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절망과 희망(3)
벚꽃이 저물었다.
아니,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세상.
꽃은 피지 않았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
여름 또한 계절을 느끼기도 전에 사라졌다.
뜨겁게 이글거려야 하는 태양 대신 나타난 건, ‘신’이었다.
그것도 내게는 익숙한 신.
아폴론, 그 이전은 헬리오스.
두 이름이 동급으로 취급된 건지 모르겠으나, 태양신이 여름 대신 이 땅에 강림했다.
그를 처치하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지.”
내가 지난 여름을 회상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최설윤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태양신을 상대하면서 얻은 상처.
광혜원이 어떻게든 치료를 해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최설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영광의 상처라면서 웃고는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시준 씨가 마침 회복해서 다행이었어. 아니었음, 그 망할 신과 지금까지도 계속 싸우고 있었을 테니.”
최설윤의 말대로였다.
태양신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윤사희의 치료 이후에 정신을 차린 백시준 덕분이었다.
그가 가진 스킬, <[특수 스킬] : Delet>이 설마 ‘신’에게도 통할 줄은 몰랐다.
너무 늦게 정신을 차렸다며, 그는 꽤 자책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뭐, 시준이 아저씨가 덕분에 그 망할 신은 쓰러뜨렸지만.”
“남은 산이 아직 많지.”
최설윤이 내 말을 끊고는 짓궂게 웃었다.
“당장, 신들이 시준 씨를 노리기 시작했잖아?”
“그건 괜찮아요.”
백시준은 별일이 아니고서야 이매망량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됐으니.
그리고 그 이매망량은 윤사희가 있는 귀수산에 있었다.
“우리 할머니의 악명이 신들 사이에서 얼마나 자자한지, 귀수산에는 접근조차 안 하고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귀수산은 몰려든 피난민들로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최설윤은 내 말에 웃으며 수긍했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 같아. 처음 봤을 때 엄청 오싹했으니까”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그거야 리사가 사희 님의 핏줄이어서 그런 거 아닐까? 리타도 리오도 멀쩡한 것 같았으니까. 그보다.”
최설윤이 잠시 말을 끊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것들을 다 어떻게 치우지?”
그녀가 가리키는 건, 몬스터들의 사체였다.
미지 영역이 무너진 세상.
그렇다고 해도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즉, 던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다.
우리가 망할 신들에게 대응하고 있을 때, 수많은 던전은 공략이 되지 못한 상태로 존재했다.
그러다 하나씩 터지기 시작했다.
와중에 게이트(Gate)까지 일어나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인간들을 위협했다.
지금 나와 최설윤이 처리한 게, 바로 그 게이트에서 터져 나온 몬스터들이었다.
어쨌든 그 탓에 DMO는 완전히 괴멸된 상태. AMO에 빌붙어 겨우 숨만 유지 중이었다.
“듣기로는 DMO의 본부장인.”
“우리 금이현 씨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상태라지.”
최설윤이 내 말을 다시 한 번 더 끊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지.”
DMO는 AMO와 더불어 한국의 주요 국가 기관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의 우두머리인 금이현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스킬, <[A, 숙련 불가] 살신성인(殺身成仁)> 때문이었다.
자신의 수명을 담보로, 사람을 구하는 그 스킬 때문에 금이현은 크게 쇠약해진 상태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귀수산으로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금강산.”
“그리고 남해로 피난 중이지. 우리 금강산에도 많이 몰려 있고.”
최설윤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 끔찍한 상황이 언제 끝날까?”
“글쎄요.”
꽃이 피기 전에.
정확히는, 벚꽃이 피기 전 모든 상황을 정리하겠다고 했건만 벌써 가을이다.
“끝나기는 할까요?”
자조적으로 내뱉은 목소리에 최설윤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반응했다.
“당연하지.”
그 말을 뒤이어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해야, 답지않게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느냐?〗
대도깨비였다.
〖언제고 무지한 갯지렁이 녀석들은 모두 소멸할 거다.〗
천지해가 가리키는 ‘무지한 갯지렁이 녀석들’은 바로 ‘신’들이었다.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그들을, 대도깨비는 하찮다는 듯이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처음보다 망할 녀석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느냐?〗
“한국만 보면 그렇죠.”
전세계적으로 보면 아직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거주자들이 날뛰는 중이었다.
〖하지만, 네 어미의 나라는 거의 모든 땅을 수복한 모양이던데?〗
“그거야…….”
에일린 리.
