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져 버린 곳에서(2)
“그거 아십니까? 서차윤은 사실, 자신의 의지로 리오 군과 리타 군을 서커스에 넘겨 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윤리오와 윤리타.
그리고 윤리사까지.
윤사해가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식들을 외면하게 된 계기.
“그는 속았을 뿐입니다. 서커스가 그를 어떻게 속였는지는 모릅니다.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거든요.”
오래전이라고 해도, 20년 정도 된 이야기다.
하지만 장천의는 말했다.
‘물론, 그걸 알게 된 건 시간을 계속 끝없이 돌리고 난 후였습니다.’
장천의는 계속 끝없이 시간을 돌렸다고 했다.
더욱이 내가 알기로, 서차윤은 제 의지로 윤리오와 윤리타를 서커스에 넘겼다.
“윤사해가 제 자식들을 외면하게 되는 계기. 그 계기가 바로 정답이었습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서차윤.
그에 대해 알고 있어서 감정이 끓는 모양이지.
“여하튼, 이후 서차윤 역시 상황을 알게 됐습니다.”
“무슨 상황이요?”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손으로 윤리오와 윤리타, 친구의 아들들을 서커스에 넘겨야 한다는 것을요.”
울컥,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장천의는 물끄러미 나를 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 윤리오와 윤리타.
둘 중 하나가 죽어 윤사해가 미쳐 버리거나.
“윤사해가 유랑단과 전쟁을 벌여 이 땅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거나.”
끔찍한 상황만 나왔다며 장천의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서차윤은 자신의 손으로 두 아이를 납치하기로 했습니다.”
설사, 윤사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윤리오와 윤리타가 죽는 것도, 그 아버지인 윤사해가 미쳐 날뛰는 것도 보고 싶지 않으니.”
그래서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실패했죠. 대체 뭐가 문제이기에.”
장천의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서 그런 건가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이 세계가 정한 주인공.”
저세상.
“그가 문제였습니다.”
어떤 악(惡)이라도 절대 용서치 않는 주인공.
정의로운 그가 문제란다.
“그래서 생각했죠. ‘저세상’을 대체하자고.”
“그게 저군요.”
“정답입니다, 마리아 양.”
장천의가 싱긋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더니. 그건 다 거짓말이다.
나는 손을 들어, 곧장.
쫘악!
장천의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말이다.
스킬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곧장 머리를 땅에 박아 사과하라고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과의 대상이 도대체 누구일까?
서차윤?
그는 이제 없다.
저세상?
그 역시 곁에 없다.
그럼, 내가 수도 없이 뺨을 때리기 전까지 억지로 아이들을 밀어내던 윤사해?
그들 모두를 생각하며 두 손을 꼭 주먹쥐었다. 장천의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 이내 말했다.
“의외로 손이 맵군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까 더 세게 때릴 걸 그랬네요.”
“하하.”
장천의가 실없이 웃고는 말했다.
“여하튼, 저세상을 대체할 주인공으로 꽤 여러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저세상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도록 움직이게 했고요. 하지만 썩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군요.”
그러니까 ‘저세상’이 간 결론까지 가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장천의의 두 눈에 내가 담겼다.
“당신은, 그러니까 리사 양은 너무 어릴 적에 죽고, 몇 번이고 계속 시간을 돌려도 계속 죽어서 결코 변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생각을 다르게 해 봤다면서 그가 말했다.
“그게, 윤리사를 저로 대체하는.”
“네, 맞습니다.”
장천의가 내 말을 끊고는 퍽 유쾌하게 말했다.
“이곳의 본체가 되는 곳, 그러니까 마리아 양께서 살던 지구는 어쨌든 저희의 모든 데이터의 기반이 되는 곳이니까요.”
윤리사 역시 누군가의 데이터에 의해 태어난 존재.
“그 데이터를 찾아보니, 그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더군요.”
“아닐 텐데요.”
장천의의 말을 부정했다.
“저는 부모님이 없었어요.”
