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파란(4)
“윤리사!”
“아니, 아빠! 잠깐만! 화내기 전에 내 말 좀 들어 봐!”
황급히 윤의 뒤로 모습을 숨기며 외쳤다.
“내가 탈쟁이 새끼를 데리고 온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란 말이야!”
“이유는 무슨 이유!”
윤사해가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자네가 그 탈쟁이 새끼겠군.”
내가 방패로 내세운 윤을 노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윤이 대답했다.
“네, 그렇답니다.”
아예 눈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무섭지도 않나 보다.
윤사해는 그녀가 보이는 웃음에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 유랑단의 탈쟁이 놈들 중에 여자는.”
“저와 할미, 그리고 각시뿐이지요.”
윤이 그의 말을 끊으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윤사해가 중얼거렸다.
“부네겠군.”
“네, 도깨비. 이렇게 맨 얼굴로 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래, 그렇군.”
윤사해가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고 물었다.
“대체 무슨 감언이설로 우리 딸을 꼬드긴 건지 궁금하군.”
“따님분께 설탕 발린 말 따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진심을 전한 것뿐이지요.”
“진심?”
우습지도 않다는 듯, 윤사해가 픽 웃었다.
“탈쟁이 녀석한테 그런 게 있을 줄 몰랐는데.”
“있지 않다면…….”
윤이 말꼬리를 흐렸다가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초랭이도, 그리고 선비도 탈을 벗지 않았겠지요.”
윤사해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 말이 마뜩잖다는 듯이 말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윤사해와 윤이 계속 기싸움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아빠, 잠시만!”
그 때문에 내가 나섰다.
“내가 다 설명할게!”
“리사.”
윤사해가 찌푸린 표정을 풀고는 나를 쳐다봤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제가 말하지요.”
윤이 나섰다.
그러고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 윤사해 앞에 다가가서는.
“지금 뭐하자는 거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윤사해가 당황한 얼굴로 다그치듯 물었다. 그 목소리에 윤이 나긋하게 말했다.
“이렇게 해야만 도깨비께서 제 말을 들어 주실 것 같아서요. 제 진심 역시 알아주실 것 같고요.”
그렇게 싱긋 웃으며 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윤은 구구절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없이 필요한 이야기만 윤사해에게 전하며 말을 끝마쳤다.
“제가 지금까지 저지른 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사랑이 우습기 그지 없다는 것도요. 때문에 모든 복수가 끝난 후 계속 속죄할 겁니다. 죽음으로 속죄하기에는 너무 큰 죄를 지었으니까요.”
윤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윤사해는 그녀의 이야기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윤리오 역시 마찬가지.
나는 두 눈을 데굴 굴리며 부자(父子)의 눈치를 살폈다
〖숨 막혀서 죽을 것 같구나.〗
대도깨비가 눈치 없이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혀를 찼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손에 식은땀이 날 정도의 침묵이 길게 이어질 때.
“리사, 리오.”
윤사해가 우리를 불렀다.
“네, 아버지.”
“응, 아빠.”
답하기 무섭게 그가 휙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따라오거라. 그리고, 너.”
“윤이라고 합니다.”
답하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얼굴을 구겼다.
윤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윤사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랑야.”
〖그래.〗
늑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랑야가 부르기 무섭게 모습을 드러냈다.
〖또 무슨 잡다한 일을 시키려고 부르는 거냐?〗
“내가 아이들과 자리를 비우고 있는 동안 저 여자의 감시를 부탁하고 싶군.”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겠지.〗
“어쨌든.”
윤사해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럼, 부탁하지.”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윤리오와 잠시 눈을 맞추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윤사해가 멈춰선 곳은 이매망량의 후문 쪽이었다.
귀수산과 맞닿아 있는 곳이나 다름 없어서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윤사해도, 그리고 윤리오도.’
나도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멈춰선 윤사해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리사, 우선 그 탈쟁이…….”
