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좌절과 절망(1)
미지 영역.
그곳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은 결코 인간을 죽일 수 없다.
인간을 죽이는 즉시 소멸하는 것이 바로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
그래, 그랬건만.
〖아하하하하!〗
그 규칙이 무너졌다.
세상이 정한 진리나 다름없는 규칙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이 도망치는 인간들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에 대항하는 존재들 역시 있었으나.
〖인간 따위가! 고작 인간 따위가 나를 막으려고 드느냐!〗
미지 영역의 ‘거주자’라고 불리기 전, 그들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존재들.
인간은 그들 앞에서 미약했다.
도시는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였고 사람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그 가운데에서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불에 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었구나.”
나지막하게 건네지는 목소리에 남자가, 아니. 저세상이 일그러진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당신이 원한 대로 된 거지.”
“아니지, 아니야. 내 뜻을 알고 먼저 손을 내민 건 바로 너다.”
그러니.
“이 또한 네가 원하는 대로 된 것 아니겠느냐?”
저세상은 답을 피했다.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려 달라 울부짖는 비명을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있던 그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거 알아?”
유랑단의 수장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쳐다봤다.
저세상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 불꽃은 그래도 금방 수그러들 거라는 것을.”
“흐음?”
“암만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아니.
“신이라고 해도 그들 역시 목숨이 있는 생명체잖아.”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랬다.
더욱이 그들에게 있어 바깥 세상에서의 죽음은 ‘소멸’과도 같았다.
미지 영역이 존재할 때에는 바깥 세상에서 목숨을 잃어도 괜찮았다.
소멸을 당하는 것과 비슷할 뿐,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결국 미지 영역에서 다시 눈을 뜨니.
하지만 미지 영역이 무너지고, 그 안의 모든 존재가 바깥으로 나온 지금은 달랐다.
“죽으면 끝이야.”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이든, 그들과 다른 인간들이든.
죽으면 끝이었다.
저세상이 그 말을 끝내자마자.
쏴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봐 봐.”
도시를 휘감은 불꽃이 점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저세상이 웃었다.
“내 말대로지?”
저 비를 내린 건, 다름 아닌 미지 영역의 거주자였다.
용왕과 같은 급을 지닌 존재가 뿌린 비로 기억하지마는.
‘이제 상관 없는 이야기지.’
유랑단의 수장은 저세상의 말에 미소를 그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느냐?”
“그래.”
저세상이 담담히 대답했다.
“내가 이 세상이 무너지기를 원한다는 것도?”
“그럼.”
저세상이 픽 웃었다.
“그러니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지.”
원래, 이 멸망은 유랑단의 수장에 의해 시작되는 거였으니.
그 멸망에 이번에는 자신이 관여했다.
저세상이 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입을 열었다.
“곧, 신들끼리 분열할거야.”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과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그들이 곧 충돌할 거다.
저세상은 인간을 지키고자 하는 ‘신’들과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버려진 지난 세계에서는 그랬다는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 자신은,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과 손을 잡아 인류의 적이 될 거다.
그렇게 진정한 ‘적’이 되는 거다.
저세상이 주먹을 꽉 쥐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알겠지? 이 세상에 있어 가장 위협적인 신을.”
“그럼, 물론이지.”
유랑단의 수장이 웃었다.
“너라면 진작 알아차렸겠지만. 나 또한.”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가 곧 풀렸다.
이내 드러난 두 눈은 기이한 색을 품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는 외관.
그 얼굴을 지닌 유랑단의 수장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저들과 같은 존재란다.”
***
“이런, 미친!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야?!”
짙은 분홍색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 남자, 청(淸)의 방계인 청정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냐고!”
〖쇠, 쇤네도 모르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유랑단의 ‘초랭이’로 한때 청(淸)을 골라 사냥하고는 했던 그가 가람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 그를 청해솔이 말렸다.
“그만해.”
“가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정말 모르는 겁니까?”
〖그렇소. 쇤네도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말 모르겠구려.〗
가람의 말에 청해솔의 두 눈에 음영이 졌다.
한반도의 끝에 위치한 남해.
이곳에도 미지 영역에서 튀어나온 거주자들의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데.
‘서울은 지금 어떤 상태일지.’