그녀가 꽤 강적이어야말이지.
“더욱이 미국은 원래.”
역사가 없는 나라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도 모두 ‘마리아’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
“어쨌든, 미국이 대부분의 땅을 찾은 상태라니 다행이네요.”
“맞아. 동맹 관계니 금방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
“하늘길이 막혀서 제대로 도움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현재 하늘은 ‘신’이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그래도, 뭐.”
천지해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대도깨비님께서 함께라 정말로 든든하네요.”
자랑스러운 나의 거주자가, 내 웃는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나를 아주 이동 셔틀로 써먹을 작정이구나.〗
“셔틀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배웠어요?”
〖류화홍, 그 아해한테서 배웠다.〗
정말 좋은 말을 배웠다 싶었다.
당연히 반어법이고, 어쨌든 간에.
“부탁 좀 할게요. 물론, 엄마가 있는 곳 상황이 안정되면요.”
〖그래, 귀한 계약자께서 부탁하는 일을 내가 못 들어줄까?〗
못 들어주는 건 아니고, 안 들어줄 것 같은데.
‘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대도깨비가 삐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천지해, 그도 엄연히 미지 영역의 거주자. 즉, ‘신’인데 얼마나 마음이 좁은지 툭하면 삐지기 일쑤였다.
‘물론, 이걸 앞에서 말하면 또 바로 삐질 테니.’
속으로 삼키기로 하며 말했다.
“일은 이제 끝인가요?”
“그런 것 같은데? 지원 요청 오는 것도 없고, 서울은 강북만 대충 정리하면 수복할 수 있을 것 같네.”
희망찬 이야기였다.
“강남은 끝났군요.”
“그렇지.”
최설윤의 웃음이 짙어졌다.
“망할 신들이 서울에 눈을 많이 두고 있어서 다행이야. 다른 지역으로는 남해가 있지만.”
“그쪽은 청(淸)의 가주님께서 잘 막고 있으니까요.”
걱정 없었다.
단아와 단이, 그리고 단예.
한태극과 그의 세 손주가 현재 피난을 간 곳도 바로 남해였다.
“서울이 빨리 정리되면 좋겠네요.”
“그 망할 태양신만 아니었으면 여름에 정리될 수 있었는데 말이지.”
최설윤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집트에나 갈 것이지.”
“이집트에는 다른 태양신이 나타났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참고로 이집트는 DMO와 똑같은 상태였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
나라 자체가 괴멸에 이른 상태라고 하던가?
곳곳에 지원을 요청 중이라고 들었지만…….
다들 자기 나라 지키기 바쁜 상태인데, 대체 어느 나라가 선뜻 도와줄까 싶었다.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와중에 또 유랑단, 이 빌어먹을 탈쟁이 새끼들이 활개 치고 있다지?”
최설윤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빌어먹을 탈쟁이들, 어떻게 그 망할 신들이랑 손을 잡았대?”
구시렁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유랑단의 수장.
그로 인해 탈들은 신들과 함께 편히 날뛰게 된 것이리라.
당연히 그들 중에는.
‘저세상.’
내가 아직 잡지 못한 나의 ‘적’이 있었다.
“여하튼 돌아갈까? 지원 요청 오는 곳도 없는데.”
“그럴까요?”
“그래. 괜히 신들이 튀어나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잖아.”
최설윤의 말에 대도깨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가 곤란하느냐? 이 몸이 너희 곁에 있거늘.〗
“아이, 깜짝이야!”
최설윤이 화들짝 놀란 후 말했다.
“물론, 대도깨비님이 있어서 엄청 든든하죠! 하지만 싸움은 피하는 게 좋잖아요!”
뭐, 그것도 그렇지.
대도깨비가 순순히 인정할 때였다.
최설윤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휴대폰은 아니었다.
신들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전자 기기는 불통이 되었으니.
저건 CW가 급히 마련한 통신의 역할을 하는 장치였다.
“여보세요?”
가볍게 연락을 받아든 최설윤의 표정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오케이, 알겠어.”
최설윤이 연락을 끊은 후 내게 말을 건넸다.
“리사,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어디에서요?”
“남해.”
한태극의 세 손주, 내 친구들이 피난을 간 곳이었다.
표정을 굳힌 내게 최설윤이 담담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청(淸)이 위협받는 중인 것 같아.”
그들의 전력으로도 막기 불가능할 정도로.
살짝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두 손을 꽉 주먹 쥐며 말했다.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