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부네(5)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부네.
그녀에 대한 정보는 적었다.
애초에 『각성, 그 후』에서 비중 있게 그려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나도 가끔 까먹었으니까.’
나온다고 해도 수상쩍은 대사만 조금 쳐 놓고 사라지기만 했었으니.
‘더욱이 나도 저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니까.’
만난 것도 처음인 기분이다.
‘아닌 것도 같지만.’
어릴 적부터 유랑단의 탈쟁이 새끼들과 워낙 자주 얽혀서 헷갈렸다.
여하튼, 나는 물었다.
“무슨 생각이죠?”
부네가 아름답게 미소를 유지한 채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도깨비의 따님, 당신은 똑똑한 분 아닌가요?”
대답 대신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제가 무슨 생각인지 훤히 내다볼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그 말에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부네는 최설윤과 백정의 승부에 대해 단언했다.
‘승부가 났겠지요. 최설윤 길드장님께서 이겼을 겁니다. 백정은 죽었을 테고요.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거라서요.’
자신과 같은 탈인 백정.
그가 죽었을 거라고 말이다.
“부네, 당신. 설마 유랑단을 배신한 건가요?”
“뭐?!”
내 말에 청정하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왜요?”
“왜기는!”
한때, 그녀와 같은 유랑단 소속이었던 탈쟁이가 우습다는 듯이 재잘거렸다.
“부네는 나 다음으로 유랑단에 가장 오랫동안 소속되어 있던 녀석이야. 그런 탈쟁이 새끼가 갑자기 배신을 한다고?”
똑같은 탈쟁이 새끼였던 청정하가 코웃음을 쳤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하지만, 정하 오빠. 오빠도 갑자기 유랑단을 배신했잖아요.”
“나랑 저 녀석은 사정이 다르지!”
청정하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나는 애초에 유랑단에 소속감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긴, 그랬다고 했지.”
조용히 있던 청해솔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청정하가 유랑단에 소속되어 있던 건, 어디까지나 우리 가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으니까.”
청정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저 녀석은 나랑 사정이 달라.”
그가 수상하다는 듯, 부네를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수장에게 심장을 바치면서 청(淸)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면, 저 녀석은 제 발로 수장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었으니까.”
“그랬지요.”
부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초랭이, 당신의 말대로 저는 수장님께 먼저 찾아가 무릎을 꿇었죠.”
순순히 청정하의 말을 인정하며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충성을 맹세한 건 아니랍니다.”
“무슨 개소리야?”
청정하가 내 마음을 대변해 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부네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릎을 꿇은 것 자체로도 충성을 맹세한 거지. 애초에 지금도 수장 새끼한테 ‘님’자 붙여가고 있잖아?”
“100년이 넘도록 그리 불렀으니 어쩔 수 없죠. 초랭이, 당신도 계속 수장님이라고 불렀을 텐데요?”
“크흠.”
청정하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부네의 말에 답하기를 피했다.
그보다 100년이라니…….
나이는 암만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탈쟁이들이 먹은 나이에 잠깐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부네.”
나는 나지막하게 그녀를 부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인가요? 정말로 유랑단을 배신한 건가요?”
대화를 처음으로 돌리며 다시 던진 질문에 부네가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답니다.”
곱게 웃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백정을 데려와 바쳤지요. 저를 믿어 달라는 성의로요.”
유랑단의 탈쟁이들은 서로 동료 의식이 없다.
그래, 그걸 잘 알고 있는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이네요.”
“그런 걸 가져야 하나요?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어 있는데. 당연히, 백정. 그 아이의 손에도 꽤 많은 피가 묻어 있지요.”
부네가 웃음을 흘렸다.
“도깨비의 따님, 그거 아시나요? 저 역시 거주자의 후손이랍니다. 저 초랭이와 똑같이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청정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물론, 청해진 역시 입을 쩍 벌린 채였다.
이 자리에서 평온한 건, 청해솔과 거주자들 뿐.
‘청해솔은 알고 있었나 보네.’
부네가 미리 알려 준 모양이다.
그때, 청정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
“아니랍니다.”
부네가 싱긋 웃었다.
“제가 지금껏 계속 살 수 있던 건, ‘탈’을 쓰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거주자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슨 거주자의 후손이라고.”
“청(淸)과 같이 대단한 거주자의 후손은 아니랍니다.”
부네가 청(淸)의 후손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 때문에 당신들 모두 가지고 있는 위대한 용왕이 후손들에게 내린 힘 같은 건 없지요.”
그렇지만.
“할머님은 저희를 무척이나 아꼈답니다.”