“윤리사 양 역시 없는 거나 다름없었죠.”
장천의가 말문을 막히게 했다.
“하지만 당신은 달랐습니다. 보육 시설에 살았다고는 해도 꿋꿋했죠.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척이나 잘 살았죠.”
“저는……!”
성인이 된 후,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장천의가 말하기를, 무척 잘 살았단다.
허탈했다.
허무했다.
그렇지마는 후회되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마리아가 아닌, 윤리사니까.
윤리사.
그 아이와도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장천의의 말을 들었음에도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장천의가 물었다.
“윤리사의 몸에 빙의된 게 후회가 되지는 않지요?”
묻는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장천의가 말했다.
“리사 양은, 그러니까 진짜 리사 양은 말입니다. 손을 쓰려고 해도 계속 죽었습니다. 도저히 ‘주인공’으로 만들 수 없었죠.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그 몸에 빙의된 후, 죽을 뻔한 경우가 많았지만.”
“보란 듯이 멀쩡히 살아 있죠.”
성큼, 장천의의 앞에 다가가서는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하나 정정해 드릴게요.”
마음 같아서는 그의 뺨을 한 대 더 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진짜 윤리사는 없어요. 제가 진짜예요. 물론, 사라진 그 아이도 진짜고요.”
장천의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웃었다.
“네, 그렇죠. 이것, 참. 제가 크게 실수했군요. 미안합니다, 리사 양.”
마리아가 아닌, 리사.
장천의가 나를 ‘윤리사’로 다시금 불렀다.
“여하튼 그렇게 이 세계의 모체가 되는 곳에 있는 당신에게 이 세계의 정보를 줬습니다.”
『각성, 그 후』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를 이끌어 온, 주인공.”
저세상.
“당신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없어져야 했거든요.”
뭐……?
“그래서 당신에게 보여 줬던 정보의 세계.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지난 과거가 되겠군요. 그 과거에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저세상이란 존재가 없도록요. 아, ‘백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버렸다는 거였다.
멸망해 가는 세상에.
그 두 사람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세계로 넘어온 건지, 그가 존재하더군요.”
저세상을 말하는 것일 터.
“처음에는 알 게 모르게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무언가 오류로 인해 지워지지 않았다고 해도 무척 위험했으니까요.”
하지만 힘들었다면서 장천의가 마치 위로해 달라는 듯 굴었다.
“고객님이 저를 얼마나 경계하던지 결국 포기하게 됐죠.”
대신 지켜보기로 했다.
“순리에 따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냥 도망친 거 아니에요?”
장천의가 물끄러미 나를 봤다. 그에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말했다.
“그냥 도망친거잖아요.”
“리사 양, 저는.”
“순리고 뭐고 옆에서 도울 수 있었잖아요.”
저세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그 과정을 보지 않고 도와도 됐다.
“리사 양.”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장천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내 앞에 그 얼굴을 보이다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여기로 오게끔 만든 거, 당신이 그런 거지?”
갑자기 별장이 생각나다니.
그것도 해바라기가 모두 진, 별 볼 곳도 없는 별장이 말이다.
장천의는 조용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후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정말 너무하네요.”
“뭐라고 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렇겠죠.”
비아냥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제 와 이렇게 모습을 보인 이유는요?”
CW를 비롯한 모두가 그를 찾을 때에는 모습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서야 그 얼굴을 보이다니.
장천의가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들려줬다.
“곧, 리사 양께서 읽지 못했던 『각성, 그 후』의 뒷이야기가 새로 시작될 겁니다.”
“네?”
멍하니 묻는 찰나.
쿠구궁!
대지가 울렸다. 동시에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아, 시작됐군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장천의가 말했다.
“리사 양, 기회는 이제 없습니다.”
장천의가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이내 그의 뒤로 금빛의 시곗바늘이 나타났다.
“당신의 적을 죽이십시오. 그럼, 이 세계는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적.
그건…….
생각을 멈추고 얼굴을 구겼다.
내게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장천의, 그 빌어먹을 아저씨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