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부네(2)
“해진이 오빠?!”
굉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진이 오빠!”
급히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윽!”
문에 막히고 말았다.
그때 떠올랐다.
외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그래, 그랬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릴 적, 청(淸)의 본가에 들어설 수 있었던 건 모두 청해솔의 안배 덕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주직을 맡고 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바보같이.’
청해진은 강한 각성자다.
단순히 거주자의 후손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스킬 운용도 상황 대처도 모두 뛰어난 헌터였다.
그러니 그에게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대도깨비님.”
나는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부르기가 무섭게 답이 돌아왔다.
〖싫다.〗
“제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요?”
〖뻔하지, 뭐.〗
천지해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안에 들어가서 상황 좀 봐 달라는 거 아니냐?〗
“맞아요.”
천지해는 거주자였다.
더욱이 하늘과 땅, 바다가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
그러니 청(淸)의 결계는 그에게 아무 효과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 그런데.
〖그러니 싫다.〗
망할 대도깨비가 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바보같이 계약자를 두고 다른 곳을 돌아다닌단 말이냐?〗
“랑야 님은 잘만 그러던데요.”
〖그놈은 네 아비의 부탁으로 그런 거고!〗
“그러니까 대도깨비님도 제 부탁을 들어주면 되잖아요. 랑야 님이 그런 것처럼.”
내 말에 천지해가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이었다. 그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대도깨비님은 랑야 님보다 훨씬 더 대단한 분이니까 제 부탁 들어줄 수 있죠?”
〖이런…….〗
천지해가 고약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는 휙 몸을 돌렸다.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냥 상황만 확인해 주면 되는 것이냐?〗
“설마요.”
픽 웃고는 말했다.
“해진이 오빠든, 해솔이 언니든. 두 사람이 위험에 처한 것 같으면 좀 도와주세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천지해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때, 그가 물었다.
〖너는?〗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천지해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두 녀석을 도와주다가 네가 위험에 처하면?〗
예상치 못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활짝 웃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설사, 일어난다고 해도.
“대도깨비님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제가 처리할게요.”
〖말이나 못하면.〗
천지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도록 하마. 그때까지 얌전히 있거라.〗
“글쎄요. 정말 죄송하지만 그건 확신할 수 없겠는데요.”
금이 쩍쩍 가고 있는 결계를 보며 나는 말했다.
“아무래도 좀 도와줘야할 것 같아서요.”
〖정말이지, 내 계약자께서는 왜 이리 이타적인지.〗
“아빠를 닮은 거죠.”
천지해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여 나는 급히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확인하러 가 보기나 하세요. 해진이 오빠랑 해솔이 언니한테 정말 무슨 일 생겼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요!”
〖나참, 정말이지.〗
천지해가 와락 얼굴을 찌푸리고는 두 뺨을 부풀렸다.
〖그래, 간다! 가!〗
그렇게 불퉁하게 소리치고는 대도깨비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좋게 말할 때 갈 것이지.
여하튼, 나는.
쿵! 쿠궁―!
굉음이 울려대고 있는 하늘을 한껏 올려다봤다.
원래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르고 맑은 하늘이 눈에 담겨야 할 테지만, 보이는 건 불길하기 짝이 없는 붉은색밖에 없었다.
거주자들의 분노에 오염된 거라고 하던가?
“뭐, 어쨌든.”
그림자를 이용해 창을 만들어 낸 후, 나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사실, 공중전은 자신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결계가 살짝 깨진 틈을 타, 밖으로 나가서는.
〖죽어라!〗
청(淸)의 후손을 노리는 거주자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그 속에서 청해진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누나, 괜찮아?!”
콜록콜록!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어난 연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망할!’
청해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이렇게 됐지?’
청해솔을 찾는 건 금방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
겉모습으로 보아 청(淸)의 후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위험하다고.
때문에 청해진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누나가 죽는 건, 상상이 가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저 위험한 여자가 자신의 누나를 해칠 수도 있으니까.
