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좌절과 절망(2)
“사야 언니랑 같이 계셨네요?”
다행이다.
사야 언니가 암만 귀수산의 이매망량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지만.
‘귀수산도 피해를 입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도마뱀, 정확히는 뱀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거주자의 몸에서 내려왔다.
〖으…… 윽…….〗
단번에 숨을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괜히 ‘신’이 아닌 모양이지.
〖네놈……! 인간 따위가 감히, 이 나를……!〗
검은 피를 토해 내는 거주자를 향해 말없이 창을 휘둘렀다.
서걱!
서늘한 소리와 함께 뱀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윽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소멸하는거죠?”
〖그래.〗
내 어깨에 앉아 있던 대도깨비가 풀쩍 뛰어내렸다.
이내 나와 똑같은 키로 자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겁도 없이 날뛴 녀석의 꼴사나운 최후지.〗
어떠느냐?
천지해는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말했다.
“정말 꼴사나운 최후네요.”
인간을 우습게 여기며 그들을 농락하려다가 소멸하는 최후라니.
“대도깨비님과 같은 미지 영역의 거주자라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아무렴, 네가 죽인 녀석과 내가 동급인 줄 아느냐?〗
대도깨비가 키득거리고는 랑야를 향해 말을 걸었다.
〖랑야, 이곳은 나와 이 아해가 맡을 테니 너는 네 아이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 보아라.〗
〖대도깨비님.〗
랑야가 전에 없이 정중한 모습으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 괜찮지. 괜찮고말고.〗
대도깨비가 호쾌하게 웃었다.
〖이 땅이 사라지고, 저 하늘이 무너지고 그리고.〗
금안을 번뜩이며 대도깨비가 말을 끝마쳤다.
〖용왕의 후손들이 지키고 있는 바다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는 절대 소멸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 말에 랑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아, 그 전에 밖으로 나온 다른 녀석들에게 말 좀 전해 다오.〗
대도깨비가 씨익 웃었다.
〖괜히 인간들에게 장난을 칠 생각 말고 그들을 지키라고.〗
〖알겠습니다.〗
랑야가 대답하고는 백호의 모습을 취했다.
뭐, 진짜 백호는 아니지만 그렇게 보였다는 거다.
〖사야, 타거라.〗
“죄송하지만, 아버지. 저는 강호의 등이 더 편하답니다.”
랑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야는 금강호의 등에 올라탈 뿐이었다.
이후 그녀는 대도깨비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사태가 정리된 후, 제대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거라.〗
대도깨비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랑야와 사야, 금강호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떠나간 그들의 뒤를 보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그럼, 괜찮지.〗
천지해가 뭘 그리 걱정하냐는 투로 말했다.
〖다른 녀석들도 곧 합류하여 랑야 녀석을 도울 테니 걱정 말거라.〗
다른 녀석들이라면…….
‘도깨비를 말하는 거겠지.’
대도깨비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다른 도깨비들의 위치를 모두 알 수 있으니.
〖그보다, 아해야. 너는 걱정되지 않느냐?〗
“네?”
〖네 가족들 말이다.〗
대도깨비가 물끄러미 나를 봤다. 그 시선에 픽 웃었다.
“걱정은 되지만.”
그뿐이었다.
“아빠도, 오빠들도 모두 강해요.”
무엇보다 그들 모두 이곳 도시에 있지 않을 거다.
귀수산에 있겠지.
‘윤리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역시 무사할 터.
‘윤리타라면 귀수산이 아님, CW에 있었을 테니까.’
CW는 온갖 방어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곳이었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할 정도의 방어 체계를 갖춘 곳이니, 분명 무사할 터다.
더욱이 귀수산이 만약, 다른 ‘신’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고 해도.
‘윤사희가 있어.’
그녀가 윤사해가 혼자서 처리하게 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어서 여기나 정리하죠.”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온갖 것이 나와 대도깨비를 향해 두 눈을 번뜩였다.
〖대도깨비다! 빌어먹을 대도깨비 녀석이다!〗
〖인간들의 편에 서는 것이냐!〗
〖수치도 모르는 놈!〗
〖네가 우리와 같은 존재라니 부끄럽도다!〗
대도깨비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뭐라고 떠드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구나? 하여튼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잘도 설치지.〗
“그 말 동감이에요.”
