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좌절과 절망(4)
촤르륵!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를 할미의 숲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함께 살자면서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쿨럭…….”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까?
이를 악 물고는 피를 토해 내는 남자 앞을 지켰다.
동시에 말했다.
“대도깨비님.”
〖이 녀석은 걱정말거라. 내 최대한 치료해 볼 테니.〗
대도깨비가 나를 대신해 부상을 입은 남자 앞을 지키며 말했다.
〖그보다, 너는.〗
“저 자식한테 집중하라고요?”
그림자를 이용해 창을 꺼내들고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집중할 테니까요.”
〖그래.〗
대도깨비가 믿겠다는 듯, 답하고는 남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대도깨비가 치료를 시작한 남자는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다.
“저세상, 네가 지금 누구를 공격한 줄 아는 거야?”
“당연히 알지.”
저세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시준.”
그가 공격한 사람은, 바로 백시준.
“백도윤의 아버지이자, 안보국의 고위 관계자. 그리고.”
“특수 스킬을 가지고 계신 분이죠. 그것도 꽤 재미난 스킬을요.”
저세상의 말을 뒤이어 하며 누군가 나타났다.
“……이매.”
“안녕하세요, 꼬마 아가씨.”
이매가 히죽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어릴 적에 보고 처음 보는 거죠? 그새 많이 자랐네요.”
이매가 자신과 나의 키를 비교하는 손짓을 했다.
그에 조용히 말을 내보냈다.
“당신은 그대로네요.”
“하하! 탈이니까요. 이 탈을 쓰면.”
이매가 자신의 탈을 얼굴에 쓰고는 말했다.
“노화가 멈추거든요. 그냥, 그대로 시간이 멈춘다고 해야 할까? 꽤 재미난 물건이에요.”
이매 탈을 벗은 망할 자식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 군, 앞에 있는 아가씨. 제가 상대할까요?”
“아니.”
저세상이 단호하게 말했다.
“윤리사는 내가 상대해. 댁은 저기 있는 도깨비나 처리하고, 백시준이 가지고 있는 특수 스킬이나 강탈하도록 해.”
“본부대로.”
그 말과 함께 이매가 사라졌다.
나는 다급히 그림자를 움직여 대도깨비와 백시준 주위로 보호막을 넓게 펼쳤다.
카앙!
보호막에 부딪힌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이었다.
“윽……!”
쇠사슬이 손목을 옭아맸다.
자신의 무기를 이용해 내 손목을 붙잡은 저세상이 비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곳에 한눈 팔 여유따위 없을 텐데?”
“저세상!”
까드득, 이를 갈고는 그리자를 이용해 쇠사슬을 잘라 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뭐야?’
손목을 묶고 있는 사슬이 잘리지 않았다.
저세상이 당황해하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잘리지 않을 거야. 나름 12공방에서 만든 물건이니까.”
“그런……!”
12공방이 저 자식에게 무기를 만들어 줬다고?
‘아니, 아니야.’
12공방이 저세상에게 무기를 만들어 준 건, 과거.
그러니까 장천의가 버린 세계의 일.
『각성, 그 후』에도 기록되어 있는 일이기도 했다.
작게 숨을 내쉰 후, 사슬에 묶인 손목에 힘을 줬다.
잘라내지 못한다면.
“윽?!”
아예 이용해 버리면 되는 일.
나는 그대로 사슬을 끌어당겨 저세상이 내게 가까이 오게끔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유로운 다른 손을 움직였다.
“커헉!”
내게 가까이 온 저세상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사슬에 묶인 손목이 얼얼했다.
뼈에 금이 가거나, 그것도 아님 부러진 것 같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아프지 않네.’
라며 안심하는 순간이었다.
쐐액!
날카로운 것이 내게 날아들었다.
황급히 그림자를 움직여 날아오던 것을 막아 냈다.
“이런, 우리 꼬마 아가씨. 스킬을 다루는 게 너무 능숙한데요?”
이매가 비딱하게 웃었다.
“이매! 윤리사는!”
“네네, 우리 세상 군이 맡을 테니 넘보지 말라고요?”
비아냥거리며 묻는 목소리에 저세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매가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세상 군. 보세요. 저 망할 그림자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요. 백시준의 스킬을 강탈하려면 그를 죽여야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스킬의 시전자를 죽여야죠.”
