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부네(1)
청(淸)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남해.
그 핏줄이 아니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 가주는 피난민을 받기 위해 모든 문을 열었고, 따라서 남해는 청(淸)의 후손이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거주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청(淸)의 가주가 있는 본가는 아니었다.
이곳은 가주가 허락하거나, 아님.
‘거주자의 후손이거나.’
두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만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즉, 눈 앞의 여자는.
“당신도 거주자의 후손이었군?”
저와 똑같은 존재였다.
청해솔의 날선 질문에 부네가 싱긋 웃었다.
“맞아요. 역시 똑똑하네요.”
“모르면 바보지.”
청해솔이 비아냥거리고는 물었다.
“저 망할 거주자들은 네가 데리고 온 녀석들인 건가?”
“설마요.”
부네가 푸스스 웃고는 대답했다.
“제가 암만 거주자의 후손이라고 해도, 저 분들께 명령을 내리거나 그럴 힘은 없답니다.”
그러고는 물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무엇이?”
“그 멍청이들을 다스리는 거요.”
당연히, 부네가 가리키는 ‘멍청이들’은 청(淸)의 원로들이었다.
그녀가 청해솔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고서는 다시금 물었다.
“저라면 그 멍청이들이 죽든 말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당연히 바깥에 있는 피난민들 역시 마찬가지.
청해솔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 뿐이에요.”
부네가 미소를 그렸다.
“저는 청(淸)과 같은 이름 있는 거주자의 핏줄이 아닌지라, 당신이 견디고 있는 무게를 잘 모르겠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이윽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멍청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알거든요.”
부네가 살풋 웃음을 보였다.
“그러니 묻는 거예요.”
“힘들지 않냐고?”
“네. 만약 힘들다면 당신의 도주를 도와주지요.”
청해솔이 실소를 흘렸다.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이봐, 너.”
청해솔을 중심으로 거칠게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곳이 청(淸)의 중심부라는 걸 알고서 지껄이고 있는 거겠지?”
거세게 불고 있는 바람은, 당장에라도 칼날처럼 변해 부네를 노릴 것만 같았다.
무서울 법 한데도 부네는 웃는 낯을 유지했다.
동시에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 대답에 청해솔이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유랑단의 아홉탈 중 하나, 부네.
그녀는 두문불출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청해솔이 곰곰이 생각했다.
눈 앞의 여자가 언제부터 그랬는지 말이다.
그러다 생각해 냈다.
“백정.”
또 다른 탈을 말이다.
“전대 백정이 죽고 난 후부터 네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기 시작했지?”
시종일관 웃고있던 여자가 표정을 굳혔다.
‘옳거니.’
청해솔이 픽 웃었다.
“그 자식의 복수를 하려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애초에 청해솔은 그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유랑단에 엿을 먹이고 싶은 거야? 아님,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고자 하는 저 콧대높은 신들에게 엿을 하나 주고 싶은 거야?”
둘 모두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답은 들어야지.’
청해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느새 웃음을 지운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청해솔, 당신은 정말.”
부네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네요.”
“그 말 많이 들어.”
예를 들면 이운조.
그녀는 만날 때마다 저런 말을 하며 툴툴거렸다.
“자, 그래서?”
청해솔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굳이 이곳까지 나타나 네 정체를 드러낸 이유는 뭐지?”
부네가 거주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을까?
같은 유랑단의 식구라고 해도 모를 사실일 게 분명했다.
부네는 청해솔의 질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가,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여기.”
그 상자를 청해솔에게 내민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초랭이의 심장입니다.”
“뭐?”
청해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누구의 심장이라고? 초랭이? 그 자식은, 지금.
‘위에 있잖아.’
청정하라는 이름으로, 가람과 다른 청(淸)의 후손들과 함께 신들을 상대 중이었다.
크게 당황한 얼굴을 향해 부네가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다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청해솔, 당신은.
“도망치고 싶지 않나요?”
질문이 아닌, 명령이었다.
청정하를 구하고 싶다면, 그의 심장이 터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명령.