그림자를 움직이며 나와 대도깨비를 향해 살기를 보내는 ‘신’들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이 얼마나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인지 가르쳐줘야겠어요.”
〖아무렴, 그래야지.〗
대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계약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느니라.〗
그 말과 함께, 쿠르릉!
하늘이 울렸다.
대도깨비가 힘을 부린 거다.
그의 신호에 맞춰 나는 ‘신’이라 불리었던 존재들을 향해 땅을 박차올랐다.
세상이 멸망할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다.
장천의가 버린 세상과 똑같이 되지 않을 거란 말이다.
저세상, 그가 내 ‘적’이 됐다고 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이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에 의해 멸망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저세상이 암만 내 ‘적’으로 나를 막아선다고 해도 그랬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나의 ‘적’이 되기를 선택한 바보 같은 주인공을.
다시 되돌릴 작정이었으니.
***
“피난민은 모두 지하로, 나머지는 위에 있는 녀석들을 처리한다.”
쿠르릉!
하늘이 시끄럽게 울리는 와중에, 이매망량의 길드장이 말했다.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빌어먹을 것들을 떨어뜨리도록 해라.”
“넵!”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은 두려움 따위 없다는 듯 쾌활하게 대답했다.
마치, 자신들 앞에 벌어진 광경이 놀이판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윤사해는 긴장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저런 녀석들이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는 건가?
‘뭐, 겁을 먹는 것보다는 낫지.’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진작 겁을 질려 벌벌 떨었을 거다.
다름 아닌,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
절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그 존재들이 인간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으니.
‘리사는 괜찮으련지.’
윤사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
윤사해는 하나뿐인 딸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을 접고, 사방으로 그림자를 뻗쳐 길드원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야, 윤리사는 강한 아이니까.
더욱이 아이와 계약한 대도깨비가 어련히 알아서 잘 지켜 주고 있을 테니.
‘집중하자.’
딸아이가 돌아올 곳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했다.
“아버지!”
“리오.”
윤리오가 검을 쥐고서 외쳤다.
“저도 도울게요!”
“아니.”
윤사해가 고개를 저었다.
“리오, 너는 광혜원 헌터를 돕도록 하거라.”
“싫어요!”
윤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몸도 다 회복됐어요! 저도 다른 분들과 함께 싸우게 해 주세요!”
윤사해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윤리오의 말대로, 그는 꽤 호전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던 몸은 격한 움직임을 보인 후 쉽게 탈이 날 거다.
윤사해는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그 때문에 그는 아들을 타이르고자, 부드럽게 아들을 불렀다.
“리오.”
하지만 윤리오는 단호했다.
“저도 이매망량의 일원이에요. 제집을 지키는 데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아요.”
“가만히 있으란 게 아니라.”
“네 아비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지 않았더냐?”
갑작스럽게 웬 목소리가 부자(父子)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윤사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리오 역시 마찬가지.
서로 닮은 얼굴의 부자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이 도는 검은 머리칼. 그에 사물놀이패에서 입을 법한 복장을 한 여인이 싱긋 웃고 있었다.
“누구……?”
윤리오가 살포시 미간을 좁힐 때.
“할머니.”
윤사해가 그녀를 불렀다.
꽤 찌푸린 얼굴로 말이다.
“오, 나를 바로 알아보는구나?”
여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윤사해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귀수산에서 이런 식으로 등장할 사람은 한 명뿐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여인이 픽 웃었다.
“웬만하면 내 나서려 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말이지.”
그녀가 하늘을 보며 읊조렸다.
“감히, 내 소중한 추억이 자리한 곳에 저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발을 들이려고 하니 나서게 됐다.”
애초에 여인은 귀수산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귀수산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대신, 머무는 곳이 위협을 당하면 귀수산 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
태초 이매망량을 이끌었던 여인.
지금은 옛모습의 분신만을 남겨 둔 그녀, 윤사희가 하늘을 뒤덮고 있는 우매한 존재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윤리오에게 말했다.
“사해와는 다르게 참하게 생긴 녀석아, 너는 네 아비의 말을 따르도록 하거라.”
“네?”
“네 아비 속 썩이지 말고 말 들으라는 소리다.”
윤사희가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일으켰다.
“사해,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네 아랫것들을 모두 물리거라.”
“혼자서 처리하실 수 있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윤사희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네 힘이 어디에서 온 건지 그새 잊은 것이냐?”
묻는 목소리에 윤사해는 입을 다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