이매가 나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 순간 오싹하게 소름이 일었다.
『각성, 그 후』에서 이매는 가장 오랫동안 수장의 곁을 보필했던 ‘탈’이라고 했다.
그만큼 살아 온 세월이 있으며, 또한.
‘그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겠지.’
그래, 내 앞에 있는 ‘탈’은 살인귀. 그 자체다.
‘그러니까 집중해야해.’
잘못하면 내가 당한다.
아니,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이매를 보는 순간, 그가 사라졌다.
동시에 땅에 처박혔던 저세상이 내 발목을 잡고는 넘어뜨렸다.
“으헉?!”
갸우뚱하는 몸 위로 빠르게 검이 지나갔다. 이매가 눈으로 좇지 못할 속도로 내게 접근한 거다.
‘이런, 미친!’
저세상이 아니었으면 몸이 반으로 갈라졌을 거다.
저세상으로 인해 나를 놓친 이매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매우 언짢다는 듯이 말이다.
“세상 군, 이게 무슨 짓이죠?”
“윤리사는 내가 상대하기로 한 거 그새 잊었어?”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저거, 스킬 시전자를 죽이지 않는 이상 부술 수 없다니까?”
“실력이 없어서 부수지 못한다는 말을 잘도 하네.”
이매와 저세상.
어떻게 보면 같은 편인 그들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매가 말없이 저세상을 노려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세상 군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수 없죠.”
이매의 가벼운 목소리와 함께.
“제가 원하는대로 날뛸 수밖에요.”
그가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이후, 느껴진 건.
“윽……!”
고통이었다.
옆구리를 찌른 검이 대각선을 그리면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쿨럭.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윤리사!”
저세상이 쓰러지는 몸을 다급하게 받았다.
그러고는 나를 찌른 빌어먹을 망할 탈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매! 이게 무슨 짓이야!”
“세상 군이야말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예요?”
이매가 가볍게 피가 묻은 검을 털며 물었다.
“우리 수장님과 함께 손을 잡고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저세상이 입을 다물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죠.”
현재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한때 ‘신’이라 불리었던 거주자들이 곳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저세상.”
이매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고자 하는 일은 똑바로 해요. 괜히 우리 수장님 발목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요.”
저세상이 입술을 꾹 깨무는 순간.
〖아해야, 괜찮으냐?〗
대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입 밖으로 괜찮다고 말할 뻔 했다가 머릿속으로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대도깨비라면 내 생각을 읽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대도깨비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시준이 아저씨는요?’
〖고비는 넘겼다. 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 않더구나.〗
‘그럼, 바로 귀수산으로 이동해 주세요.’
〖너는?〗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시준이 아저씨부터 귀수산으로 옮겨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천지해가 내게 말했다.
〖죽지 말거라.〗
‘안 죽어요.’
픽, 웃음을 흘리고는 대도깨비와 백시준 주위로 펼쳤던 그림자를 바로 거뒀다.
“음……?”
저세상과 대치 중이던 이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자 안에 있었을, ‘목표’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이매의 말을 끊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윤리사!”
나를 붙잡으려는 손을 내친 후, 이매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탈쟁이 새끼야, 내가 계약한 거주자는 대도깨비야.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바다가 있는 한, 결코 죽지 않는 대도깨비.”
천지해.
“우리 자랑스러운 대도깨비께서는 또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지.”
즉, 백시준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말이었다.
이매가 내 말을 알아듣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참, 정말이지.”
일그러진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당신은 정말 그 망할 도깨비를 꼭 닮았네요.”
이매가 말한 ‘도깨비’란, 윤사해를 말하는 거겠지.
“이렇게 된 거, 당신이라도 죽여 그 스킬 좀 강탈해야겠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 꽤 성가신 스킬인 것 같으니까요.”
“할 수 있으면 해봐.”
옆구리에 손을 얹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을 붙여 지혈했기 때문이다.
“윤리사……!”
저세상이 탄식하듯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에 그를 흘긋보며 말했다.
“저세상,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저세상의 표정이 굳었다.
“내 적이 되고 싶은 거라면 똑바로 해. 저 자식 편에 서서 나를 죽이려 들라고.”
그것도, 아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내 손을 잡아.”
저세상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크게 동요하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다시금 말했다.
“잡아, 저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