청해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쿵! 쿠궁!
굉음과 함께 결계에 금이 갔다.
“으아앙! 엄마아!”
“꺄아악!”
“가주님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결계가 깨지려고 하고 있잖아!”
“우리 괜찮겠지?”
사람들은 그때마다 요란하게 울며 신경질을 냈다.
들려오는 목소리들 중, 청해솔을 욕하는 말에 욱할 뻔했지마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어서 청해솔을 도와야했다.
더욱이 그녀의 동생인 청해진도 화를 참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나는 물었다.
“해진이 오빠, 괜찮아?”
“그럼, 괜찮지.”
청해진이 곧장 대답했다.
“사람들이 일부러 우리 누나를 욕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패닉에 빠진 상태잖아?”
그러니까 이해한다는 소리였다.
하여튼.
‘사람 좋기는.’
청해솔도 그렇고 청해진도 그렇고, 남매가 모두 사람이 좋았다.
‘물론 윤리오랑 윤리타도 두 사람 못지않게 착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 청(淸)의 본가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없었나?’
남해에 내려온 게 무척 오랜만이라 말이지.
‘잘 모르겠네.’
살포시 미간을 좁힐 때, 청해진이 말했다.
“리사, 너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외지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
“알겠어.”
결계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
결계 밖에서 청(淸)의 후손들이 망할 신들과 대항하고 있다고 하지만.
‘위험해.’
빌어먹을 거주자들의 숫자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안 돼.’
금방 결계가 깨지고 말 거다.
‘청해솔이 펼친 결계에 과연 내 힘을 적용시킬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대도깨비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그럴 수밖에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대도깨비님이 좀 말려 주면 안 되나요?”
〖저 녀석들 말이냐?〗
천지해가 하늘을 뒤덮고 있는 망할 신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내 대답에 대도깨비가 유쾌하게 웃었다.
〖말릴 수 있다면 진작에 말렸을 거다.〗
하긴, 그렇겠지.
그러나 말릴 수 없어 가만히 두고 있는 거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음?〗
“아니, 이제 마음껏 밖을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미지 영역에 갇혀 있을 필요 없이 말이다.
“저 같으면 좋다고 구경할 텐데, 왜 세상을 파괴하려고 드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귀한 신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 때문에 나의 세상이 얼마나 파괴됐는지 모른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소중한 나의 세상을 이렇게 만든 ‘적’도, 그에 화답하듯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 저 ‘신’이란 작자들도.
그렇게 분노할 때.
〖리사.〗
대도깨비가 나를, 아니.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천지해가 내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그에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데.
〖한 번 생각해 보거라.〗
대도깨비가 뜻밖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위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 한때 숭배받았던 놈들이다. 자신들이 있어 문명이 세워졌다고 믿는 놈들이지.〗
“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저들 입장에서는 사실이었으니. 너도 알고 있겠지?〗
미지 영역에 거주자들이 갇히기 이전, 무슨 시대라고 불렸는지.
신인(神人).
각성자들은 그 이름으로 불렸고, 사람들은 그들을 신의 대리인 혹은 신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며 떠받들었다.
신인이든, 각성자든. 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여하튼,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갇히게 됐지.〗
인간과 계약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그 공간에 말이다.
〖당연히 거주자들은 날뛰었고, 이내 그들은 생각했다. 자신들이 왜 이곳에 갇혔는지에 대해.〗
그렇게 내린 결론은.
〖자신들을 숭배하며, 찬양해 대던 인간들이 미지 영역을 만들었다는 것이었지.〗
“바보들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아니, 인간이 무슨 재주가 있어 그런 걸 만들어?!
물론 가능성은 있었다.
‘특수 스킬.’
그 스킬을 이용해 미지 영역을 만들어 내면 되니까.
그렇지만 그런 스킬이 과연 존재할까? 애초에, 미지 영역을 만든 존재는 진작 죽었을 텐데?
내 말에 천지해는 웃기만 했다.
그때였다.
쿠구궁!
청해진이 들어간, 본가. 그 안쪽에서 굉음이 들려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