청해솔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하나뿐인 동생이 걱정됐지만, 이 마음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청(淸)의 가주.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절대 안 됐다.
그때였다.
〖용왕의 후손들이다!〗
청(淸)의 보금자리에 불청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낱 인간과 붙어 낳은 끔찍한 것들이 저기 있다!〗
어떻게 봐도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분명한 존재들.
그 존재들을 보며 청해솔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두 들어라.”
그녀의 말이 남해 전체에 울려 퍼져나갔다.
“미지 영역이 파괴됐고, 그곳의 모든 거주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들 대부분은 인간에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그러니.
“한때 신이라고 불리었던 저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우도록 하라.”
청해솔이 말을 끝마치며 자신의 뒤로 휘몰아치는 바다를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남해 용왕 청(淸)의 자랑스러운 후손들이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청해솔은 감히 남해를 찾아온 불청객들을 향해 청(淸)의 힘을 드러내 보였다.
***
“으아아앙!”
불타 버린 도시.
폐허나 다름없게 된 거리 한복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아! 아빠아아!”
처절한 울음 소리를 듣고서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이 눈을 부라렸다.
〖아이다.〗
〖인간의 아이군.〗
〖시끄러워.〗
〖먹어 버릴까?〗
아이를 두고 나누기에는 꽤 섬뜩한 대화였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린 아이는 그저 부모를 찾아 울 뿐이었다.
그 아이를 두고 나누던 대화가 돌연 끝났다. 다들 결론을 내린 거다.
시끄럽게 울고 있는 저 아이를 먹어 치우자고.
그렇게 누군가 입을 벌릴 때.
“강호, 먹어 버리세요.”
거주자의 후손이 나지막하게 제 마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크르릉!
이제껏 보지 못한 크기의 호랑이가 거주자 중 하나를 먹어 치웠다.
〖으악!〗
어깨가 뜯긴 거주자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피, 피다! 피야!〗
한때, 인간의 칭송을 받던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인간과 같은 붉은 피를.
〖이, 이런, 한낱 미물이!〗
금강호에게 어깨가 뜯긴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마수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들 때.
〖안 되지, 안 돼.〗
그와 똑같은 존재가 그 손을 붙잡았다.
다르다면, 하나.
그는 인간과 계약한 미지 영역의 거주자였다는 것.
윤사해와 계약 중인 도깨비.
랑야가 붉은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저 호랑이 녀석은 우리 딸이 손수 키운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네까짓 놈이 해치려고 두게 둘 것 같으냐?〗
〖너, 너는 대도깨비의……!〗
〖귀염둥이지.〗
랑야가 씨익 웃고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순식간에 소멸시켜 버렸다.
그 사이 아이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다른 거주자들은 도망쳤다.
랑야가 그 뒤를 쫓으려다가.
“아버지께서 스스로를 귀염둥이라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딸의 말에 멈추었다.
〖크흠, 못 들은 것으로 해라.〗
“그러기에는 이미 들은 말이 있는지라 어려울 것 같군요.”
사야가 싱긋 웃으며 울고 있던 아이를 안아 들었다.
류화홍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화홍, 마침 잘 왔어요. 이 아이를 길드로 데려다주겠어요? 저는 아무래도 아버지와 함께 구조 활동을 계속해야 할 것 같네요.”
즉, 폐허나 다름없이 변한 도시를 돌아다니겠다는 말이었다.
류화홍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조심해요.”
“물론이죠.”
사야가 싱긋 웃을 때.
〖거, 내가 보는 앞에서 애정 행각은 자제하지 그러느냐?〗
랑야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류화홍이 그 말에 아이를 안고서 바로 사라졌다.
사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랑야를 쳐다봤다.
“아버지도, 참.”
〖내가 못 할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보느냐? 그보다, 윤사해. 이 자식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원!〗
랑야가 심통이 난 얼굴로 투덜거릴 때였다.
쿠구궁!
대지가 한순간 흔들리더니, 그들의 앞에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신’의 시체가 떨어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속, 도깨비가 제 딸을 보호했다.
〖윤사해……?〗
연기 속에서 보이는 인영에 랑야가 조심스럽게 제 계약자를 불렀다.
하지만 ‘신’을 처치한 건 윤사해가 아니었다.
“아, 랑야 님.”
윤리사가 연기를 걷어내며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