윤사해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듯 이어 말했다.
“윤에 관한 것은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래. AMO에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거다. 암만 세상이 이렇게 됐다고 해도 본부장께서는 아직 정정하시니.”
그 말대로였다.
AMO의 본부장, 강산에.
그녀는 세상이 암만 혼란스러워졌다고 해도 정정했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AMO 요원을 보내거나 자신이 직접 나설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윤사해는 말했다.
“백시준이 말하더구나. 자신에게 이 사태를 타개할 힘이 있다고.”
“네?”
윤리오가 놀라 물었다. 나 역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우리를 보며 윤사해가 입을 열었다.
“리오도, 그리고 리사도 특수 스킬에 대해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어요.”
윤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淸)의 후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스킬이잖아요.”
“비단, 청(淸)의 후손들뿐만이 아니란다.”
윤사해가 설명을 덧붙였다.
“거주자의 후손이 아님에도 그들과 비슷한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간혹 나타나고는 하지.”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백시준이라면서 윤사해가 말했다.
“백시준이 가진 스킬은.”
Delet.
“자신뿐만이 아니라, 특정 구역에 적용된 힘을 지울 수 있는 그 녀석만이 가진 스킬이지.”
그 스킬로 지금의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윤사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시준이 삼촌이 귀수산을 떠나 바깥으로 나가려는 거군요?”
윤리오의 물음에 윤사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녀석을 노리고 있는 무리가 있으니 경호가 필요한 모양이더구나.”
그 경호를 윤리오에게 맡길 생각이었고.
‘하긴, 윤리오가 제격이기는 해.’
윤사해의 아들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물론,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새끼들도 있겠지.’
그 중 예를 들면.
‘저세상.’
백시준을 위협했던 그를 예로 들 수 있을 거다.
아마, 윤사해는 그것 때문에 윤리오를 귀수산 밖으로 보내는 데 주저하는 걸 거다.
그 역시 백시준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저세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그런 거겠지.’
윤사해의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져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윤리오를 부르며.
“많이 위험할 거다.”
그의 의견을 다시금 물었다.
“그래도 백시준의 경호를 맡고 싶은 거니?”
“네, 아버지.”
윤리오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윤리오는 몸이 회복된 후에도 줄곧 이매망량에 붙어 있었다.
몇 번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안 돼.’
윤사해가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윤리오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나 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계속 윤리오를 막았다면, 언제인가 그와 윤사해가 크게 싸웠을 테니.
그건 그렇고.
“리사.”
“응, 아빠.”
윤사해는 나 역시 불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리오 오빠를 따라서 시준이 삼촌 경호를 맡으라는 거잖아.”
“그래.”
윤사해가 옅게 미소를 그렸다.
윤리오는 당황한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리사도 함께 한다고요?”
“그럼, 당연하지.”
윤사해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리오, 네가 암만 몸을 회복했다고 해도 혼자 보낼 수 없단다.”
“맞아, 리오 오빠.”
윤사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붙였다.
“시준이 삼촌의 경호를 혼자 맡을 생각이라면 그냥 귀수산에 있어.”
“리사!”
윤리오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때, 윤사해가 말했다.
“윤.”
“응?”
“그 탈쟁이도 너희와 함께 보낼 거다.”
“뭐?!”
윤사해가 꺼낸 느닷없는 이야기에 놀라 물었다.
“아빠, 진심이야?”
“그럼, 진심이지.”
윤사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어깨를 잡았다.
“리사. 만약, 윤이 너희를 배신하고 백시준을 해칠 것 같으면.”
“죽일게.”
윤사해의 말을 끊으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에 윤사해가 흠칫거리고는 이내 서글프게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우리는 백시준의 경호를 맡게 됐다.
윤.
유랑단의 수장에게 모든 것을 잃고 그 아래에 스스로 들어간 탈쟁이와 함께 말이다.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거주자들.
그로 인해 파괴된 세상.
그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