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져 버린 곳에서(1)
……장천의?
정말 그라고?
다급하게 두 눈을 비비려는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리사 양.”
정말이다.
해바라기꽃이 저문 땅, 겨울이 잔뜩 내려앉은 곳에 장천의가 있었다.
그것도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그렇게 태연하게 그는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나도 모르게 그를 부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이곳은 우리 고객님의 사유지였죠? 하지만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일그러진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졌다.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않고 내뱉었다.
“왜.”
당신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이곳에 있는 거냐고요.”
장천의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시선이었다.
그에 입을 열었다.
“장천의 회장님.”
‘아저씨’라는 살가운 호칭 따위 그냥 버렸다.
“사람들이 당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는지 알아요? 특히 CW는.”
“모두 제가 죽었다고 해도 듣지 않고 저를 찾고 있죠. 아주 꾸준하게 말입니다.”
장천의가 내 말을 끊고는 웃었다.
“원래는 없던 일입니다.”
뭐?
“진달래 양이 CW를 잘 지탱하고 있어 줘서 그런 거겠지요. 원래는 항상 제가 사라지자마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곳이었는데 말이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똑똑한 리사 양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습니다만?”
능글맞게 묻는 목소리에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장천의가 말한 내용.
그 내용은 바로, 『각성, 그 후』에서 묘사됐던 CW의 이야기였다.
4대 길드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무너진 모습.
CW는 항상 그렇게 등장했다.
이 세상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그 이야기를.
‘장천의가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말했다.
CW는 항상 그래 왔다고.
‘대체…….’
장천의는 정체가 뭘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게 있어서 장천의는 『각성, 그 후』에서는 이름만 등장했던 별 볼 일 없는 엑스트라였다.
나중에는 돈 많은 아저씨였고.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별 볼 일 없는 엑스트라도, 그저 돈 많은 아저씨도 아니었다.
“장천의. 당신, 도대체 뭐야?”
날 선 목소리가 절로 튀어 나갔다.
“저세상이 그랬어.”
“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저를 찾으라고 말입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
나는 대답했다.
어느새 장천의를 대하는 목소리가 한없이 가벼워져 있었지만, 그도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장천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리사 양.”
아니.
“마리아 양.”
오랜만에 듣는 이름, 마리아.
진짜 윤리사와 마주한 그 순간에 버렸던 이름을 장천의가 불렀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뭐라고.”
“제 질문에 먼저 답해 주시죠.”
장천의가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마리아 양의 가족, 그러니까 우리 고객님과 그 아들들 말입니다.”
윤사해와 윤리타, 그리고 윤리오.
그들을 칭하며 장천의는 나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할 수 있어.”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사해와 윤리타, 그리고 윤리오.
나의 가족들.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인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내 대답에 장천의가 픽 웃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뭐?”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군요.”
장천의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죠. 그런 그녀가 죽었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요.”
장천의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니.
그런 이야기 따위.
“들어본 적 없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럴 겁니다. 지금은 없어진 이야기니까요.”
내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마리아 양께서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세상이냐고?
답은 간단했다.
“각성자와 비각성자, 그리고 미지 영역의 거주자가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지구.”
“그렇죠.”
장천의가 싱긋 웃었다.
“이곳은 마리아 양께서 계셨던 지구와는 확연히 다른 곳입니다.”
“내가 있던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네.”
“그럼요. 저는 이 세상이 왜 만들어졌는지도 알고 있는 걸요?”
그렇게 말하는 장천의의 뒤로 시곗바늘이 나타났다.
금빛으로 이루어진 것이 곧이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꾸로 말이다.
그와 함께 세상의 풍경도 빠르게 바뀌었다.
“원래 이곳은 마리아 양께서 살던 지구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빠르게 돌아가던 시곗바늘이 곧 멈췄다.
이내 펼쳐진 건, 해바라기가 아닌 다른 꽃이 활활 불타고 있는 광경이었다.
“마리아 양께서 살던 지구는 말입니다. 멸망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신화와 전설. 그 밖의 여러 이야기에 등장했던 존재에 의해서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성좌.
“들어본 개념이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의가 말한 ‘성좌’는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고는 했던 개념이었다.
“그 존재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지구를 멸망시켰죠.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려도 마찬가지. 그래서 지구, 아니. 지구를 지탱하는 초월자는 결심했습니다.”
장천의의 시곗바늘이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멈춘 건,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꽃이 흔들리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지구에 존재하던 신화와 전설, 그 밖의 여러 이야기에 등장하던 존재들을 이곳에 옮겨 오기로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의 데이터를 이용해서 만들고요.”
“……거짓말.”
“네, 하지만 제가 이렇게 꾸며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랬다.
꾸며 낸다고 해도 이렇게 자세하게,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말하지 못할 내용들을 내게 알려주다니.
장천의가 생각에 잠긴 나를 뒤로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한동안 이곳은 평화로웠습니다. 물론, 신화와 전설. 그 밖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들. 그래요, 미지 영역의 거주자들에 의해 인간들이 끊임없이 고통받았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의 인간들은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그들을 위한 신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장천의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마리아’로 있던 지구에서 떠받들어졌던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그 기도 끝에 이곳에 있어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가 탄생했죠. 무려, 둘이나요.”
그 말에 알아차렸다.
장천의가 말하는 사람이, 아니. 그 존재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장천의가 내가 누구를 떠올리는지 알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 바로 당신 증조할머니인 ‘사희’입니다. 대단한 분이셨죠.”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희와 함께 등장한 또 다른 존재. 지금은 유랑단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 존재는 사희와는 달리 무척 위태로웠습니다.”
그건, 미지 영역이란 공간이 생기면서 더욱 심화됐다며 장천의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죠. 그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게 된 ‘미지 영역’의 거주자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맞아.”
장천의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 어깨에 앉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대도깨비를 보며 말했다.
“우리 위대한 대도깨비께서는 아니었죠.”
〖허울 좋게 포장하려고 들지 말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려무나.〗
계속 조용히 있던 대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꽤 날카로웠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언제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관망하던 네가 왜 이제 와서 움직이는 건지 궁금하구나.〗
“멸망이라뇨?”
놀라 묻는 내게 대도깨비가 싱긋 웃어 줬다.
〖말 그대로다. 이 세상은 수도 없이 멸망했었다. 그 시간을 저 녀석이 계속 되돌렸지. 멸망의 분기점이 되는 때로 말이다.〗
“……대도깨비님의 말이.”
“네, 사실입니다.”
장천의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태연하게 웃는 낯으로 알려 줬다.
“그 분기점이 바로 우리 마리아 양의, 아니. 우리 리사 양의 오빠들.”
한없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리오 군과 리타 군께서 서차윤에 의해 납치됐던 시간이었습니다.”
장천의는 말없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걸 알게 된 건 시간을 계속 끝없이 돌리고 난 후였습니다.”
윤사해와 에일린 리가 결혼할 때, 혹은 그 전.
장천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답이 되는 분기점은 바로 그 지점이더군요.”