었다.
“두 손 다 없어지면 어떻게 검을 잡을 거예요?”
윤리오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흐아아악!”
이매의 검격이 쇄도하고 있던 때에 낯선 비명이 들려왔다.
“사, 살려 주세요!”
아직, 사람이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그것도 이매의 근처에.
‘안 돼!’
다급히 그를 구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살려!”
푹!
이매의 검에 남자의 목이 꿰뚫려 버렸다. 그렇게 나를 향해 손을 뻗던 그는 축 늘어졌다.
“나참, 정말이지.”
이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들 겁에 질리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를까요?”
싱긋 웃으며 묻는 목소리에 이가 갈렸다.
태연하게 사람을 죽여놓고 하는 소리가 저런 거라니!
까드득, 이가 갈렸다.
“사람을 죽여 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두 눈을 부릅떴다. 내 질문에 이매는 웃음을 터트렸다.
“도깨비의 따님, 제 손에 묻은 피가 얼마나 많은데 새삼스레 무슨 질문을 하는 건가요?”
그러니까 죄책감 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당장, 당신 곁에 있는 부네만 해도.”
“많은 사람을 죽였죠. 또한, 그에 일조했고요.”
윤이 이매의 말을 끊으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그래요?”
이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어떻게 다른데요?”
그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자신이 죽인 사람한테서 검을 뽑은 후 물었다.
윤은 그 질문에 담담하게 답을 알려 줬다.
“저는 제가 죽인 모든 사람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품고 있겠지요. 이 마음을요.”
“하하!”
이매가 우습지도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부네, 진심이에요? 탈을 쓰고 있는 자가 죄책감이라니!”
“탈을 썼던 자입니다, 이매.”
이매의 비아냥거림에도 부네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탈을 버렸어요. 당신과는 다르게 말이지요.”
“아하, 그렇지. 잊고 있었네요.”
이매의 분위기가 일순 달라졌다.
곧, 그가 피가 묻은 검을 털어내고는 우리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놀이는 이제 끝이에요.”
지금까지 놀이였다고?
‘미친 거 아니야?’
윤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이매의 검격을 막아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저 미친 자식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해야.〗
천지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