부네가 추억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낭신이라고 아시나요? 별다른 이름은 붙여지지 않은, 그저 마을을 수호하는 신.”
그 신의 후손이 바로 자신이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작은 마을이었지요. 아랫집이 내 아버지의 누이 되시는 분의 집이고, 윗집이 내 어머니의 오라버니께서 머무는 집이었으니.”
케케묵은 기억을 더듬듯, 그녀의 두 눈이 애틋해졌다.
“어떻게 보면 남해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할머님의 핏줄이 모두 모여 살았던 걸 생각해 보면 남해와 같았지요.”
부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 마을이 불탔답니다.”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일그러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요.”
잠시 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가 분노가 서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마을뿐만이 아니었지요. 다른 서낭신이 인간과 연을 맺어 후손을 낳은 곳.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
그런 마을이 모두 남김없이 모두 불탔다며 부네가 웃었다.
광기가 담긴 웃음소리였다.
청(淸)의 후손들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얼굴이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의외인 건, 이번에는 거주자들 또한 우리와 같은 얼굴이었다는 거다.
부네가 그런 우리를 보며 웃었다.
“모르겠지요. 서낭신은 보잘것없는 아주 작은 신이었으니. 더욱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렀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존재였으니까요.”
또한,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순전히 인간의 힘만으로 발전되지 않은 시대. 각성자가 ‘신인(神人)’이라 불리며 신과 공존하던 옛날.
마을이 암만 불에 타든, 어지간히 큰 마을이 아니고서야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 거다.
암만 여러 개의 마을이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래, 그랬을 거다.
“정신 차려보니 살아남은 건 오직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정하가 날카롭게 물었다.
“너도 나와 똑같이 네 마을을 없애 버린 놈한테 복수라도 하려고 유랑단에 입단했었다는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뭔가 이상했다.
청정하 역시 나와 같은 것을 수상하게 여겼는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복수심은 진작 꺼졌을 텐데? 네 마을을 불태운 게 너와 같은 거주자의 후손이 아니고서야, 이미 죽어 버렸을 테니.”
무엇보다.
“네 할머님께서는 대체 뭐 했는데?”
서낭신이었다는 그녀.
“그 대단하신 신께서는 도대체 네 마을을 안 지키고 뭐 한거래?”
암만 힘이 없다고 해도 신이었다.
인간 따위, 하다못해 거주자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가볍게 막아 낼 수 있었을 거다.
‘청(淸)의 후손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테지만.’
부네의 말을 들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으니까.
청정하의 지적에 부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에 청정하가 비딱하게 웃었다.
“할 말 없지?”
“저기, 형. 너무 매섭게 굴지 말죠? 그래도 한때 같은 동료.”
“동료는 개뿔!”
초랭이였던 놈이 청해진의 말에 질린 얼굴로 외쳤다.
“나는 단 한 번도 유랑단의 탈쟁이 새끼들을 동료로 여긴 적 없어!”
“뭐, 그건 그랬지요.”
침묵을 고수하던 입이 열렸다.
“초랭이.”
아니.
“정하라고 했지요? 청정하.”
부네가 그를 부르며 웃었다.
“당신은 같은 청(淸)의 핏줄들을 죽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요. 다른 탈들도 모두 같았지마는, 그래도 아닌 탈도 있었답니다.”
예를 들면.
“저였죠.”
부네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청정하에게 물었다.
“백정을 기억하시나요?”
“죽었을 거라는 놈?”
“아니요. 그 전대의 백정이요.”
“기억하지.”
초랭이가 픽 웃었다.
“저기, 우리 친애하는 도깨비의 따님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께서 죽인 분이잖아.”
“아니거든요?”
내가 아는 한, 윤리오는 그 손에 피를 묻힌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상대가 암만 탈쟁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이었다.
‘백정이 습격했을 때도 그랬어.’
분명, 윤리오와 윤리타가 각성자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백정은 그때 그들을 습격했고.
‘물리쳤지.’
그래, 죽이지 않고 물리쳤다.
분명 그 자리에 청해진도 함께였을 텐데 기억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바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도깨비의 따님이 말한 대로입니다. 백정은 도깨비의 아드님 손에 죽은 적 없지요.”
부네가 말했다.
“그럼?”
청정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식이 애새끼들한테 진 게 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라도 했다는 거야?”
“설마요.”
부네가 푸스스 웃고는 말했다.
“백정은 수장님에 의해 강제로 탈이 벗겨졌답니다.”
즉, 유랑단의 수장.
그가 직접 백정의 목숨을 거뒀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백정, 그는.”
부네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이어 말했다.
“저의 연인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