‘청해진, 안 돼!’
왜인지 모르게 청해솔이 그를 말렸지만, 어쨌든 청해진은 그녀를 공격했고.
“누나! 괜찮냐니까?!”
지금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청해진이 얼굴을 구기고는 <[특수 스킬] : 청(淸)하리다>를 사용했다.
연기 속에서 암만 그녀를 불러 봤자 답이 돌아오지를 않으니.
‘일단 연기부터 걷어 낼 수밖에.’
그렇게 걷어 낸 연기 속에서 먼저 보인 건.
“청(淸)의 후손들은 정말 당신을 제외하고는 멍청한 것 같네요.”
그 위험한 여자였다.
“내 동생한테 멍청하다고 말하지 말아 줄래? 멍청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나뿐이거든.”
여자의 말을 뒤이어 청해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청해진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부르자마자.
“청해진, 이 멍청아!”
청해솔의 성난 목소리가 그에게로 내리 꽂혔다.
“상대를 봐 가면서 덤벼야지!”
“아니, 나는.”
“애초에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이매망량은 어쩌고!”
“지원 요청 보냈잖아!”
청해진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왔지!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와?!”
“올 사람 많잖아!”
청해솔이 일그러진 얼굴을 보였다.
“리오도 있고, 리타도 있고!”
“윤리오 몸 회복한지 얼마 안 됐어. 그런 애를 아저씨, 아니. 길드장님이 보낼까 봐?”
“리타는!”
“걔는 CW 돕고 있는 중.”
“그럼 혼자 온 거야?”
청해솔이 벙찐 얼굴로 물었다.
“아니. 리사랑 같이 왔는데?”
“뭐?”
“윤리사 전 길드장님이랑 같이 왔어. 아마, 지금 내가 난리친 걸 진작 들었을 테니…….”
청해진이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사이에, 여자가. 아니, 부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매끼리 사이좋아서 보기 좋지마는, 저를 사이에 두고 싸우지는 말아 줬으면 하는데요. 외롭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청해솔이 치미는 말을 삼키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부네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여전히 들려있었다.
청정하의 심장이 들어있는 것.
‘뺏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서 저 상자를 강탈해야만 했다.
‘죽여서라도.’
애초에 부네는 탈이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탈’은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적어도 청해솔에게는 그랬다.
AMO로 넘겨 봤자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잡은 탈을 수장에게 돌려준다는 말이 있는 곳이니.
‘여기에서 처리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신들이 몰려온 이곳, 남해.
자신이 조금에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결계가 깨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해는 끝이야.’
청해솔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먼 곳까지 피난 온 사람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동시에 결계를 부수고자 아등바등 싸우고 있는 신들과 대적 중인 어린 청(淸)의 후손들도.
청해솔이 그 모두를 떠올리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해진, 리사도 너와 같이 왔다고 했지?”
“응.”
윤리사가 이곳에 왔다면, 그녀와 계약한 거주자도 왔을 터.
아니나 다를까.
〖어이쿠, 무슨 먼지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해야, 청(淸)의 힘을 한 번 더 사용하려무나. 아직 먼지가 자욱한 게 숨쉬기 힘들어서, 원.〗
도깨비다.
그것도 대도깨비.
청해솔이 그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자를 빼앗아 주세요!”
그 말에 부네가 혀를 찼다.
“소용없는 짓을 하네요. 저 자가 암만 대도깨비라고 해도 제 손에 있는 것을.”
〖뺏을 수 있느니라.〗
대도깨비가 부네의 말을 끊었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부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언제?’
그는 분명 청해진의 곁에 있었다.
자신과는 거리가 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그인데.
〖자, 보거라.〗
어느새 다가와서는.
〖여기, 빼앗지 않았느냐?〗
손에 들려있던 것을 빼앗아 버렸다.
아주 쉽게, 자신이 우습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건네는 목소리에 부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